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게임 기획자로 통용되는 게임 디자이너. 전문적이고 오랜 시간의 교육을 필요로 하는 개발자나 아티스트에 비해 출신 분야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야생의 땅: 듀랑고>를 개발하는 왓 스튜디오에서 게임 디자이너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한 강임성 파트장 역시 그랬다. 별 다른 고민 없이 그저 지질학이 좋아 박사 과정까지 총 8년을 공부했지만 변변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강 파트장은 냉정하게 자신을 되돌아봤다. 평생 직장이 사라진 요즘, ‘이대로 미래에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사실 공부 외엔 해 본 것이 별로 없었고, 연구를 계속 하다가는 제대로 된 스페셜리스트도 아닌 삼류 스페셜리스트가 될 판이었다. 그렇게 강 파트장은 뒤늦게 제2의 진로 탐색에 나서게 된다.
강임성 왓 스튜디오 게임 디자인 1파트 파트장
8년의 공부를 뒤로 하고 소프트웨어 디자인의 길로
8년이란 시간을 연구원으로 보낸 ‘매몰 비용’이 아까웠지만 강 파트장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페셜리스트의 길을 선택했지만, 실패했다면 제너럴리스트의 삶이라도 빨리 선택해야 더 큰 손실을 보지 않을 것 같았다.
뭘 해도 고만고만할 것 같아 강 파트장은 그나마 평소 관심이 있었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스마트폰 앱 디자인의 길을 택하게 된다. 당시 아이폰이 등장하며 막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었고, 좋은 앱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나름대로 가치있는 일이 될 터였다.
다행히 앱 개발 업체 대표와 연이 있었다. 평소 관심있던 분야다 보니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한 몫 했지만, 학교를 그만둔 만큼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컸다. 대표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작은 회사에서 ‘실무’를 몸으로 익힌다는 로망을 안고 강 파트장은 디자이너로써의 첫 커리어를 시작한다.
대략적으로 진로를 정한 강 파트장은 초보 디자이너들이 저지르는 실수들을 고스란히 범해 나갔다. 아이디어만 내놓으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만들어 질 거라 생각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냈다. 사용자 관점의 경험과 앱을 직접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란 것도 깨달았다. 처음 써 본 앱 기획서는 그야말로 ‘허접’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개발자들이 강 파트장의 문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글은 어느 정도 잘 썼지만, ‘문장이 길고 장황해서 두 번 세 번 논문 읽듯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개발자들의 말이었다. 기획서에서 빈틈이 발견되는 것도 강 파트장을 괴롭게 했다. 완벽한 기획서는 ‘유니콘’ 같은 거라지만,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에서 개발자들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강 파트장은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어렵게 선택한 제2의 진로지만, 디자이너가 왜 팀에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트는 아티스트가 더 잘 하고, 프로그래밍은 개발자가 더 잘 한다. 그럼 구현력이 없는 디자이너는 뭘 할 줄 알아야 할까?
엣지있는 경험을 디자인하기 위해
강 파트장은 ‘엣지있는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프로듀싱이 아닌, 게임 디자인이라는 영역에서 전문 역량을 기른다는 것은 난해한 일이었다. 강 파트장은 빠른 레벨업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만 1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작지만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디자인했고, 여러 가지 능력치가 상승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매번 좌충우돌하는 것을 보완하고 싶기도 했다.
먼저 양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나중에 어떤 작업을 하게 될 지 모르니 최신 테크 뉴스, 게임 개발 인터뷰, 그래픽 디자인, UI 등 쓸모있어 보이는 자료를 닥치는대로 긁어모았다. 모은 것들을 모두 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관심가는 것들을 읽고, 좋은 것들은 요약이나 메모도 해 보고, 정말 좋은 것들은 번역을 했다. 필요에 따라 모아둔 자료에서 키워드 검색을 통해 원하는 자료를 찾기도 했다.
그런데, 글 만으로는 부족했다.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직무 관점에서 ‘글’은 현장감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어 자료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 파트장은 세미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대형 세미나는 물론, 소셜게임 세미나 같은 소규모 세미나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소셜게임 세미나에서 만난 연사가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던졌다. “GDC(Game Developers Conference)를 사비로 다녀왔는데, 가끔 다녀올 만 해요. 아깝다 생각 말고 그만큼 영감을 얻으면 됩니다.”
앱 디자인 업계에 들어온 지 1년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원래 게임 디자인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앱을 만드는 것이 재미있었고 내가 만든 것을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니 보람찼다. 계속 앱을 디자인할 지, 게임 디자인을 전문으로 할 지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강 파트장은 ‘게임 디자인의 정상’을 보는 것이 판단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강 파트장은 배낭 하나만 매고 혈혈단신 GDC행에 나섰다.
게임 개발 생각만 하며 보냈던 GDC에서의 4박 5일, ”아, 게임 만들고 싶다”
GDC에서 보낸 시간은 커리어의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짧은 시간동안 다른 사람의 성공/실패담을 들으며 실무적으로 배운 것도 많았지만, 열정적으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는 개발자들, ‘인간을 벗어난 존재’같이 느껴지는 어떤 개발자들을 보며 강 파트장은 생각했다. “그래, 결심했어. 게임업계에서 일하자. 언젠가 나도 저 사람들 따라 잡을거야!”
물론 모든 발표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구글 TV 게임 플랫폼 소개 세션을 들었을 때는 꼭 전형적인 실패처럼 보였다. 농담처럼 “역시 구글 엔지니어들은 발표를 잘 못 하나 봐요”라고 던진 말에 예상 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건 엔지니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은 거예요. 그 정도 사람이면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발표 기회 잡고 발표력 키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노력을 안 한 거예요.”
답변을 머릿속에 새겨 돌아온 강 파트장은 기회를 만들어 발표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소셜게임 파티에서, 한국 게이미피케이션 연구 모임에서, 그리고 TEDx부산에서. 외부에 공개할 프로덕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간 열심히 트렌드/이론을 공부한 결과였다.
발표를 열심히 하고 다니다보니 업무 범위보다 넓은 시야에서 사안을 볼 수 있었다. 발표를 할 때 필요한 ‘주장을 알기 쉽게 전달하고 근거로 설득하는 것’은 디자이너에게도 중요한 역량이었다. ‘발표만 잘 한다’라는 비판을 받기 싫어서 실행력과 실무력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된 것은 덤이었다.
강 파트장은 이제 정말 게임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다만, 좀 더 넓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블로그에 이런 저런 연구 글들을 올리고 있던 와중, 게임 디자이너가 필요하던 소셜게임 회사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여차저차 입사를 한 지 몇 주 만에, 대표가 신규 프로젝트를 가지고 왔다. ‘페이스북 올림픽 오피셜 소셜게임’ 개발이었다. 일정은 단 6개월이었고 게임 디자이너는 경력 2년 3개월의 강 파트장 혼자였다.
일반적으로는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 파트장은 아직 GDC뽕(?)에 취해있었다.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개발 기간은 6개월, 게임 디자이너는 나 혼자.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오피셜 올림픽 게임이라서인지 가이드라인이 까다로웠다. 게다가 팀원들과는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사이였다. 게임을 다 못 만들었다는 이유로 올림픽이 연기될 리는 없었기 때문에 일정 조율의 여지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매출 목표치는 낮았다. 일정 내에 관계 조직이 만족할 만 한 퀄리티로 출시만 하면 됐다.
출시일을 정하고 일정을 역으로 계산해 보니 정신이 멍해졌다. 디자인에 들일 시간이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디자인하기보다는 익숙하고 안전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강 파트장은 ‘케익 따라 만들기’ 기법을 쓰기로 결정했다. 기본 구조는 따르되, 독특한 토핑(엣지 콘텐츠)을 얹어 개성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부랴부랴 게임의 기본 디자인을 결정하고 차별화 지점(토핑)도 만들기 시작했다. 관계 조직들을 안심시켜야 했기 때문에 괜찮아보이는 디자인 문서들도 계속해서 만들었다. 수십 장의 디자인 문서와 별도의 요약판까지. 그야말로 문서 지옥이 펼쳐졌다. 강 파트장의 문서 작성력이 강제로 레벨업 되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찾아온 번 아웃,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찌어찌 게임을 출시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의미한 성과도 냈다. 출시 후에는 게임을 추가로 개선하고 지표 분석 리포트도 썼다. 올림픽 게임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 쌓은 경험과 스킬이 많았다. 팀워크과 팀원간 신뢰, 초반 콘셉트부터 론칭과 라이브 과정, 전체 파이프라인 설계까지 모두가 진귀한 경험이었다.
런던 올림픽 개막으로부터 사흘 뒤인 2012년 7월 30일, 카카오톡 게임이 등장했다. 강 파트장은 올림픽 게임을 통해 체득한 교훈과 시티 빌더의 꿈을 안고 카카오톡 유저 눈높이에 맞는 시티 빌더를 고민했다. 만 3년을 넘어간 경력. 이번 기회를 통해 게임 디자이너로서 한판 승부를 벌일 생각이었다. 메인 루프를 더 튼튼하게 다듬고 팀에 새로운 비전을 공유했다.
론칭을 앞두고 불안감이 커졌지만, 론칭 후 리뷰가 좋았고, 지표도 잘 나왔다.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불과 라이브 2-3주만에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저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고, 밸런스가 맞지 않아 결제율도 낮았다. 엔드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은 물론, 문제점을 개선할 시간도 부족했다.
핑곗거리는 많았지만 이 모든 것을 혼자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다. 분명 알고는 있었다. 사람의 물리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못할 것 같은 건 못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모든 한계를 개인의 노력과 책임감으로 커버하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뒤늦게 인력을 충원하고 외주를 활용했지만 카카오톡 게임의 특성상 모멘텀을 잃어버린 뒤였다. 그렇게 강 파트장에게 지독한 번 아웃이 찾아왔다.
디자이너의 번 아웃, 많이 성장했지만 결국 퇴사까지
번 아웃의 증상으로 먼저 자신감 하락이 찾아왔다. 자신감이 떨어지니 결정을 회피하게 됐다. 작은 이펙트 글씨 색 결정까지 타인에게 넘겼다. 결정이 두려워진 탓에 ‘엣지’를 세우고 남을 설득하기도 어려워졌다. 누가 해도 똑같은, 무난하고 안전한 디자인만 이어졌다.
엣지없는 디자인을 가지고 구현한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결과가 좋지 않으니 팀원의 신뢰를 잃게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강 파트장은 디자인에 더욱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고, 이것이 다시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번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작은 성취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거나, 엣지가 덜 필요한 디자인을 맡는 것으로 심적 부담을 덜었다. 신뢰가 남아있는 팀원으로 파트너가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강 파트장이 번 아웃을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평소 멘탈이 깨져도 빠르게 회복하는 편이라 그냥 잠시 안 좋은 거라고 여긴 게 화근이었다.
회사의 배려로 반 년 넘게 디자인을 하지 않고 지표 분석, 개선점 논의, 통계, 라이브 콘텐츠 업데이트만 담당했다. 새 업무는 재미있었고 나름 퍼포먼스도 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큰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의견 내기가 두려웠고, 이견이 있어도 내 의견을 내고 설득할 에너지가 없었다. 고군분투하던 주니어 디자이너에게는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강 파트장은 2년 2개월의 시간을 끝으로 퇴사를 결정하게 된다.
모셔갈 정도는 아니라도, 구직에 문제는 없을 줄 알았다
구직자 신분으로 되돌아온 강 파트장은 게임 사업 파트의 문을 두드렸다. 게임 디자인하는 것이 여전히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했던 플랫폼 연구나 통계 분석 쪽 직무 경험을 살려 사업쪽 일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3개월의 경력, 게다가 콘셉트부터 출시까지 풀 사이클을 리드했던 프로젝트가 무려 3개였다. 당시 트렌드였던 페이스북 게임, 카카오톡 게임도 해 봤고 통계와 시각화에도 자신있었다. 세미나에서 발표한 경력도 꽤 있었다. 누가 모셔갈 정도가 되진 못 해도 구직에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서류 통과조차 되지 않았다. 몇몇 면접갔던 곳에서는 ‘하이스펙이라 부담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다시 게임 디자인 파트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PC 게임쪽에선 서류 통과도 안 될 뿐더러 모바일쪽에서는 면접도 거의 못 보는 나날이 지나갔다. 에너지를 충전하려고 퇴사했는데 실시간으로 에너지가 깎이고 있었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던 때와 같이 다시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봤다. 이유가 보였다.
어쩌면 나는 대나무 숲이 사라진 팬더가 된 게 아닐까?
강 파트장의 유의미한 사업 경력은 1년 반 정도. 그나마도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늦게 시작한 탓에 나이도 많았다. 게임 디자인 경력도 아동용 태블릿게임과 페이스북 캐주얼게임, 모바일 캐주얼게임으로 한정됐다. 프로듀싱 능력을 높게 쳐 줄 수는 있겠지만 히트작이 없었다.
강 파트장의 커리어는 캐주얼 성향의 시티 빌더 개발 스페셜리스트였다. 하지만 당시 시장은 하드코어 성향의 자동 RPG + 가챠가 대세였다. 스페셜리스트인 시장은 수요가 없고, 다른 스킬은 제너럴리스트 수준이라 스페셜리스트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임업계를 떠나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원인을 찾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게임잼에 참석해 디자인 오리지널리티와 프로듀싱 자신감을 회복했다. 회사 다닐 때는 하기 어려웠던 긴 UX 글을 번역하기도 했다. 어쩌면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갈 길을 찾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뉴스 서비스 연구 모임에서 만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에이, 그래도 전 남의 콘텐츠 파는 것보다 내 것 만드는 게 더 재밌더라고요.”
다시 한 번, “게임 만들고 싶다.”
그간의 시간을 돌이켜 본 강 파트장은 퇴사 후 봤던 면접에서 혼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번 아웃으로 지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사업 시켜주면 사업 하지 뭐, 게임 시켜주면 게임 하지 뭐, 아니면 어쩔 수 없지 뭐.’ 왜 떨어졌는지 이해가 갔다.
다시 게임 디자인으로 방향을 잡고 구직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왓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됐다. 강 파트장은 당시 면접에서 “사람들이 오래 기억할 게임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8개월 방황의 끝. 새로운 팀과 함께 새로운 시작이었다.
넥슨은 천 명이 넘는 조직이다. 스튜디오 하나의 규모가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컸다. 혼자서 하던 일을 여러 명이 나눠서 하는 전문화 된 조직이 강 파트장을 맞았다. <마비노기 영웅전>과 <마비노기>를 만든 사람이 옆을 걸어다녔고, 아트 디렉터가 아닌 아티스트 하나하나가 외주 관리를 하고 있었다. 별천지였다.
<야생의 땅: 듀랑고>는 몇 년째 이어져 온 프로젝트였다. 커리어의 대부분을 혼자 콘셉트 잡는 것부터 시작한 강 파트장은 어떻게, 어디에 끼어 들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왓 스튜디오는 이런 측면에서 잘 준비된 조직이었다. 정기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업무의 내용과 진행 상황이 조직 전체에 공유됐고, 그간 만든 슬라이드와 동영상만 봐도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과 지향점을 알 수 있었다. 왓 스튜디오의 수장인 이은석 디렉터는 디자인의 대들보를 든든하게 세우며 구성원들에게 빠르게 비전을 동기화했다.
강 파트장은 그렇게 왓 스튜디오에서 3년째 <야생의 땅: 듀랑고>를 만들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매몰 비용이라 생각했던 ‘지질학’ 공부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은석 디렉터는 강 파트장에게 듀랑고 세계의 ‘식생’을 다듬어 줄 것을 주문했다.
관련기사: [NDC 15] 완벽한 생태계 구축! 야생의 땅: 듀랑고의 생태계 시뮬레이터 개발기
39세. 늦깎이 게임 디자이너로 시작해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에 이른 강 파트장은 지금의 커리어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이라 말한다. 40대를 넘어가는 디자이너를 보기 어렵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커리어 전환 시점에 섰을 때 지금의 커리어를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 또는 다음 직업에서 지금의 경험이 어떻게 쓰일 지 차분히 고민해 결정하는 것이라고 강 파트장은 말했다. 공부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강 파트장이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를 통해 새로운 커리어를 개척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