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고 해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다면 계속 그 일을 할 수 있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만둘 수밖에 없다. 취미로 하던 일도 그렇고, 직업으로 하던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다른 사람이 극복했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막상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누구나 나약했던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야생의 땅 : 듀랑고>의 이정수 게임 디자이너는 용감하다. 자신이 게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힘들었던 일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강연 주제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아직 미숙한 3년 차 게임 디자이너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강연을 준비했다”는 이정수 게임 디자이너의 슬럼프 극복기를 한 번 들어보자./디스이즈게임 권용필 기자
■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슬럼프
게임 디자이너로 일을 하면서, 언제부턴가 괴롭기 시작했습니다. 일에 대한 적극성과 창의성이 떨어진 것 같았으며, ‘내가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예전만큼 즐겁지도 않고 보람도 느껴지지 않았고, 회사에 앉아있으면 모두가 저를 비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죠
슬럼프가 찾아온 것입니다.
팀에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봤지만, 특별히 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걸까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좌절할 수도 있는 시점이었지만, 오히려 저는 역으로 직업병이 발동했습니다. 게임 디자이너로서 이 문제의 본질을 밝혀내고 직접 해결하고 싶어졌죠.
■ 문제의 원인을 찾아라!
가장 먼저 언제 괴로운지 정리해보니 ‘팀에 기여하지 못하고 나의 존재가 쓸모없다고 느낄 때’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자존감의 문제였죠.
게임 디자이너로서 자존감이 떨어지기 쉬운 이유는 크게 여섯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게임 디자인 작업 자체의 특수성’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치던 결국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감이 부담으로 다가오죠.
두 번째는 ‘단기적 결과물이 적다’는 것입니다. 결과물을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결국 단기적인 성취감을 느끼기 힘듭니다.
세 번째는 ‘결과의 판단 척도가 외부의존적’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제가 잘해도 외부 요인에 의해 실패할 가능성이 있죠.
네 번째는 ‘가시적인 성장척도의 기준이 애매함’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나 창의력은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다섯 번째는 ‘스스로의 전문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게임 디자인이라는 일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장벽이 작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죠.
여섯 번째는 ‘기타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저의 경우 주변과 자신을 비교해서 오는 열등감이 컸습니다.
■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하자! : 전반전
원인을 파악했으니 이제 해결하면 되겠죠.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여러가지가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골라 하나씩 해보았습니다.
먼저 힐링을 위해 여행과 맛집 탐방을 떠나봤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갔다오면 쌓여있는 일들이 문제였고, 맛집 탐방은 먹을 때는 좋았지만 살이 찌는 것이 느껴져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서 뭔가 해야한다는 것 자체가 귀찮았죠.
이어서 운동과 공부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정기권을 끊었던 헬스장은 남들처럼 한 번만 나가고 말았고, 하고 싶었던 프로그래밍도 욕구만으로는 꾸준히 할 수 없었죠. 결국 끈기가 없는 성격이라 자책하게 되어 자기신뢰도가 하락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둘 다 잃을 것 같아 하지 않았습니다.
■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하자! : 후반전
일반적인 방법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플레이어인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기존 해결 방법들을 퀘스트로서 무작정 적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저의 여건에 맞춘 퀘스트를 다시 디자인했습니다. ‘회복→자기신뢰 쌓기→자기효능 높이기’로 순서를 정해서 말이죠.
회복 단계에서는 생각을 많이 하는 직업 특성상, 회복을 위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누워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가만히만 있으면 시간이 아까워 영상물을 보며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느낌을 유지했습니다.
자기신뢰 쌓기 단계에서는 단시간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을 고려해,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당시 고생하던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유산균을 먹고, 남자친구가 게임을 할 때 중요한 부분에서 뺏어서 플레이하고, 10~4시간 정도의 짧은 게임들을 했죠. 남들이 보기엔 정말 별 것 아닌 사소한 일들이지만, 생각보다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 효능 높이기 단계에서는 자신에게 중장기적인 퀘스트들을 주고, 질리면 바로 다른 것을 하기로 했숩나다. 아무래도 즐기면서도 능력이 올라가는 '덕질'이 최적이었지만, 끈기가 부족한 저에게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바꾼 것이죠.
그림 동호회에 들어가 그림을 그려 전시도 해보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인 <야생의 땅 : 듀랑고>를 소재로 하여 금속공예나 도자기 등 2차 창작물을 만들었습니다. 그중 에코백은 정식 굿즈가 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 게임 디자이너로 생긴 슬럼프, 게임 디자인으로 극복하다.
저 자신에 맞춘 ‘맞춤형 퀘스트’는 확실히 도움이 됐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존감이 넘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자기비하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죠.
우선 퀘스트의 난이도가 적절했고, 게임 분야의 특성 상 업무와 연결할 수 있는 분야가 넓은 것은 큰 장점이었습니다. 반면 초반에 고통을 무시했던 시간, 혼자 고민했던 시간들은 아쉬웠죠. 어쩌면 더 빨리 해결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나름 성공적이었던 맞춤형 퀘스트 이후, 지금은 '자신이 잘 하는 일에 집중하기'와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세우기' 등 장기 퀘스트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자존감이 충분히 생긴 건 아니었기 때문이죠. 앞으로도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계속 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게임 디자이너로서 슬럼프를 겪은 뒤, 게임 디자인을 활용해 자존감을 채운 과정을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자존감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므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신의 토양이 되는 자존감을 회복했기 때문에 지금도 게임 디자이너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게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지만, 오히려 게임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더 잘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 해결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직업이야말로 게임 디자이너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과정과 결과가 당장은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비슷한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거나 본인이 괴로울 때, 이 강연이 생각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