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음악 작곡가 박진배. 게임 유저들에게는 ‘ESTi’라는 닉네임이 익숙한 그는 지난 2015년, 유한회사 에스티메이트(ESTIMATE, LLC)를 설립해 자신의 다음 행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박 대표의 개인회사 설립은 게임음악 작곡가로서는 처음이다. 그는 회사 설립에 대해 ‘20여년 간 경험을 바탕으로 게임, 그 다음에 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시대를 맞이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와 인터뷰하는 내내, 그는 열린 자세와 시대의 흐름을 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원 히트 원더’와 같이 한 곡으로 대표되는 작곡가가 아닌, 그 시대와 트렌드에 부합하는 앨범을 만드는 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이라는 것. 그것이 하나의 계보를 잇는다면 잇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젊은 크리에이터와의 만남도 언제나 환영이라고 밝혔다.
박 대표는 지난 20여년 간 애니메이션, 게임, 유아용 콘텐츠 등 국내, 외 다양한 업체와 작업해왔다. 에스티메이트는 자체 성우나 보컬을 비롯해 패키징 등 향후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과정을 담은 총괄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기회가 된다면 분야 역시 점점 넓혀갈 계획이다.
그는 시프트업 김형태 대표와 오랜 시간 함께 인연을 맺어왔다. 재미있게도, 박진배 대표는 학생 시절 미술 쪽을, 김형태 대표는 음악을 했으나 서로의 영향(?) 등 여러 가지 계기로 지금의 직업들을 갖게 됐다.
20년이 지나고, 둘은 지금의 모습으로 만나 처음으로 함께 일을 하고 있다. 바로 곧 출시될 모바일 게임 <데스티니 차일드>. 디스이즈게임은 에스티메이트 박진배 대표를 만나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 디스이즈게임 정우철, 정혁진 기자
# 폭 넓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시대의 흐름을 담은 음악을 만든다
TIG> 과거에는 게임음악 하면 사운드템프(SoundTeMP)가 잘 알려져 있지. 그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나?
박진배: 그렇다. 당시 막냇동생으로 시작했던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 오래 한 것 같다. 지금도 그 때 함께 일했던 분들과 연락하고 있다. 자주 뵙지는 못해도,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서로 안부를 전하고 있다.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음악 장비 관련 얘기도 나누고 그런다.
TIG> 어떤가, 그 때를 생각하면?
박진배: 참 재미있었던 때였다. 많은 형님들 속에서 작업하고 배웠는데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하면서 어린 친구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내가 얻었던 많은 것들을 많은 후배들에게 돌려준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하고 있다.
그들과 게임 음악 작업을 하게 되면, OST든 리듬 게임 타이틀이든 후배들이 잘 부각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고 싶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과거 게임 음악 작곡가들이 음악을 통해 팬들에게 많이 조명 받았던 것에 비해 지금은 그렇게 되기 조금 힘든 상황이다. 스탭롤 등을 통해 소개될 수는 있지만.
TIG> 누가 작곡했는지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상황이 좀 답답했을 것 같다. 과거든, 지금이든.
박진배: 20대 때는 왠지 모를 소외감이 느껴져서 나를 알리려고 온갖 어필을 했는데, 지금은 조금 초연해진 느낌이다. 어필 보다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폭 넓은 음악을 들려주다 보면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찾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도 그렇고. 나의 포트폴리오들이 앨범처럼 점점 쌓여가는 것이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 정답이더라.
TIG> 지금까지 작업한 음악 수는 어느 정도 되나?
박진배: 대략 1,000곡은 넘지 싶다. 프로젝트 개수는 80개 정도? 기억에 남는 주요 이슈들만 세어보면 그렇다. 세고 보니 적지는 않은 숫자 같다. 하지만 족적을 남기기 위한 행동들 이라기 보다는 세상이 변화할 때마다 당시 상황에 잘 적응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런 결과물들이 쌓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이랄까?
TIG> 남들이 기억하는 나만의 색깔 같은 것을 크게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들린다.
박진배: 그런 편이지. 카카오 플랫폼 초창기 캐주얼 모바일 게임 <명랑스포츠> <무한상사> 사운드를 연출한 적이 있는데 주위에서 “네가 왜 그런 것을 해?”라는 반응이더라. 그런데 나는 그런 것을 해보는 것이 좋더라. 해보지 못했던 것이니까.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즐겁다.
유아용 콘텐츠 <핑크퐁>도 참여한 적이 있다. 디제이맥스 참여 시절부터 연이 있었던 신봉건 대표도, 콘솔이나 대작 타이틀 같은 것만 고집할 줄 알았던 내가 그런 것을 해서 놀랍다더라. 그래도, 그러한 시도들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TIG> 그렇다면, 뽀로로 음악 작업도 욕심이 났겠다. 워낙 콘텐츠가 유명했으니까.
박진배: 명곡을 만든 다음에 추앙 받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것 보다는 그 때마다 ‘내가 살아있구나’는 느낌을 스스로 받으면서 한 시기에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시 흐름을 담은 음악을 남겨보자는 생각이 강하다. 뽀로로 보다도 애니팡 음악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당시 추석 명절 시기에 전국에서 스마트폰으로 친척들을 포함한 온가족이 함께 게임에서 음악을 들었던 것이 꽤 기억에 남는 게임이었으니까.
TIG> 시대의 흐름을 담은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조금 더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박진배: 모든 게임 음악 작곡가의 고민이 아닐까 한다. 만들고 그 게임이 종료하면 사라지고 남는 것이 없다. 꽤 안타깝다. 아트웍의 경우 화집과 같이 유형적인 콘텐츠로 나타낼 수 있지만 음악은 그러기 힘들다. OST 같은 것이 가끔 나오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유저에 대한 팬 서비스에 그치고 있다. 그래서 음악을 남기려면 일단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곡이 좋고 특이하면 계속 듣게 되는 것이 음악이다. 개성을 최대한 부여하면서 그 때 당시의 시대 상황, 트렌드가 반영되는 경우 많은 분들께서 기억을 해주시는 것 같다. 추상적인 설명일 수 있지만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다. 나만이 고집하는 음악도 있겠지만 그 것보다 그 시대에 부합하는 앨범, 즉, 순간포착 같은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 작업한 <데스티니 차일드>도 그런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TIG> 작업한 1,000곡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박진배: 빠삐놈…은 아니고. (웃음) 그러고 보니 빠삐놈 리믹스는 당시 술에 취한 상태였긴 했지만 나름 진지하게 만들었던 노래다.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만 좋아하고 대중가요를 포함한 한국의 대중문화를 가까이 하지 않았던 생각을 바꿨기 때문이다.
믹스는 게임음악을 작업하면서 배웠지만, 그런 기술들이 게임 아닌 대중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많은 분들이 계보를 잇고 있다고 생각해 주신 곡들이 개인적으로도 애착이 간다. 애증의 관계인 <디제이맥스> 노래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런 곡들이 파편화 되서 다양한 음악으로 생겨나고 있다. ‘오블리비언’의 경우에도 많은 분들께서 좋아해 주셨던 곡인데, 지금 세가와 작업하고 있는 노래 중에는 그런 느낌을 닮은 곡이 많다. ‘레이디 메이드 스타’의 모양새는 <아이돌마스터>쪽과 작업했던 노래들로 이어지고 있고.
TIG> 많은 인기를 얻었던 ‘오블리비언’, ‘신’, ‘레이디 메이드 스타’도 위에서 말한 기준으로 만든 음악인가?
박진배: 그렇다. <디제이맥스>는 <이지투디제이>에서 출발했다. 멋있으면서 장르도 다양했고, 팝 음악의 정서를 게임 음악으로 풀어본 것 같다.
하지만 ‘오블리비언’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애니메이션같은 분위기였다. 과거 애니메이션 좋아한 영향도 있지만, 당시 <디제이맥스>는 오락실 같은 아케이드가 아닌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PC에서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면서 관련 감성들이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던 환경에서 선보였다. 그래서 그런 감성의 음악을 좋아하는 유저들이 예전보다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만들게 됐다.
‘신(SIN)’도 비슷한 케이스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2병? 그런 감성에서 출발한 노래다. ‘레이디 메이드 스타’는 아이돌 애니메이션, 변신소녀 등과 같은 감성이 생각나서 만들게 됐다. 노래를 선보인 당시 일본에서 아이돌과 관련된 게임을 만들고 싶어했고 <아이돌마스터>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공유하면서 더 잘 알려질 수 있게 됐다. 반다이남코게임즈에서도 내 이력을 보던 중 ‘레이디 메이드 스타’를 만든 것을 보고 더욱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TIG> 그렇다면, 가장 만들기 힘들었던 곡은?
박진배: 딱히 무엇이라고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함께 작업하는 이들이 음악적으로 이루고 싶은 바를 내 역량으로 발휘해주지 못할 때가 아닌가 싶다. 최근 작업한 <데스티니 차일드>의 경우, 김형태 대표가 엔씨소프트를 퇴사하고 몸이 안좋을 때 쉬면서 일본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페르소나> 시리즈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콘서트도 많이 가면서 위안을 받았다더라.
게임 개발 과정에서 음악 작업을 함께 하면서 김 대표가 그러한 스타일의 음악이 자기가 만드는 게임에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페르소나> 시리즈에 대한 관심도가 약했다. 20년지기 지인이고 해서 바람을 꼭 이루어 주고 싶었지만 간극을 좁히기란 쉽지 않더라. 그래도 뜻을 잘 반영하고 싶어서 우여곡절 끝에 만들 수 있었다.
TIG> 가장 빠르게 만든 곡 시간, 힘들게 만든 곡 시간은?
박진배: 빠삐놈은 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웃음). 보통 보면 확실한 판단이 선 것은 하루 안에 나오기도 하지만, 자신감이 낮거나, 주위에서 비슷한 레퍼런스가 없을 때는 고민을 오래하는 편이다. 9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 ‘레이디 메이드 스타’가 그런 경우다. 그 때는 <아이돌마스터> 같은 것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라, 그런 음악을 한국에서 해도 되는 것인지 자신감이 없기도 했고.
TIG> 힘들게 나온 노래는 보통 만족하는 편인가?
박진배: 그렇긴 한데, 너무 힘들면 기억이 안나기도 하더라. ‘신’이나 ‘오블리비언’도 그렇고. 그래서 인터뷰 같은 것에서 대표곡 같이 소개되면 그런 노래들은 일부러 싫어한다 어필하기도 하고 그런다. (웃음)
TIG> 음악 전공을 하지 않았음에도 과거 많은 음악 작업을 했다. 이쪽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나?
박진배: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릴 때 음악 만드는 것을 조금씩 익혔던 정도다. 중학교 때부터 ‘에반게리온’ 등 애니메이션이 유행할 때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을 카피하면서 직접 제작해 보곤 했다. 그런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구체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때부터다. IMF가 터지던 무렵, 97년인 고2쯤이다. 제일 처음 작곡한 자작곡들도 그 때의 것들이다. 당시 지인이 내가 컴퓨터 만으로 음악을 빠르게 만드는 것을 알고 작업하는데 도와달라고 부탁 받으면서 시작했다. 본격적인 회사 생활은 <이지투디제이>를 개발했던 어뮤즈월드부터.
TIG> 시프트업 김형태 대표도 마찬가지다.
박진배: 그렇다. 어떻게 보면 비슷하면서 다른 길을 걸었다. 김 대표는 학생 시절에 음악을 하다가 음악을 그만두고 만화의 길을 선택하며 보유하던 장비를 나에게 줬고, 나는 고등학교 때 미대를 가고 싶어서 지원했다가 김 대표가 너무 잘 그려서 주눅이 들었다가 취미로 관심있던 음악 쪽에 관심을 갖게 됐고 김 대표의 장비를 받으면서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
서로 스위칭된 것이라고나 할까?(웃음) 20년이 지나고 지금의 모습으로 만나게 됐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함께 일을 한 것은 <데스티니 차일드>가 처음이다.
# 보다 넓은 영역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에스티메이트'를 설립하다
TIG> 수 많은 음악을 작곡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금처럼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지 않다 보니 여기저기 흩어져서 관리하기 힘든 느낌이다. 안타깝게 느껴질 것 같다.
박진배: 넥슨은 자사에서 작업한 음악을 잘 관리하더라. 최근 넥슨은 자사의 사운드 팀을 중심으로 그 동안의 넥슨 게임 음악들을 아카이빙 하고 있고, 나도 거기에 <테일즈위버> 나 <마비노기 듀얼> OST 등으로 동참했다. 과거에 출시됐던 음악들이 마치 파편화된 느낌이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지금부터는 잘 관리 해야지. 작년 10월 내 회사를 창업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과거 음원을 직접 관리하고 싶지 않냐는 의견도 많다. 물론 없지는 않다. 하지만 게임 콘텐츠라는 모두의 협업하여 만든 작품 속에서 음악만이 내 것이라는 입장으로 시작하면 회사 대 회사로 충돌이 일어난다. 그러나 모두와 함께한 것을 계속해서 살리고, 나아가서 주위에 더 알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다르다.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라그나로크 모바일>이다. 중국 쪽에서 연락 와서 작업하고 있다. 당시 게임 음원 대부분을 나를 포함한 사운드템프가 작업했다. 중국에서 이를 그대로 쓸 수도 있었겠지만, 과거 작업했던 음원을 재해석해 또 하나의 이슈를 만드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판단 했다더라. ‘이들이 아직 살아있으며 여러분과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이 와서 흔쾌히 작업에 참여했다.
엔트리브소프트의 경우도 <팡야>가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당시 작업했던 음원의 저작권은 일부 내가 그대로 가지고 있다. 물론 다른 게임에 쓸 것은 아니지만 <팡야>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됐을 때 다시 끌어올릴 수 있으면 여러모로 의미 있을 것 같다. 훗날 팡야를 만들 때 함께 했던 아트 디렉터인 박정훈(SeeD) 님을 기리는 날에 오케스트라 연주회 같은걸 해보고 싶다.
TIG> 보통 음악 의뢰는 어떤 형식으로 들어오나?
박진배: 의뢰가 오는 작업들을 보면 ‘이런 곡과 비슷한 곡을 만들어주세요’가 아니라 ‘그냥 곡을 써주세요’라며 일임을 하는 것들이 많다. 곡에서 콘셉트에 대한 영감을 받으려고도 한다. 많은 것을 맡겨 주시고 응원해 주시니 감사하게 생각한다.
<팡야>를 작업할 때도 일단 곡 부터 주면 그것에 맞춰서 프로모션 영상을 만들겠다고 한 적도 있다. <데레스테>도 그렇고. 다음 업데이트 콘셉트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하더라. 그러다 보니 남의 게임, 내 게임에 대한 구분이 없더라. 마치 콘셉트 아티스트가 된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혜택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수록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완성도를 위해 관련 자료도 많이 받아야지. 힌트, 아이디어도. 자유도가 많은 편이다. 물론, 마감과 퀄리티에 대한 프레셔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계기들이 주어지다 보니, 굳이 게임이라는 플랫폼에만 한정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게임업계 이전에 과거 여러 동호회 활동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접하면서 지금의 길을 걷게 됐다. 게임도 그렇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으로 창조된 세계관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세계관에 맞는 새로운 것을 들려주는 일이 좋다.
TIG> 지난 해 ‘유한회사 에스티메이트 (ESTIMATE, LLC)’를 설립했다. 1인 법인인가?
박진배: 처음에는 혼자 작업하다가 지금은 2명이 충원돼 3명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을 대신 그려주는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과, 작곡 편곡 및 기타 작업을 하는 친구 한 명이 합류했다. 앞으로 더 커지겠지.
TIG> 여러 작업을 위해서는 자체 성우나 회사 소속 보컬도 보유해야겠다.
박진배: 그렇다. 창업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다. <아이돌마스터> 작업에 참여하면서 반다이남코게임즈에서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로 IP가 변화되는 과정에서 많이 배웠다. 결국 많은 일을 맡다 보면 OST 등 다양한 콘텐츠도 나올 수 있을텐데, 그럴 경우에는 관련 보컬 등을 내부에서 보유할 필요가 생긴다.
많은 엔터테인먼트 회사 처럼 소속 가수나 성우 같은 개념으로, 회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하고 있다. <데스티니 차일드>도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밖에 패키징 등 관련 사업도 모두 해보고 있다. 과거 <데스티니 차일드> 발표회를 진행했을 때 그것을 위해 화보집도 찍어보고 배송도 해봤다. 어쨌든 나중에 전부 다 할 것이고 만들 것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바닥부터 체험하는 과정으로 설립 후 지금까지 1년을 보냈다.
음악이 좋으면 소장하고 싶어져 무언가 상품을 찾게 되고 나아가 라이브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듯, 그런 일련의 엔터테인먼트 과정을 모두 익힌 총괄 제작을 하고 싶었다.
TIG> 게임 외에 영화 드라마 등 장르를 넓힌다고 봐도 될까?
박진배: 그렇다. 그런데 작업했던 프로젝트들이 비현실적인 세계관에 비중이 많다 보니 영화 이런 것을 하게 된다면 애니메이션 영화 쪽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TIG> 일본 업체들과의 작업을 다수 하기도 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박진배: 처음부터 직접적인 요청이 오거나 간 것은 아니다. 평소 일본에 막무가내로 자주 놀러갔다. 주로 여름, 겨울 코믹 마켓 (일본 최대 동인 행사)에 가기 위해서. 각종 흥미 있는 것이 많았지만, 그 중 관심있는 게임 음악들의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어레인지 시디를 내놓는 것들이 가끔 있어서 그것들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계속 가다 보니 <이스> 시리즈 음악을 만든 유조 코시로 라던지, 반다이남코게임즈의 호소에 신지 등 존경하는 게임음악가들이 원작자 스스로가 나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들과도 알게 됐고. 그들 입장에서도 내가 좀 특이해 보였을 것이다. 코미케 행사가 끝나고 우연히 회식에 같이 참여하게 됐고 친해지면서 SNS 등으로도 연락하게 됐다.
이후 그런 인연들이 계속되다가 반다이남코게임즈의 사운드 치프이자 <릿지 레이서> 시리즈를 작업했던 오쿠보 히로시가 자신들의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으니 <릿지 레이서7> 작업을 같이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갑작스러웠지만 너무 좋은 기회여서 생소했던 5.1 서라운드 믹스 등등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난다. 안타깝게 타이틀 성과는 좋지 못했지만, 나름 의미 있던 타이틀이다.
그렇게 신뢰를 쌓다 보니 점차 함께 작업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철권 태그 토너먼트>도 함께 했는데, 당시 한국인 캐릭터가 다수 등장할 때였다. 당시 반다이남코게임즈에서 한국의 국악을 직접 현지에서 실제 녹음해서 들어가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나는 오히려 한국인인데 한국에서 정작 해본 적은 없지만 좋은 기회였기에 작업하게 되었다.
이후 두어 번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신뢰도 쌓이게 됐고 내가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아이돌마스터> 프로젝트까지 함께하게 됐다. IP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해서 덕분에 일본에서도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셨다. 반다이남코게임즈에서도 꾸준히 일본 내 광고 등에 적극적으로 소개해주시기도 하고. 덕분에 그것을 보게 된 세가 등 여러 일본 업체에서도 문의가 왔다.
TIG> 미소녀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음악을 좋아한 것이 또 하나의 호재가 됐다.
박진배: 그런 셈이다. <디제이맥스> 시리즈와 엔씨소프트의 <아이온>을 작업하던 시기에는 <아이돌마스터>를 좋아했다. 대작 MMORPG나 콘솔 타이틀이 범람하던 시절에 주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누가 좋아하냐는 말 속에서도. 그런데 10년 정도 지나니 IP가 어마어마하게 인지도가 높아지더라.
무언가 촉이 좋기는 했나보다. 김형태 대표도 그러더라. 그래서 이번 <데스티니 차일드> 도 10월에 출시하면 오래 갈 것 같은 촉이 왔으니 그 때 내면 좋을 것 같다고 보챘다. (웃음) 게임 제목을 지을 때도 그랬고. 물론 우연이겠지만, 좋은 느낌이 오는 것은 지금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빛을 발하더라.
TIG> 주 무대가 일본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겠다.
박진배: 그렇다. 일본 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그런 것을 보고 자라며 배운 것이 있다보니 그 것들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양방언, 칸노 요코, 히라타 시호코나 일본 음악 쪽의 유명 인사들도 만나게 되고. 그런 기회들이 주어져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TIG> 예전에 하츠네 미쿠 IP 관련해 협업도 한 바 있다.
박진배: 공식적으로 하츠네 미쿠를 상업적으로 게임 음악에 처음 써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2007년쯤 당시 니코동에서 하츠네 미쿠가 서서히 유행하고 있을 때 정식 콜러볼레이션은 아니지만 미쿠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마니아 층에 반응이 있겠다 싶어서 <팡야: 시즌4>에 살짝 반영해봤는데 반응이 꽤 괜찮더라. 그걸 보고 하츠네 미쿠 쪽에서 같이 콜러볼레이션을 하자고 제안이 와서 프로모션이 성사된 적이 있다.
처음 우리나라에서 공개됐을 때 대부분 기계음 같다, 콘텐츠 수준이 장난 같다는 반응이 많았다. 지금처럼 거대 IP도 아니었고. 나도 처음에는 생각이 비슷했지만 이왕 독특한 거 한 번 활용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진행해봤는데 반응이 괜찮더라. 그리고 결국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점차 모여 지금의 거대한 IP의 하츠네 미쿠를 만들어낸 것 같다.
TIG> 이 사람과 작업하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박진배: 어떤 인물보다는 일본 사회에서 마니아 층이 아닌 메이저 IP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일본의 대중 감성도 내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궁금하다. 또 그들과 어떻게 섞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많이 관심을 갖고 있다.
<데레스테>로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걸즈>도 공중파에 실리면서 내 음악이 노출됐는데, 현지 반응은 의외로 ‘가장 오타쿠 스럽지 않은 노래’ 같다더라. J-Pop 같은 느낌말이다.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J-Pop도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데스티니 차일드>도 세계관이 현대적이면서 팝 하다 보니 일본에 나갈 때는 또 다른 반응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과거 <앨리샤>와 관련해 아이유와도 주제가를 함께 작업한 적이 있는데, 내가 당시 너무 부족해서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게임에 관련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 때 아이유가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직전이었고, 내가 대중가요도 잘 몰라서 거리를 두기도 했고. 가수에 대한 파악이 부족했다. 요새 아이유가 부른 <놀러와 마이홈>의 노래를 들어보니, 무엇을 해야할 지 이제야 감이 오더라.
# 항상 열린 자세로, 시대를 담은 좋은 음악을 만들어 갈 것
TIG> 아직도 많은 이들이 게임 음악을 배우러 오나?
박진배: 문의는 여전히 많이 오고 있다. 알려주려고도 하고 있고. 하지만 스승으로 섬겨지는 ‘사사’ 같은 개념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음악을 학업으로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학원이라던지, 출강이나 레슨이라던지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오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조언을 해주지만 그 중에서도 일을 거르지 말고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만들고 또 많이 어필하라고 공통적으로 조언한다. 보통 20대 초반 후배들이 많이 찾아온다. 내가 처음 업계에 왔을 시기다. 그들에게는 아낌 없이 조언하는 편이다. 보통 그런 경우면 우리 업체에 와서 일하면서 배우라고도 하는 곳이 있는데, 뭐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일이니 무책임하게 그러고 싶지는 않더라.
TIG> 팬이 있다면 무언가를 전수한다는 개념으로 충분히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게임 음악 계보를 잇는 다는 뜻으로.
박진배: 글쎄, 나는 가르친다기 보다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기회를 주고 괴롭히는 스타일같다. 그렇다고 폭력 등은 절대 아니다(웃음). 어디까지나 호랑이 새끼를 키운다는 개념으로.
보통 음악쪽은 같이 보조 작업이나 협업을 해서 그 작품을 통해 밑의 사람을 띄운다는 과정을 거치는데, 나는 기획부터 일을 아예 던져버린다. 그 기회에서 잘 살아남으면 조금 더 세심히 다듬어주면서 다음 기회를 주고 발전하도록 돕는 정도. 후배 작곡가 중 M2U나 TAK도 그런 케이스로 게임 음악쪽으로 이끌었다고 보면 된다.
어떻게 보면 계보를 잇는 다는 것이 그런 방식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한 작곡가의 취향, 흐름을 오롯이 따를 필요는 없다. 작곡가 별로 특징과 개성이 있으니, 그의 특성을 잘 살려서 ‘게임 음악’을 이어가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내가 가졌던 취미와 같이 후배 중에서도 자신만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이가 많을 것이므로 그것 또한 힘 되는 대로 장려해주고도 싶고.
TIG> 과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가 별로 없다.
박진배: 많은 분들이 무언가에서 떠올라 추억을 되짚는 정도로 과거 음원을 듣다가 ‘그 사람 요새 뭐하지?’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더라.
대부분 음원을 아카이브 한 것은 과거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계속 답습하면서 추억팔이로 불리는 똑같은 회상을 거듭하고 싶지는 않더라. 오히려 계보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신곡을 더 많이 만들었다. 과거에 작업했던 음악의 느낌을 어느 정도 떠올릴 수 있게. 그래서 여전히 살아있고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
TIG> 본인의 음악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나?
박진배: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이스> 게임 음악을 들으면서 작곡에 대한 꿈을 키우며 열심히 했더니, 이제는 내가 만든 <테일즈위버> 나 <라테일> 음악을 듣고 게임 음악을 시작했다는 후배들을 볼 때, 그래도 내가 올바른 길로 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작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그걸 자신의 꿈처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했고.
과거 작곡했던 곡들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때의 추억이 회상되는 향수처럼 느껴지나 보더라. 벌써 나이가 들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싫지는 않다.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겨지는 것이니까. 괜찮은 음악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작업하는 것들도 어린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 좋은 음악으로 회상해준다면 의미 있는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음악은 크게 보면 게임이라는 플랫폼 보다는 그 외의 콘텐츠 분야에서 효과적인 부분이 많다. 하지만 나는 게임을 통해 자라왔고 내 인생에 있어서 도움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 일종의 사명감이나 의무감도 포함되어 있다.
TIG> 음악의 트렌드는 지속해서 변한다. 다음 스텝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박진배: 콘텐츠 IP 사업은 게임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것 같다.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 처럼 마치 90년대 후반에 만화 원작으로부터 게임이 시작되었듯, 이제는 게임에서 태어난 IP가 다른 무언가로 옮겨가는 기점이라고 본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는 조금 추상적인 점이 있지만 디바이스나 기존 플랫폼에서 벗어난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할 일은 상황들이 바뀔 때 언제든지 시도할 수 있는 인력, 콘텐츠 브랜드를 준비하는 것이다.
과거 2009년 정도에 NHN게임제작센터에 있을 때 당시 MMORPG를 만들던 국내 개발자 2명이서 별 다른 계획 없이 취미처럼 만든 <헤비메크>라는 모바일 게임이 앱스토어에서 대히트를 친 것을 보고 하나의 작은 시도가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후 게임업계는 PC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대이동을 했던 것처럼, 어떻게 보면 지금이 또다시 그런 시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데스티니 차일드>가 게임을 포함해서 새로운 IP사업에 대한 시도가 그런 흐름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열린 자세로 젊은 크리에이터들을 많이 만나보고도 싶다. 요즘의 K-POP 영상등에서 느껴지는 젊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비티처럼, 게임 업계를 약간 벗어나면 독특한 인력들이 더 많이 보인다. 그들은 게임 업계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게임을 좋아하므로 서로 통하지 않을 것은 없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즐기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