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모에론’으로 NDC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큐라레: 마법도서관>(이하 큐라레)이 올해도 범상치 않은 제목의 강연을 준비했다. 강연의 제목은 ‘큐라레: 마법도서관 시나리오 포스트모템 - 무슨 약을 빨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요?’. 지난해 ‘엉덩국’과 충격과 공포의 콜라보레이션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헌데 연단에 오른 강연자가 하는 말이 멀쩡하다.(?) 강연자의 약력도 <큐라레>의 모에(?) 코드와는 거리가 있고 강연자 자신도 모에 코드보다는 진중한 ‘에픽’ 콘텐츠가 좋다는 인물. 이런 시나리오 라이터 아래서 <큐라레>는 왜, 어떻게 ‘약’을 빨게 된 것일가? 스마일게이트 양주영 시나리오라이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디스이즈게임 김승현 기자
■ 모바일에서 시나리오 쓰기? 권한이 콘텐츠를 만든다
지난 3월 1주년을 맞이한 <큐라레>는 겉으로 보면 평범한(?) 미소녀 카드배틀 게임이다. 허나 <큐라레>를 해 본 이들에게 이 게임는 모바일게임치고는 드물게도 스토리에 힘을 쓴 작품으로 기억한다. 당장 숫자만 하더라도 게임 내 텍스트 분량만 30만 단어, 시나리오 업데이트 주기는 2주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추가되는 시나리오도 다른 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개그코드를 내세우고 있다. 잠시 <큐라레>의 이야기가 어떤 풍인지 감상해보자.
사실 현재 모바일게임 시장에서 ‘이야기’란 많은 개발자들에게 꿈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장 매출 50위권 내 RPG만 37%가 있음에도 이 중 이야기에 공들인 게임은 하나도 없다. 당장 게임을 만들어 1달을 버틸 수 있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입장에서 ‘이야기’란 당장 돈도 되지 않으면서 너무도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장에는 이야기 없이 돈 잘 버는 게임이 많이 있으며 이를 보고 회사들은 점점 시나리오 인력을 줄인다. 이러니 시나리오 없는 게임만 출시되고 그 중 성공작이 나오면 더욱더 시나리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악순환이다.
그럼에도 <큐라레>가 이처럼 시나리오에 공을 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주어진 권한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큐라레> 팀에서 시나리오 라이터가 하는 일은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시즌 이벤트 기획, 캐릭터 관리 및 발주, IP 관리 등 콘텐츠 전반을 컨트롤한다. 단순히 상급자의 필요에 따라 부려지지 않고 시나리오 라이터가 주도적으로 콘텐츠의 한 축을 담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가능했다.
물론 이 같은 역할이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상업게임의 시나리오인 만큼, 시나리오 라이터의 역할도 이것과 관련되기 마련이다. 양주영 라이터는 <큐라레> 시나리오의 목표를 2가지로 잡았다. 하나는 상품성있는 캐릭터와 세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저들에게 꾸준한 이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라이터로서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세계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유저를 유혹해 게임의 실적까지 높이기 위함이었다.
■ 영상 세대 게이머를 잡아라! <큐라레>는 왜 ‘약’을 빨게 되었나
물론 다른 모바일게임이 시나리오를 시도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짧은 모바일게임 수명도 수명이지만, 모바일이라는 환경 자체가 시나리오 라이터에겐 굉장히 가혹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모바일게임은 특성 상 PC나 콘솔처럼 진득하게 플레이하는 게임이 적다.
오히려 대부분의 게임은 잠깐 잠깐 쉬는 시간에 즐기는 방식이며 이는 곧 이야기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작은 환경과 모바일게임의 간단한 조작도 게임의 몰입을 방해한다. 여기에 요즘 사람들은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양주영 라이터 본인조차 긴 글을 읽기 싫어하는데, 글보다 영상에 익숙한 요즘 게이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양주영 라이터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극도로 간략하게 했다. 일단 이야기 전달 자체를 지문 없이 대사로 한정해 정보량을 줄였다. 여기에 대사의 길이도 줄이고 캐릭터들의 말투도 ‘일상어’ 위주로 짜 일반인(?)들도 한 눈에 대사를 읽을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여기에 언제, 어떤 유저가 이야기를 접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에피소드 방식의 구조를 차용했다. 에피소드마다 기승전결이 확실하기 때문에 언제 어떤 시점에서 이야기를 읽어도 유저가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큐라레>의 차원우주 개념이었다.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아예 세계를 ‘차원’ 개념으로 나눠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는 구조로 만들었다.
마지막은 <큐라레> 유저 누가 봐도 웃을 수 있도록 개그 코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앞서 이야기했던 ‘언제든 즐길 수 있는 이야기’의 연장선이다. 아무리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야기가 나뉜다고 하더라도, 모바일 유저 대부분은 그 에피소드마저 쪼개 읽는다.
때문에 <큐라레>는 이야기 자체를 아예 언제 읽어도 상관없는 개그 노선으로 틀었다. 개그 덕에(?) 수많은 차원이 나뉘었음에도 최강자(?) 논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누가 이기든 재미만 있다면 만족하니까. 양주영 라이터의 말을 빌리면 이른바 ‘바카게’(상식에 벗어난 전개로 웃음을 주는 게임) 노선을 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시나리오 방향을 정해도 자원이 한정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리소스는 그림과 텍스트 뿐. 때문에 양주영 라이터는 이야기 전달을 아예 ‘비주얼노벨’ 방식으로 틀었다. 시나리오 라이터만 조금(?) 고생하면 대사와 그림, 그리고 아주 약간의 이펙트 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토코노코부터 마법소녀(?)까지, <큐라레>는 어떤 약을 빨아 왔나
이 같은 틀이 정해지자 본격적인 시나리오 집필이 시작됐다. 차원 개념을 사용한 덕에 만들 수 있는 캐릭터는 차고 넘쳤고, 에피소드 방식을 사용했기에 캐릭터의 등장 비중도 비교적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게임 또한 처음부터 ‘모에계’를 표방해 참고할 만한 캐릭터 콘셉트도 많았다.
물론 수많은 캐릭터가 생산되고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다 보니 일부 캐릭터 콘셉트가 겹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 경우 캐릭터의 핵심 콘셉트는 남긴 채 디테일을 바꿔 차별화에 성공했다. 예를 들어 똑같은 변태 캐릭터라도 어떤 변태는 어린 여자아이에 빠져있고 어떤 변태는 고양이귀, 어떤 변태는 동성애에 빠져있는 식이다. 양주영 라이터의 말을 빌리면 욕망(추구하는 것)과 공포(떠밀리는 것)의 차별화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큐라레>의 개그코드는 수많은 실패 끝에 완성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등의 작품으로 오덕계(?) 최대 화두가 된 ‘오토코노코’(여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자인 캐릭터) 속성이다. <큐라레> 또한 이 거대한 흐름(?)에 편승하고자 오토코노코 캐릭터 ‘나르키소스’를 선보였다. 하지만 효과는 미묘했다.
원인은 2가지였다. 하나는 <큐라레>가 너무 빨리 이 흐름에 동참한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등장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오토코노코가 생소했던 시기였다. 이런 개념이 퍼지지 않았던 시기에 오토코노코 캐릭터가 등장하자 나르키소스를 여자 캐릭터로 알았던 유저 대부분이 거부감을 표했다. 일부 유저들은 이 경험을 잊지 못하고 가슴 작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오토코노코가 아닌지 의심하는 웃지 못할 사례까지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감정을 이입할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다. 오토코노코 캐릭터 대다수는 이 캐릭터에 두근대는 남자 캐릭터의 존재로 완성된다. 주연급 남성 캐릭터가 ‘남자인 건 알지만 자꾸 두근대’라고 생각할 때, 그 캐릭터를 지켜보는 유저 또한 감정이입으로 그런 감정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큐라레>에는 주연급 캐릭터라곤 여성 사서 3명뿐이었다. 처음부터 오토코노코 캐릭터가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다음 사례는 ‘마법소녀’다. 마법소녀는 굉장히 오래된 캐릭터 콘셉트로, 이 때문에 굉장히 많은 변종(?)이 탄생한 콘셉트이기도 하다. <큐라레> 또한 전통적인 마법소녀는 너무 식상하다 생각해 비틀기를 시도했다. 바로 <마법소녀 프리티☆벨> 등에서 볼 수 있는 ‘어딜 봐도 근육질 남자지만 마법소녀라 우기는’ 캐릭터를 게임에 넣은 것이다. 다음은 그 충격과 공포의 스토리 영상이다.
그렇다면 업데이트 결과는 어땠을까? 양주영 라이터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그리고 세상은 멸망했다’. (…) 마법소녀(?) 업데이트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네거티브 바이럴 이슈를 만들었다. 유저 간 호불호가 극명히 갈렸고, 실제로 매출도 떨어졌다. 재미는 있었지만 ‘미소녀 게임’의 본질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이 마법소녀(?) 업데이트를 통해 <큐라레> 특유의 ‘약 빤’ 개그 센스가 완성되었다. 또한 마법소녀(?) 업데이트를 통해 한번 ‘극단’을 보여준 덕에 이 다음부터는 어떤 개그를 시도해도 유저들이 받아주었다.
■ 엉덩국의 힘! 파격은 공감대 안에서만 인정 받는다
그리고 지난해 6월, <큐라레>에 대망의(?) ‘엉덩국’ 콜로보레이션 이벤트가 시작됐다. 단순 이벤트가 아닌 ‘엉덩국’ 작가가 만든 캐릭터가 직접 <큐라레>의 이야기에 관여하는 이벤트였다. 콜라보레이션의 목적은 (당연히) 바이럴, 그리고 마법소녀(?) 업데이트로 확립된 ‘큐라레 테이스트’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물론 마법소녀(?) 업데이트로 한 번 쓴 맛을 봤던 탓에 걱정도 컸다.
효과는 굉장했다. 매출은 물론 DAU(하루 순 접속자수)도 크게 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폭발적인 (긍정적) 바이럴이 발생했다. 마법소녀(?) 업데이트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성과였다.
그렇다면 왜 똑같이 ‘흉한’ 캐릭터인데 왜 마법소녀(?) 업데이트는 싫어하고 ‘엉덩국’ 업데이트는 좋아했던 것일까? 양주영 라이터는 이를 ‘익숙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지겨워하지만,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것은 싫어한다. 때문에 파격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익숙함과 생소함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에 성공해야 한다.
마법소녀(?) 업데이트의 경우,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생소한 ‘어딜 봐도 근육질 남자지만 마법소녀라 우기는 캐릭터’를 추가해 유저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엉덩국’ 작가는 만화 자체를 본 사람은 적을지라도 관련 캐릭터나 플롯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유저들의 ‘공감대’ 안에서 파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때의 교훈은 후일 추가된 <큐라레> 흑역사 시즌에서 그대로 활용되었다. 흑역사 시즌은 그동안 <큐라레>가 실수한 사건사고를 아예 자학개그로 승화시킨 업데이트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운슨 더 마스터’ 사건이다. 엉덩국 콜라보레이션 당시, 스크립트 오류로 ‘존슨’이 등장해야 하는 장면에서 존슨 대신 ‘조운’(…)이 등장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엉덩국’ 업데이트는 계약 문제로 특정 시기 동안만 진행되는 이벤트라 수정할 시간도 없는 상황이었다.
<큐라레>는 흑역사 업데이트에서 아예 이 사건을 스토리에 추가했고 관련 카드까지 새로 그렸다. <큐라레> 유저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콘텐츠는 그동안 <큐라레>를 꾸준히 즐겨온 이들만 알아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버그나 운영진의 실수마저 자학개그 소재로 사용해 유저들과 소통하고 부정적인 이슈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만들었다.
■ 시나리오, 지금 아니면 영원히 하지 못한다
양주영 라이터는 <큐라레>의 시나리오 사례를 이야기하며 적은 리소스로도 ‘큐라레 테이스트’라는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고 2주 업데이트까지 지킬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모바일게임에서 이정도 규모로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도 그의 자랑 중 하나다.
다만 당사자에겐 이러한 성과보다는 단점들이 더 많이 보인다. 기획 상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이야기 대부분이 너무 흥미 위주로 흘러갔고, 이야기의 소재 또한 패러디와 모에 요소 등 마니악한 콘텐츠가 주를 이뤘다. 또한 2주 업데이트를 위해 시나리오 라이터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너무 컸다.
양주영 라이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상업 게임이란 산업 논리에 지배될 수 밖에 없다. 그런 환경만을 탓했다가는 영원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금 아니면 영원히 하지 못한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야만 개인의 만족과 회사의 만족 모두 달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