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살려주세요. 아이가 밤새도록 게임만하고 학교를 안 가려고 해요."
몇 해 전 한 학부모가 방승호 교장(현 아현산업정보고등학교)을 찾아왔다. 아이가 졸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는 아이가 게임에 빠져 있는 것을 염려했다. 잦은 지각과 결석의 원인이 아이가 밤새도록 하고 있는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 교장이 직접 만난 아이의 문제는 게임이 아니었다. 이미 학업에 의욕을 잃은 상실감 속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 게임이었다고 했다. 게임이 아이를 망친 게 아니라, 아이가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게임뿐이었다. 이것이 게임과 상담을 접목한 '게임 과몰입 치유 및 재능 개발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지난 9일 아현산업정보고등학교에서는 공립학교 최초로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서 게임 과몰입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9주간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상담을 통해 게임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을 치유하고, 아이들이 게임을 건강한 취미생활로 배우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내용만 보면 기존의 상담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과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곳은 '게임'에 대한 시각부터 다르다. 게임은 아이들을 망치는 '나쁜 것'이 아닌, 아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키'라는 것.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는 방승호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 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디스이즈게임 송예원 기자
■ “게임을 문제로 돌리는 건 어른들의 무책임함이다”
'금연송 선생님', '학교에 PC방을 만든 선생님'
모두 방승호 교장 이름 앞에 붙는 말들이다. 교사이면서 청소년 상담가로도 활동중인 방승호 교장은 남다른 교육법으로 이름을 알려온 인물이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집단 상담을 진행한다든지,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에게는 벌점 대신 직접 만든 노래를 불러줬다. 덕분에 교내 흡연율이 1/10로 줄어드는 것은 물론, 그가 만든 금연송 <노 타바코>는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큰 화제가 됐다.
가수 김그림과 함께 했던 히트곡(?) <노타바코>
그의 이름은 게임쪽에서도 유명했다. 지난 2008년 아현산업정고등학교 교감 재직 시절 게임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e스포츠학과를 만들었다. 지금은 게임제작과로 이름도 바뀌고 체계적인 개발 교육이 갖춰져 있지만, 처음 시작 당시에는 교내에 PC방을 만들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게임을 하는 것에 의의를 뒀다. 공부대신 하루 종일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삼성전자 손석희 선수같이 준프로, 프로 선수도 배출했다.
그러나 이는 30명의 학과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타 학과생이나 다른 학교에서 게임으로 갈등을 겪는 학생들까지 포용할 수가 없었다.
"아현산업정보고등학교에 e스포츠 학과를 만들어 놓고 난 이후 얼마 안가 인문계 고등학교로 교장 발령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곳에도 게임으로 학교 생활이 뒤쳐지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런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방 교장은 게임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어른들이 게임이 나쁜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게임이 아이를 망쳤다고요. 세상에 이런 무책임한 생각이 어디 있을까요?"
수많은 아이들과 직접 만나 상담해본 결과 게임은 도피처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학업문제, 가정불화, 학교폭력 등 다양한 문제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게임에 시간을 쏟아 붓는 것으로 심적 불안감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특히 방 교장은 학업문제를 아이들이 게임으로 도망가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교육환경이죠. 아이들 개개인이 가진 관심사와 재능이 다른데 우리 사회는 공부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니까요. 착하고 나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이 모든 기준이 성적과 입시에요. 여기서 조금만 뒤쳐지는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요. 그렇게 점점 더 게임 뒤로 숨게 되죠."
게임에 대한 어른들의 부정적인 시선도 지적했다. 사회는 아이들이 좋아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게임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몰아 부치며 하지 말라고 억압하고 있다.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올바른 게임문화 형성을 막고 있다는 게 방 교장의 주장이다. 결국 게임은 숨어서 해야 하는 것, 몰래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게임에 대한 태도 변화”
당장 국내 교육환경, 가정불화 등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방 교장은 생각을 틀었다. 그는 게임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올바르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취미활동을 예를 들면, 야구나 축구와 같은 동적인 스포츠부터 바둑이나 장기와 같은 정적인 활동까지 이들은 시작단계에서 '제대로 하는 법'을 배워요. 기본 규칙은 물론, 승리를 위한 전략이나 전술을 위한 교육 체계가 갖춰져 있죠. 그런데 게임, 특히 온라인게임의 경우 이런 체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이 없더라고요."
"우리가 흔히 게임 과몰입이라고 표현하는데, 진짜 몰입해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다수의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때우기로 게임을 하고 있어요. 게임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생긴다면, 이런 아이들의 게임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질 거라고 믿었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은 상담사인 저의 몫으로 남겠죠."
방 교장이 찾는 것은 단순히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인터넷 예의 범절'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e스포츠로 활성화 된 <리그 오브 레전드> 정도의 게임이라면, 스포츠나 바둑과 같인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게 방 교장의 생각이다. 이러한 기반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아이들이 게임을 대하는 태도부터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때 마침 도움을 주겠다는 e스포츠 전문가를 만났다. 프로팀 고문과 컨설턴트를 맡고 있는 그에게 게임 교육이 가능하다는 확답을 받은 방 교장은 올 1월 마포구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게임 과몰입 치유 및 재능 개발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 “치료법은 제대로 된 게임 공부”
'게임 과몰입 치유 및 재능 개발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아이들 스스로 게임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게임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내제돼 있는 문제요소나 갈등 요소를 해소함으로써 게임으로의 도피를 막겠다는 것이다.
수업은 처음 구상대로 게임 교육에 가장 큰 중점을 뒀다. 3시간의 프로그램 시간 중 절반 이상을 게임 교육하는 데 쓰고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리그 오브 레전드> 승리 전략과 전술의 기초를 학습한다. 여기에는 팀워크도 포함된다. 각 포지션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이해부터 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도 교육 콘텐츠 중 하나다. 방 교장은 “꼭 집단상담이 아닌 게임을 통해서도 사회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교육은 앞서 손잡았던 e스포츠 전문가가 맡지만, 회차에 따라 프로게이머나 프로팀 코치를 섭외에 특강도 진행할 예정이다. 비록 모두가 e스포츠 선수가 꿈은 아니더라도 실제 선수들이 게임을 할 때 지켜야 하는 예의와 마음가짐을 알게 될 때 올바른 게임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게 방 교장의 설명이다.
지난 16일 프로그램 진행 현장. 이 날 수업 내용은 '스노우볼 굴리기란'이었다.
더불어 게임에 대한 재능이 있다면 프로팀과 연결해 주는 등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는 길을 이어 줄 계획이다. 방 교장이 e스포츠 관계자와 손을 잡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게임을 어른들의 허락하에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될 거에요. 게임이 나쁜 게 아니라는 인식은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필요하니까요. 또 e스포츠 관계자에게 게임을 배우는 것 역시 좋은 경험으로 남겠죠. 박지성이 축구를 가르쳐주고, 박진영이 춤을 가르쳐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이와 함께 게임으로 배우는 영어나 글쓰기와 같은 교육도 병행된다. 방 교장에 따르면 국영수 성적이 뒤쳐지는 아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울 만큼 문장이해 능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스스로 정확한 의사표현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별도 학습의 이유다.
물론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주변에서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마포구 내 학교들에게 공문을 보냈을 때만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특히 부모님의 우려가 가장 컸다. 방 교장은 직접 각 학교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프로그램의 취재에 대해 설명했고, 그제서야 지원자들이 몰리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님들의 문의도 직접 응대를 했다.
"게임을 많이 해서 참가했는데, 오히려 학교에서 게임을 가르친다고 하니 부모님들이 걱정하시더라고요. 시작 전부터 전화를 얼마나 받았는지 몰라요. 왜 아이들에게 게임을 가르쳐야 하는지, 게임을 어떻게 취미로 즐길 수 있을 지 설명해 드렸죠. 서울대, 카이스트, 이대 등이 모인 ‘e스포츠 동이리 연합회’(ECCA)가 좋은 사례가 됐어요."
■ “게임하며 어른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다”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게임 과몰입 치유 및 재능 개발 프로그램'은 마포구 내 학생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선발전과 면접을 통해 20명이 선발돼 진행 중이다. 선정기준은 끝까지 참여할 ‘의지’. 1기생은 중학생으로 구성됐으며, 여름방학에 시작되는 2기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연내 마포구에서만 3기까지 확정됐지만, 점차 대상 지역을 늘려갈 계획이다. 이미 서대문구와는 협의 중이며, 서울시 전역으로의 확대가 1차적인 목표다. 궁극적으로는 더욱 많은 선생님과 전문가들이 만나 보다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구축해 모든 학교에서 이와 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다만 방 교장은 이 프로그램으로 게임 과몰입이 사라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이 게임을 하며 어른들에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고, 게임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다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 '게임 과몰입 치유 및 재능 개발 프로그램'의 취지라고 강조했다.
“모든 사회문제가 그렇듯 100% 효과를 볼 수 있는 해결법이란 없어요. 이 프로그램이 바라는 것은 게임을 그만두고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작은 변화잖아요.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1%의 빛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