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1999년 3월 한국 사회는 ‘O양 비디오 사건’으로 떠들썩했습니다. 톱 탤런트의 은밀한 성생활이 비디오로 유출돼 전 국민의 집단적 관음증을 자극했죠. 2010년 6월 인도네시아 사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록스타 아리엘이 인기 여배우 루나 마야, 그리고 TV 진행자 춧 타리와 찍은 비디오 2편이 유출된 거죠.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이 다수인 국가입니다. 유투브 등을 통해 유포된 이 비디오는 엄청나게 불경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죠. 자카르타 학생들이 휴대전화 불심검사를 받을 정도로였으니까요.
‘그림’이 필요한 방송국들은 비디오의 유포현장을 찍기 위해 와르넷(PC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비디오를 보는 사람들 대신 어떤 총싸움을 하는 게이머들만 가득했습니다. <포인트블랭크>라는 게임이었죠. |
비교적 신생 퍼블리셔였던 크레온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크레온의 김수현 대표와 안재국 기술 이사(CTO)에게 캐물었다. 26만 명의 동접은 이벤트를 하면서 올라왔던 숫자고, 현재는 20만 남짓이라고 한다.
김수현 대표(왼쪽)과 안재국 CTO. 두 번째 PBNC를 진행하느라, 녹초가 돼있던 상태에서도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현재 동접은 20만~22만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26만 명은, 그 전에 14시간 장애가 있어 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틀 간 일부 아이템을 무료로 쓸 수 있는 이벤트를 해 크게 올라갔던 예외적인 수치죠. 이벤트 끝나고 당연히 떨어졌습니다. 전체 계정은 1,300만 개 정도인데, 중복가입을 고려하면, 600만~700만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김 대표와 안 이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는 두 꼭지로 나눴다. 먼저 FPS 불모지에서 <포인트블랭크>의 성공하게 된 비결을 다뤘고, 두 번째 꼭지에서는 성공 가도에 따라붙은 위기와 그 극복과정에 주목했다.
1. <포인트블랭크>의 성공 비결
#1 깃발을 먼저 꼽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알 리스, 잭 트라우트)의 제 1법칙인 ‘시장 선점’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포인트블랭크>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온라인 FPS였으니까. 톡톡히 누리고 있는 선점효과.
“게임을 가져오기 전, 와르넷을 둘러봤습니다. 세 종류의 게임이 3분의 1씩 차지하고 있더군요. <도타>와 <카운터스트라이크>, 그리고 나머지 온라인게임들. FPS 가져오면 최소한 <카운터스트라이크> 시장은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다른 회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법하다. 하지만, 매우 부실한 네트워크 환경과 PC 사양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 했을 듯. FPS는 RPG 등 다른 장르보다 훨씬 더 즉각적인 반응이 무척 중요하니까. 당시 많은 지방 와르넷들은 무선 인터넷을 썼었다. 2009년 6월 상용화 이후, 게임이 잘 되니까, 이 와르넷들이 유선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결국 수요(손님)가 공급(인터넷 인프라)을 이끈 셈입니다.”
#2 로마에 가서 로마의 법을 따르고, 만들다
인터넷 인프라와 함께 PC 사양도 문제였다. 영세한 와르넷들이 512MB급의 메모리를 가진 PC가 많았다. 하나의 게임을 위해 PC를 전부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 기본 사양에 맞추기 위해 물리효과가 물러났다. 아예 없앤 것은 아니고, 기본옵션에서 뺐다.
“한국 같으면 PC방 사장님이나 종업원이 설정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달라요. 게임이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할 리가 없죠. 와르넷을 공략하려면 최대한 그들의 손이 덜 가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점효과와 어울린 현지화한 유료 아이템과 가격 체계도 재미있다. FPS에서 ‘스텟’이 높은 총을 팔다니!
“온라인 FPS에서 밸런스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총’을 판 것은 우리가 처음일 것 같습니다. 선점 게임이 누릴 수 있는 특혜가 아닐까요. 이 시장에 첫 FPS를 론칭했기 때문에 기존 FPS 아이템/가격 체계를 따라갈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죠. 인도네시아 유저들에게는 주변 아이템보다 실질적인 아이템을 판매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거든요. 그게 총이었습니다. 1달 아이템은 너무 비싸서, 1일 아이템을 굉장히 싸게 공급했죠. FPS가 처음이어서 초창기엔 기본 아이템과 큰 차이를 못 느끼다가, 2~3개월 경험하면서 아이템 차이를 인식하게 되고, 그때부터 날개 달린 듯 팔려 나갔습니다. 실질적인 무기 자체를 팔기 시작한 게 핵심이었죠. 이쪽 유저들은 10% 정도 능력치 올려주는 아이템에 대해 거부감이 없어요.”
#3 핵심을 공략하다
처음부터 게임이 북적북적이기는 어렵다. 변변한 온라인게임 마케팅 채널이 드문 인도네시아 같은 시장에서, 더군다나 브랜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회사 입장에서는. <카운터스트라이크> 시장을 뺏기로 작전을 세운 크레온은 전략적으로 해당 게임의 클랜을 노렸다. 클랜 중 게임을 잘 하는 멤버를 직원으로 뽑고, <카운터스트라이크> 클랜 정보를 모두 입수했다. 현지 미디어에 소개되기도 전에 <카운터스트라이크> 주요 클랜 20여개를 대상으로 <포인트블랭크> 발표회도 가졌다. 이들과 함께 게임 활성화를 위한 간담회를 갖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으니, 그들이 넘어올 수 밖에.
“<포인트블랭크>를 론칭하기 전에 클랜을 접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론칭 이후에도 클랜 이벤트를 집중적으로 했죠. 초창기에는 와르넷들이 게임을 깔아주지도 않았죠. 유저가 어느 규모로 있어야 게임을 설치해주는 문화니까요.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1주일에 2~3곳의 와르넷으로 직접 찾아가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2~3달 정도 하니까 클랜과 유저들의 반응이 어느 정도 왔고, 그 뒤로는 와르넷이 자체적으로 대회를 진행할 수 있는 지원책을 제공했죠.”
대회 규모에 따라 포인트와 상금, 스태프 등을 지원해주던 지원정책 덕분에 <카운터스트라이크> 클랜들을 계속 붙잡고, 유저 수를 더욱 늘릴 수 있었다. 이런 작은 대회들은 결국 매년 한 차례씩 열리는 PBNC(포인트블랭크 전국챔피언십)로 이어졌다. PBNC 덕분에 또 동접이 늘어났고. 지난해 12월 열린 PBNC에는 13개 도시에서 1,500개 팀(6명으로 구성) 이상 참여했다.
#4 해외시장 성공 불변의 절대 법칙 – 개발사의 지원
'고장난명'(孤掌難鳴)이란 한자성어가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뜻. 게임의 성공 뒤에는 항상 헌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개발사가 있는 법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나오기 전, <포인트블랭크>는 태국에서도 동접 1만 5,000을 넘을 정도로 좋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개발사에는 ‘미지의 세계’다.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게임을 만들지만, 1만~2만 정도의 동접과 4만~5만 단위의 동접을 처리하는 것은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늘어나는 동접에 맞춰 개발사 제페토도 바빠졌다. 대규모 동접에 맞는 시스템으로 고치고 바꾸는 수밖에.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이 따로 없었다.
“동접이 커지면서 서버가 죽는 일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2009년 7~8월 무렵 막 1만 넘어가면서 계속 탄력이 붙었지만, 그럴수록 더 메신저에 붙어 한국에 계신 분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죠. 주말에도 낮이고 밤이고 계속 전화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제페토 분이 주말에 지방을 내려가시다가,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지방 PC방에 가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준 적도 있죠.”
사실 제페토의 <포인트블랭크>가 크레온이 접촉한 첫 번째 FPS는 아니었다. 먼저 이야기를 나눈 업체는 한국에서 더 인기가 있던 게임이었다. 하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대해준 개발사가 제페토였다고 한다. 실제 PBNC 기간 동안에도 제페토의 개발자 두 명(김현우 대리, 강지원 주임)이 자카르타에 출장 와 계속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었다.
<플러스 Q&A 1> TIG> 회사 이름이 왜 ‘크레온’(Kreon)인가? ‘Creative On’이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C’ 발음이 ‘ㅉ’로 납니다. ‘Creon’으로 하면 이쪽에서는 ‘쩨레온’으로 발음되죠. 그래서 ‘C’ 대신 ‘K’를 사용했습니다. TIG> 누가 왜 설립했나? 4명의 이사진 전원이 예전 삼성 SDS에서 PC통신 사업을 진행했던 유니텔 출신입니다. 2000년 무렵 유니텔에서 팀장과 팀원, 그리고 동료로서 온라인사업, 마케팅, 개발, 광고 등을 담당했던 멤버들인데, 같은 사업부여서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나중에 기회 되면 같이 사업 한번 해보자’ 했는데,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 오면서 이렇게 회사를 같이 하게 됐죠. PC통신 유니텔 사업이 중간에 접히면서 각자 다른 업체나 협회 등에 들어가 있었는데, 인도네시아 쪽 사업의 비전이 보이면서 함께 모였습니다. TIG> 그런데 왜 인도네시아였나? 유니텔 시절, 한인 1세대 솔루션을 납품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인구도 많고 잠재력도 큰데, 온라인 시장은 저조했죠. 그래서 온라인 비즈니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요. 먼저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멤버가 자리를 잡고, 관련 영역에 니즈가 생기면서 CTO 등이 추가로 넘어오게 됐습니다. TIG> 꽤 먼 나라인데, 고민이 없지 않았나? 각자 온라인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보니, 한국에서 온라인 비즈니스로 예전처럼 ‘대박’을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유럽은 문화가 달라 폭발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봤고, 러시아나 중국 등은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시장 선점 차원에서 이미 상당 부분 어려움이 보였죠. 인도네시아는 사전에 조사해보니 경제적 가능성이 컸습니다. 인프라는 미비하지만 발전 가능성이 높고, 돈 많고 구매력 있는 상류층들이 한국 온라인 유저층보다 더 많이 존재했죠. 짧은 시간 내에 충분히 인터넷 강국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죠. 결혼도 안 한 상태였고, 남자라면 한번 사업해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TIG> 생활에 어려움은 없나?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음식도 크게 불편한 게 없고, 일식, 중식, 한식 다 있습니다. 현재 인도네시아 전체에 4만~5만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재외동표 규모죠. 그러다 보니 가끔 여기가 한국인지 인도네시아인지 헛갈릴 때도 있어요. 계속 한국인이 늘어나고 있어, 요즘은 인천과 자카르타 사이의 비행기 편이 항상 만석입니다. 2009년까지만 해도 주말 빼고 좌석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가루다 항공이 취항하면서 증편됐지만, 그래도 2주 전 아니면 예매도 안 될 정도예요. 한국과 비교하면, 친구 만나서 영화 보고, 문화생활 즐기는 것은 어렵기는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