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C 2016 이틀 차, <야생의 땅: 듀랑고>와 <마비노기영웅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왓 스튜디오 이은석 디렉터가 연단에 올랐다. 거의 매년 NDC 강연 주자로 나서고 있는 이은석 디렉터는 ‘돌죽을 끓입시다, 창의적 개발팀을 위한 왓 스튜디오의 업무 문화’라는 주제로 NDC 이틀 차 아침을 열었다. /디스이즈게임 반세이 기자
넥슨 왓스튜디오 이은석 디렉터
이은석 디렉터는 현재 왓 스튜디오(What! Studio) 디렉터로 재직하며 <야생의 땅: 듀랑고>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강연에 앞서 이 디렉터는 “<야생의 땅: 듀랑고>를 가지고 몇 년째 강연하는 것이냐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라며 긴장된 장내 분위기를 가볍게 풀었다.
이어 이 디렉터는 적극적인 NDC 참여의 이유를 ‘중간 공유’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왓 스튜디오는 NDC를 개발자들의 축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간 중에는 구성원들이 강연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권장하는 편이다. 직접 강연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서포트하기도 한다. 중간 공유의 의미를 대입하면, 구성원들이 강연을 듣거나, 강연을 준비하는 것 또한 작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보통 게임을 출시하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 ‘포스트모템’이라는 이름으로 사후 부검(?)을 하는데, NDC 참여는 게임을 ‘생검’하는 과정이다. 생검도 사후 부검만큼의 충분한 의미가 있다.
NDC 2016 이은석 - 돌죽을 끓입시다: 창의적 게임개발팀을 위한 왓스튜디오의 업무 문화
게임이 양산되고 있는 현 상황, 그리고 우리에게 창의성이 필요한 이유
돌 죽 이야기
어느 날 길을 가던 여행자가 마을에 들러 사람들에게 음식을 청했다. 남루한 행색 때문인지 음식을 얻지 못한 여행자는 냄비를 불에 올린 다음 돌을 넣고 수프를 끓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여행자는 대답했다.
“돌 죽을 끓이고 있습니다. 완성되면 정말 맛있을 거예요!”
여행자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계속 말했다.
“그런데, 재료가 조금 부족하네요. 당근이 조금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한 재료들을 여행자에게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갖은 재료들을 넣고 끓인 돌 죽, 죽이 완성되자 여행자와 사람들은 돌을 빼내고 맛있게 나눠 먹었다.
돌 죽 끓이기 방식은 집단이 창의성을 발휘하기 좋은 형태다. 돌 죽 끓이기의 핵심 요건은 비전을 제시해 구성원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으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먼저 적당한 것을 만들며 예상되는 결과물이 멋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하는 과정과 결과물이 모두 집단 창의성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디렉터는 뒤이어 게임 생태가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고 말했다. 게임 간 상호 물리적 연관성이 적기 때문에 성공하는 극소수의 슈퍼스타 게임들이 거의 모든 것을 가져가는 냉혹한 흥행 비즈니스라는 것이다. 또한, 게임의 평가는 1점부터 5점까지 균등하게 정규 분포를 띄지만, 5점짜리 게임이 매출의 대부분을 휩쓰는 거듭제곱형 독식 구조라는 점도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들은 게임이 ‘양산’되는 현상을 만든다. 게임의 장르나 플랫폼에는 필연적으로 레드오션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게임 간의 변별력은 당연히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혁신적이었던 MMORPG같은 게임들도 이제는 아무나 양산할 수 있는 흔한 게임이 돼 버렸다. 이제 슈퍼스타가 아니라면 누구나 최저가 대열에서 경쟁해야 한다.
왜 개인이 아닌 집단 창의성인가?
게임 개발은 창의성으로 결집된 산업처럼 보이지만, 어느 정도는 노동력과 창의력이 혼재된 산업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언뜻 보면 집단 창의성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잘만 하면 개인의 창의성보다 집단 창의성이 좀 더 나을 수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통해 살펴보자.
픽사는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프리 프로덕션과 프로덕션, 두 가지 단계로 나눈다 . 프리 프로덕션은 말 그대로 제작 전에 오랜 시간동안 집단 창의성의 힘으로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다. 프로덕션은 구상이 끝난 후의 본격적인 제작 단계다.
프리 프로덕션은 3~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다. 프리 프로덕션은 적은 인력이 대략적인 작품의 아웃라인을 정하는 것(브레인 트러스트)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구상된 아웃 라인을 기반으로 스토리 보드가 제작된다. 이후에는 스튜디오의 인원들이 참여해 자유롭게 리뷰하고, 변경점을 반영해 다시 공유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은 작품 제작에서 집단 창의력이 가장 크게 발현하는 단계다.
프로덕션 단계에 돌입하면 실제로 작품이 제작된다. 이 단계에서는 각종 전문가를 비롯해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며 프리 프로덕션에서 정해진 스토리를 높은 퀄리티로 구현하는데 집중한다.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집단 창의성이 자유롭게 발현하기 어렵고 변경점이 생긴다 해도 도중에 수정하기 어렵다. 때문에 완벽한 사전 제작이 필요하다.
게임은 조금 다르다. 애니메이션은 길어야 2시간의 러닝 타임을 갖고 있어 게임보다 볼륨이 작고 리뷰하기도 쉽다. 그러나 게임은 플레이 시간이 길 뿐더러 유저와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인 콘텐츠다. 따라서 비선형적이고 불확실성도 높다. 그래서 게임 개발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고, 프리 프로덕션은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작업이다.
디렉터 혼자 창의적이었던 과거, 실패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구성원들
2001년에 출시된 <화이트데이>를 만들 때 나는 디렉터로써 집단의 힘을 간과했고 실수를 저질렀다. 나 혼자 창의적인 디렉터였던 것이다. 나는 구성원들을 마이크로 컨트롤하며 압박했고, 그것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본인을 믿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물론 업계 전체의 전문성이 낮았던 시기였고 일일이 손대지 않고서는 마음에 드는 수준을 만들기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어 그 당시 구성원들에게 다시 한 번 사과하고 싶다.
그 때 내가 실수했던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그들에게 ‘실패할 자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대개 상급자가 더 많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상급자가 답을 제시해버리면 창의성은 거기서 멈춘다. 질문, 토론을 통해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실패하는 것 또한 성장에 필요한 요소 중 하나다.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은 디렉터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구성원들에게 디렉터만큼의 오너십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 전에 프로젝트가 내 것이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켜서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제안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무분별한 크런치 모드는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딜 뿐인 일이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조직에 개인의 창의성이 아니라 집단의 창의성을 담아야 한다.
혁신에 유리한 조직이란?
그렇다면 집단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한, 혁신에 유리한 조직은 어떤 조직일까? 바로 비전을 제시하고, 비전을 통해 선순환을 만드는 조직이다. 비전이 있어야 인재가 모여든다.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일단 뭐라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생각보다 꽤 중요하다. ‘보이는 것’에는 겉치장 이상의 힘이 있다.
또한, 혁신을 위해서는 조직이 자발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직의 지향점을 정해두고 행동보다는 동기를 컨트롤하는 것이다. 동기가 자극되면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져 자발적으로 일하게 된다.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도 효과적이다.
많은 부분이 불확실한 게임 개발 조직에서 조직의 지향점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시각각 들 것이다. 그러나 지향점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확실히 낫다. 다만, 돌판에 새겨 수정할 수 없도록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많은 조직이 라인형 조직으로 구성돼 있다. 라인형 조직은 사고 발생을 최소화해야 하는 조직에 어울린다. 군대나 공장 등 매뉴얼이 명확하고 리스크가 큰 조직에서는 절차와 책임이 명확해야 조직이 제대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 개발 조직은 사실 그렇게 큰 리스크가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물론 DB를 잘못 업데이트 하는 등의 사고가 생길 수는 있지만,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종류의 리스크는 아니다. 라인형 조직은 집단 창의성 발현에 유리한 조직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게임 개발 조직에는 적합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또한, 조직과 작업에 대한 열린 비판과 직언이 가능해야 한다. 조직의 지향점을 정렬하는 것은 자칫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집단사고의 함정은 수많은 오판과 사고의 원인이 된다. 집단사고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 일부 조직에서는 ‘무조건 반대 의견만 제시’하는 악마의 변호인을 둘 정도다.
조직의 지향점을 정렬하는 것과 비판을 수용하는 것의 균형을 찾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향점도 수정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사실 게임 개발에서 디렉터 시스템은 조금 낡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제왕적/권위적 리더십에 기초하고 있기 떄문이다. 사실 디렉터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복잡성이 훨씬 높은 온라인게임 개발 조직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최근 몇 몇 조직에 반영되고 있는 ‘프로듀서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합이 게임 개발 조직에는 더 어울린다고 본다.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왓 스튜디오, 업무 문화는 참여와 토론, 개방성으로 정의
그렇다면 이제 우리 조직 이야기를 해 보자. 왓 스튜디오는 내가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뒤 가장 최근에 만든 신규 조직이다. 우리는 굳이 비유한다면 잡동사니가 마구 쌓여있는 테이블 같은 느낌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NDC의 슬로건인 다양성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왓 스튜디오의 업무 문화는 참여, 존중, 토론의 개방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비 전문 분야라도 의견 표현은 자유롭게, 그러나 결정은 전문성 있는 담당자의 몫으로. 특징은 매니저가 대화의 게이트 역할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서의 장벽을 넘어 실무자들끼리 대화하고, 주고받은 대화를 공개 저장한다. 매니저는 대화 로그를 보고 사후에 개입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러한 업무 문화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대화하고 일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여러 채널로 대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가끔은 대화량이 부담스럽다는 단점이 있다. <야생의 땅: 듀랑고>의 2차 LBT 기간 동안 왓스튜디오가 나눈 최대 대화량은 일일 1만 문장이었는데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6~7천 문장으로 되어 있으니, 엄청난 양의 대화를 주고 받은 셈이다.
단점은 또 있다. 바로 즉답성과 컨텍스트의 전환 비용 충돌이다. 대화량이 많고 공개돼 있다보니 내가 원하는 정보는 바로 얻고 싶은데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줄 때는 내 흐름이 자꾸만 끊긴다. 그리고 당연히 산만하다. 단톡방을 20개쯤 띄워놓고 업무를 진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위에 열거한 단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비밀리에 주고 받는 언더 커뮤니케이션보다는 당연히 오버 커뮤니케이션이 낫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보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들을 시기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다음은 각 의사소통 수단들의 특징과 수신비용/송신비용/전달력에 각각 점수를 매긴 것이다.
T자형 인재를 선호하는 왓 스튜디오, 화이트리스트보다 블랙리스트가 창의성에 도움돼
왓 스튜디오는 T자형 인재를 선호한다. 주변 분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으면서 본인의 고유 능력이 있는 인재다.
조직은 다양한 퍼즐조각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퍼즐조각은 모자라는 것보다 중첩되는 것이 낫다. 우리 조직의 경우 아티스트가 프레임 레이트를 걱정하고 프로그래머가 의상의 룩을 걱정하는 일이 있는데, 반대(아티스트가 룩만 걱정하는)보다 훨씬 낫다. 게임 디자이너가 신규 채용되면 1인 게임을 개발해보라고 과제를 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또한, 왓 스튜디오는 화이트리스트보다 블랙리스트 원칙을 선호한다. “이것만 허용” 보다는 “이것만 금지”인 것이다. 이러한 업무 환경은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취미활동, 그 중 특히 게임을 권장하는 것도 왓 스튜디오의 문화 중 하나로, 우리는 개발자의 게임 감수성이 게임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잉여로움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잉여로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요즘은 쓸모없음, 비생산적인 상황에 자조적 의미를 담아 잉여롭다고 하는데 과연 잉여로움은 죄악일까? 나는 잉여로움이 생산 활동에 있어 일종의 ‘버퍼’가 된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게임 개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팀원들이 놀지 않는 것은 개별 콘텐츠 생산력 측면에서는 플러스 요인이지만 병목 지점까지는 그대로 두는게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도움이 된다. 개발자가 즐겁게 일해야, 유저도 즐거운 게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