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15년 동안 개발자 및 게임 기획자로 일해오다 현재는 교수직을 하는 업계 베테랑을 소개받았다. 아직도 게임을 개발하는 그는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꼭 해보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 게임 <멜빗 월드>도 해봤다. 다행히 게임을 테스트한 후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것 같다.
별 기대 없다가 관심을 보였다고나 할까? "음, 게임 잘 만들었네요! 재미 있어요. 그런데…" 여러가지 조언을 들었다. 우리처럼 인디 개발자들게는 어떤 피드백도 소중하다. 이 피드백이 모바일이면 더욱 그렇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교수님 한 마디가 귀에 맴돈다. "나만 좋아하는 게임과 다른 사람도 좋아하는 게임은 다르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해서 만든 게임이 유저들이 좋아하는 게임과 언제나 일치되지 않는다는 거다, 교수님은 좋아하는 게임만 고집하다가 문 닫은 게임사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게임이 출시됐을 때 넘치는 자부심 탓에 그런 말을 칭찬으로 넘겨짚었다. 꼭 "너희 게임은 아주 특별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자만심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그럼 인디는 무슨 게임을 만들어야 하나? 색다른 게임을 만들어보려고 '인디'를 하는 게 아닐까?
대중적인 게임은 누군가가 수백 억을 투자해 제작, 배포되고 있다. 그럼 인디게임으로 대박날 가능성은 없을까? 그런 와중에 최근 적잖은 인디 개발사가 <폴가이즈>의 성공에 머리를 쥐어 뜯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저런 생각을 못 했지?" 하면서. 물론 우리도 그랬다. "왜 우리는 <폴가이즈> 같은 게임을 못 만드는 걸까!".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오늘 소개할 개발사 치빅(CHIBIG)은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게임을 개발하는 곳이다. 오래도록 자기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애쓴 곳인데, 아직 대박을 내지는 않았어도 언제나 그럴 만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게임사라고 생각한다.
2016년 설립된 치빅은 모바일 게임 하나를 만들면서 유럽에서 이름을 알렸다. 이름은 <데이랜드>(Deiland). <데이랜드>는 주인공 '아르코'가 사는 작은 행성의 이름이기도 한데,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자급자족 하며 자신의 행성을 가꿔나가는 것이 게임의 콘셉트다.
기획 단계부터 치빅은 이런 설정에 깊이 빠졌다. 이들은 처음에 동화 <어린 왕자>에서 영감을 받아 <데이랜드>를 개발했다. 치빅은 자신만의 공간, 평화로운 생활, 약간의 활동과 교류 요소를 밀고 나가기로 한다.
처음에는 모바일 게임을 출시해 본인들의 세계관과 디자인, 아트 디렉션이 먹히는지 테스트했다. 첫 작품의 이름은 <데이랜드>. <데이랜드>는 '아르코'라는 주인공이 사는 아주 작은 행성 이름인데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아르코를 조작해 자기 행성을 가꿔나간다. 아르코는 자급자족으로 자기 삶을 영위하다가 섬으로 찾아오는 다양한 NPC가 주는 퀘스트를 수행한다.
<데이랜드>는 모바일에서 2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성공했다. 가능성을 확인했던 치빅은 <데이랜드>의 스팀과 콘솔 버전 출시에 도전한다.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의 도움을 받았다. 치빅은 5일 만에 무려 3만 유로(약 4천만 원)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2018년 8월, <데이랜드>는 성공적으로 스팀과 콘솔에 이식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모바일에서는 할 만한 볼륨이었던 게임이었다. 그렇지만 NPC를 만나고 작은 행성을 관리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인 게임은 스팀이나 콘솔에서 모자라보였던 것이다.
치빅은 변하고 싶지 않았다. 모바일 시장에서 재미를 봤고 스팀과 PS4에서는 고배를 마신 치빅이었지만, 다시 모바일에서 광고와 인앱 결제 유도로 점철된 게임을 내놓기 싫었다. 치빅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만들고 싶었던 게임을 내놓기로 한다.
치빅은 신작 힐링 게임 <마라의 여름>을 발표하고 크라우드펀딩을 연다. 전작 <데이랜드>를 재밌게 했거나, 가능성을 알아봤거나, 게임성이 살짝 아쉬웠던 사람들은 기꺼이 투자했다. 2020년 6월, <마라의 여름>은 게이머들의 도움을 받아 탄생했다. 두 번째 크라우드 펀딩에서는 23만 유로(약 3억 원)을 모금했다. <데이랜드> 펀딩 때보다 7배 넘게 모인 것이다.
<데이랜드>와 같이 <마라의 여름>도 100% 스탠드 얼론 게임이다. 혼자 동화책 읽듯 편하게 예쁜 배경과 캐릭터들의 모습을 즐기면 된다. 플레이어는 주인공 코아를 조작해 다른 NPC들과 교류해나가며 그녀를 성장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게임을 보면서 밝은 색감과 경쾌한 음악 속에서도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을 마주하는 듯한 향수가 피어올랐다.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코아는 '큐'라는 섬에 혼자 살고 있다. 태어나자 마자 가족을 잃은 그녀를 거두는 건 아야 하쿠라는 할머니. 어느 정도 성장한 코아는 할머니에게서 자신의 운명을 찾아 떠나라는 편지를 받고 '마라 대양'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녀는 대양의 섬에서 농사짓고, 할머니에게서 습득한 지혜를 바탕으로 간단한 도구와 음식을 만들어나가며 성장해나간다.
<마라의 여름>에서 코아는 주구장창 뛰어다닌다. <스타듀밸리>처럼 낮과 밤이 있어서 밤에 할 수 있는 행동이 제한되지만, 코아는 쉴 새 없이 뭔가 심고, 만들고, 돌아다닌다.
<마라의 여름>은 올해 6월 스팀, PS4, Xbox One, 그리고 닌텐도 스위치에 출시됐다. 게임은 지금까지 약 7만 5천 카피 정도 판매됐다고 한다. 닌텐도와 스팀에서 반응이 좋고 미국, 캐나다, 영국, 러시아, 중국에서 많이 즐긴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어 번역 계획은 없지만, 요청이 오면 검토해본다고.
<데이랜드>와 <마라의 여름>은 공통적으로 소년소녀의 소소한 활동을 통한 아름다운 성장을 그린다. 따라서 치빅을 오래도록 알고 있는 게이머들은 치빅의 이미지가 '이런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로 강하게 각인되어있을 것이다.
치빅 이야기는 내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줬다.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해나가면서 팬층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뻔한 이야기지만, 좋은 아이디어와 파이프라인을 유지할 개발력이 정말 필수적이라는 것. (<마라의 여름>은 제작 발표부터 출시까지 2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멜봇 스튜디오가 "좋아하는 게임만 고집하다가 문 닫은 게임사"가 될지도 모르지만, 당장 느껴지는 유혹에 흔들리지 말기로.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뭔지 차근차근 따져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