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한국 사회에서 '음지 문화'로 인식되던 비디오게임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 중 63%가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많은 동시대적 장르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 작품에 비디오 게임 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최근 국내에서는 가장 문턱이 높다는 '국립 현대박물관'에서도 <게임 사회>라는 기획전을 열어 <팩맨>, <마인크래프트> 등을 시연하고, <GTA>를 활용하여 만든 비디오 작품을 걸기도 했답니다.
특히, 향유층을 공유하고 있는 K-POP에서는 비디오 게임과 관련된 문화 코드를 적극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오늘은 '비디오 게임'이 주요한 소재가 되는 K-POP 곡들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속 '모데카이저 궁'을 연상시키는 '에스파' ▲<두근 두근 문예부> 속 '모니카'를 닮은 '권은비' ▲<스카이림> 속 마차 버그를 떠올리게 하는 'NCT 드림'의 음향, 가사, 뮤직비디오, 아트 스타일까지 샅샅이 살펴봅니다. 귀향길에 함께 기사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 나누기 딱 좋습니다. / 디스이즈게임 신동하 기자
▲ 에스파의 쌔비지 뮤직비디오 갈무리
그래픽 아닙니다.
▲ '베이퍼 웨이브' 그 잡채인 에스파의 <쌔비지> 뮤직비디오
종종 사람들은 에스파의 스타일을 두고 '사이버 펑크'같다고 말하는데요. 패션의 일부를 제외하면 '사이버 펑크'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씩 뜯어보면 비디오 게임 문화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가장 '사이버 펑크' 같다는 평이 많은 <쌔비지>를 뜯어봅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독특하고 실험적으로 느껴지겠지만, FPS 게임 유저라면 굉장히 익숙한 음향들이 들립니다. 카리나의 목소리 뒤로는 '총 소리'가 난무하고요. 일정한 박자마다 '동전 획득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후렴구에는 상대를 도발하는 '쯧쯧쯧'하고 혀를 차는 소리도 나온답니다.
뮤직비디오 속 세계관은 RPG의 영향을 많이 느껴지는데요. ▲ 로켓 펀처 '카리나'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윈터' ▲ 세상의 모든 언어를 마스터한 '지젤' ▲ 천재 해커 '닝닝'이라는 콘셉트입니다. 사이버 펑크라기 보다는 탱커, 근거리 딜러(물리), 원거리 딜러(마법), 서포터로 구성된 RPG 속 레이드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제 가사를 다시 봅시다.
두고 봐 난 좀 쌔비지.
너의 더티한 플레이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나를 무너뜨리고 싶은 네 환각들이 점점 너를 구축할 이유가 돼.
널 부셔 깨 줄게. 널 짓밟아 줄게.
내 빛의 검으로 베어버려.
데미지를 입은 네게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펀치
너의 재생력을 막아. 흐트러놔 빼놔.
잊지말아 여긴 바로 광야 너의 시공간은 내 뜻대로 만들고 깨부숴.
곡의 프로듀싱은 이수만 전 SM 총괄 프로듀서가 참여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는 아무래도 <리그오브레전드>에서 '가렌'이나 '모데카이저'를 즐겨 하는 것 같죠?
또한, 다른 노래들과 비교해서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에스파의 곡 중에는 <테트리스>의 주제가를 베이퍼 웨이브 스타일로 그대로 따온 <홀드 온 타이트>도 있답니다.
▲ 에스파가 말아주는 <테트리스>의 주제곡.
썸네일은 <테트리스> 세계에서 도트화된 <쌔비지> 뮤직 비디오 속 에스파입니다.
팬 메이드가 아니고, 공식입니다.
아이즈원 출신의 권은비의 <글리치>는 미연시 속 얀데레 캐릭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 <글리치>는 곡의 제목이자, 장르이자, 주제인데요. 모두 비디오 게임할 때 자주 쓰는 단어인 '글리치 현상'로부터 착안된 것입니다. '글리치 현상'은 게임 속 캐릭터가 벽에 끼이거나, 음향이 깨져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등의 상황과 버그를 일컫는 그 말이 맞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에스파의 곡이나 영상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아이즈원 출신 권은비의 <글리치> 뮤직비디오입니다.
놀랍게도 화면 오류나 잘못 캡쳐한 것이 아닌 주요 장면 중 하나입니다.
놀랍게도 화면 오류나 잘못 캡쳐한 것이 아닌 주요 장면 중 하나입니다.
겁 먹지 마세요. '미소녀와 글리치'는 우리가 인싸들보다 먼저 맛 본 코드입니다.
왼쪽의 게임은 <두근두근 문예부>, 오른 쪽의 게임은 <니디 걸 오버 도즈>.
다음으로는 곡의 주제를 살펴볼까요? 다음은 <글리치>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가파른 벽에 또 부딪히고 난 뒤
떨림이 신경 쓰여
Wait a minute
Woo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듯한
움직임 깜짝 놀래켜
imma wake you up in the morning or middle of the night
여기저기 내 맘대로 나타났다 사라져
제목인 <글리치>의 의미를 알고 나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이미지인지 상상이 되시죠?
권은비는 여기에 '보깅' 장르의 안무를 채택하여 '글리치'의 이미지를 한층 더합니다. 보깅이란 댄스 장르 중 하나로 '보그' 잡지 속 화보를 찍는 모델이 된 것처럼 박자에 맞춰 포즈를 잡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글리치>의 안무도 물 흐르듯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기게 되는데 이 점은 '글리치 현상'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 권은비 <글리치> 뮤직비디오 속 보깅 안무
맥락을 알고 <글리치>를 다시 들으니, 미연시 속 '얀데레'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리고 동시에 지난 몇 년 동안 인싸들이 왜 '아니메 티셔츠'에 환장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참고로 왼쪽은 게임 <당신과 그녀와 그녀의 사랑>, 오른쪽은 게임 <사이코 노 스토커>입니다.
여자 아이돌들만 이야기하면 아쉬우니, 남자 아이돌의 경우도 봅시다. 앞서 언급한 '글리치' 요소를 모두 볼 수 있는 뮤직비디오가 있습니다. 바로 NCT 드림의 <버퍼링 (글리치 모드)>입니다. 이 역시 곡명에서부터 '글리치'가 있네요. 이쪽은 보다 '레트로'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비디오 게임'에 대한 샤라웃이 본격적입니다. 뮤직 비디오의 중간 중간에는 레트로 게임기에 대한 오마주가 자주 등장하고, 주된 배경은 비디오 게임 매대처럼 꾸민 세트장이랍니다.
▲ 매대의 패키지들은 실제 게임이 아닌 nct드림의 앨범 커버를 활용하여 직접 제작한 소품입니다
▲ NCT 드림의 <버퍼링> 뮤직비디오 갈무리
가사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버퍼링>의 가사는 '첫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10대 소년'이 스스로를 '오류가 생긴 게임 속 NPC'에 빗대고 있는데요. 실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일부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네 앞에선 글리치 모드
온몸이 고장 났어 'Reload'
난 어질 어질 어질 두통
또 돌고 돌아
I'm in Glitch Mode
전에 없던 Situation
너 아님 너만 Repetition
Trouble Trouble like a miscode
앞서 소개한 <글리치>에는 화면이 깨지고 음향에 오류가 나는 등 그래픽 버그에 주목했다면, NCT 드림은 '물리엔진 버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음악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멤버들이 자체적으로 '느리게 감기'와 '빨리 감기'를 반복하는 안무가 등장하고요. 3D 게임에서 카메라를 계속해서 전환하는 듯한 독특한 연출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스카이림>에서 가장 유명한 버그인 '마차 버그'를 연상시킵니다. 3D 멀미가 있으신 분은 영상 시청 시 주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