<메이플스토리>를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만들면 어떨까? 캐릭터별로 거창한 스토리라인을 붙이고, 시네마틱 영상과 애니메이션, 컷신 등의 연출을 게임 곳곳에 집어 넣는다. 인물간의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해 성우도 아낌없이 사용한다. 심지어 보상은 특별한 아이템이나 능력치가 아닌 ‘감동’ 그 자체라고 한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도전이다.
그런데 <메이플스토리>는 지난해 이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에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메이플스토리> 역사상 최고의 업데이트라는 찬사도 받았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넥슨코리아 국내메이플팀의 전상민 기획자에게 그 이유를 들어보자.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전상민 기획자는 온라인게임의 라이브서비스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는 열쇠를 찾는 일에 비유했다. 그때 그때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덧붙이다 보면 개발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사라지게 된다. 라이브서비스 개발자들이 빠지는 반복과 매너리즘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눈물을 흘리고, 주변인에게 추천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얻고,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온라인게임은 어떨까? <메이플스토리> 유저들도 감동을 겪고, 삶이 나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대답은 NO다.
그럼 만약 <메이플스토리>에서도 영화처럼 스토리를 끝까지 밀어 붙이며 감동을 줘보면 어떨까?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메이플스토리>의 거창했던 도전 ‘블랙헤븐’은 이런 라이스서비스 개발자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제작기간만 총 6개월, 반면 총 플레이타임은 10시간 이내. 대신 캐릭터별 스토리와 애니메이션까지 만들며 총력을 집중한 <메이플스토리>의 ‘블랙헤븐’ 업데이트는 개발자들도 예상하지 못 한 대단한 성공을 가져왔다.
■ 스토리와 보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블랙헤븐의 출발점
모든 기획은 문제상황에서 시작한다. 블랙헤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메이플스토리>의 문제는 옆으로만 넓어지는 시나리오였다. <메이플스토리>는 검은 마법사를 처치하는 용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 용사는 각각의 캐릭터를 의미한다.
문제는 업데이트가 지속되며 늘어난 용사(캐릭터)의 숫자다. 모험가에 기사단에 레지스탕스에, 다른 차원의 캐릭터까지 덧붙으면서 용사의 숫자는 검은 마법사가 부담을 느끼고 남을 수준까지 늘어났다.
스토리도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새로운 용사가 합류하며 세계관은 꾸준히 늘어났지만 정작 메인스토리는 레벨 100이 되기도 전에 끝난다. 최종보스인 검은 마법사는 서비스 12년째 나오지도 않았다. 모든 캐릭터를 통합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보상도 필요했다. 영화는 새로운 게 나오면 재미있냐고 묻지만 온라인게임은 보상부터 묻는다. 그리고 보상이 나쁘면 바로 관심을 끊는다. 12년이나 서비스한 <메이플스토리>에서는 더 이상 줄만한 보상을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뻔뻔하더라도 보상으로 재미와 감동을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물론 게임 개발자로 이런 걸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조금 들어갔다.
■ <메이플스토리>를 블록버스터로 만들기 위한 7개의 관문
스토리와 보상, 재미를 위한 기획은 결국 메인스트림 시나리오와 시네마틱 플레이로 결론이 났다. 그림은 어느 정도 그려지지만 실제 콘텐츠를 구현하는 건 다른 일이다. 여기서 <메이플스토리>는 7개 관문을 거쳐야만 했다.
1. 업무프로세스. 넥슨은 영화제작사도 콘솔제작사도 아니었다. 영화는 대본이 나오기 전까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사전기획도 느긋하다. 하지만 온라인게임은 대본(시나리오)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결국 시나리오 작성에 맞춰서 게임을 그때그때 구현하는 쪽대본 방식을 활용했다.
2. 시스템. <메이플스토리>는 출시된 지 12년이 지난 2D 온라인게임이다. 그만큼 제약도 많은데, 이건 역발상으로 해결했다. 일단 12년 동안 기본 시스템을 많이 쌓은 만큼 새로운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3D와는 차별화된 2D만의 연출방식도 찾았다. 플레이어가 오랜 시간을 즐겨온 만큼 세계관에 몰입하기도 쉬울 거라 예상했다.
3. 리소스. 리소스는 한정돼있다. 라이브팀은 업데이트 준비와 더불어 이벤트도 해야하고 시스템도 손봐야 한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라고 달았으니 리소스는 투자해야 했다. 결국 새로운 리소스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방향을 택했고, 대신 나중에 이를 재활용하기로 결정했다.
4. 컨셉. 머리 큰 2D 캐릭터가 블록버스터라니 미스 매칭이다. 당연히 우리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인물이나 사건보다 배경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가 하늘을 나는 비공정인 블랙헤븐이다.
5. 스토리. 온라인게임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캐릭터별로 시나리오를 다 만들었다. 대신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면 연합 스토리라인으로 가도록 유도했다. 이 부분은 결국 인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6. 연출. 카타르시스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관건이다. ‘블랙헤븐’은 모든 장면을 균등하게 보지 않고 일부 장면에 모든 연출을 집중하는 방법을 택했다. 게임을 즐기고 나면 특정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장면들에 리소스를 집중하자는 의도다.
7. 작업량. 이건 답이 없었다(…)
■ 뚜렷한 테마는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넥슨에서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부터 <메이플스토리> 사상 처음 겪는 스토리라는 호평도 있었다. 물론 태생적인 한계도 있다. 일단 스토리를 아예 안 보는 유저에게는 답이 없다. 투입한 노동력에 비해 플레이시간도 너무 적다. 보름을 만들면 30분 플레이하고 끝을 보고, 다시 보름을 기다리는 일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좋은 반응을 얻은 건 어디까지나 스토리텔링의 힘이었다.
일관성 있는 테마는 많은 것을 결정해준다. 테마만 뚜렷하게 잡아도 해결되는 게 많다. 블랙헤븐의 예를 들면 기본적인 스토리는 배후조사와 전쟁, 희생 등 뻔한 이야기다. 근데 여기에 캐릭터가 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은 끝까지 평화를 고집하는 기사단과 복수를 원하는 레지스탕스, 두 종류로 분열돼있다. 반면 블랙헤븐의 기계들은 한 명의 박사 아래에 똘똘 뭉쳐있다. 균열이 있는 인간은 기계에 질 수밖에 없었고, 그때 기계로 태어났지만 인간의 감정을 가져서 폐기된 안드로이드들이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인간성과 기계성의 싸움에서 인간성을 가진 기계라는 새로운 장치가 등장하는 것이다. 스토리는 여전히 단순하지만 이야기의 깊이는 크게 달라졌다.
여기에 자신이 만든 안드로이드에 배신 당하는 박사나, 인간의 옷을 걸친 폐기 안드로이드들의 디자인, 인간을 상징하는 세미 오케스트라와 기계를 상징하는 락이 교체되는 음악 등 뚜렷한 테마를 통해 다른 직군의 작업도 한층 수월해졌다. 테마가 가진 힘이다.
■ 게임이 주는 ‘경험화’의 위력
이야기의 본질이 듣는 걸까? 읽는 걸까? 정답은 없다. 이야기는 그저 겪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블랙헤븐에서는 장면마다, 이야기마다 유저의 경험화에 집중했다. 스토리의 진행과 유저의 경험이 일치할 때 굉장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블랙헤븐의 예를 들자면 개발자들은 블랙헤븐에 잠입하는 장면에서 유저가 ‘영웅이 된 기분’을 느끼기를 바랐다. 수세에 몰린 인간, 적의 본거지에 잠입한 주인공, 이로 인해 역전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적진에 잠입한 유저 앞에는 긴 전투가 이어진다. 적들은 쉴 새 없이 쏟아지지만, 플레이어가 영웅이 된 느낌을 주기 위해 체력을 대폭 낮춘 적들이다.
그렇게 적들을 물리치고 한적한 곳에 도달하면 커맨드를 입력해서 신호탄을 발사시킨다. 그 순간 화면은 주인공의 신호를 간절하게 기다리던 이들을 비추는 애니메이션으로 바뀐다. 시나리오와 게임경험의 완벽한 일치다.
만약 이야기와 게임 경험을 분리시킨다면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는 퀘스트 대사 작성과 설정자료 작성자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와 게임 경험을 일치시킨다면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는 유저 경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게 전상민 기획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