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은 보통 3개의 색으로 만들어집니다. 빨강, 노랑, 초록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파란불'이 켜지면 횡단보도를 건너라고 합니다. 대체 왜 있지도 않은 파란불을 보고 건너라고 하는걸까요?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전부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분 못하는 색맹인 것도 아니고 말이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문제로 난감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엄마, 신호등엔 파란색이 없는데 왜 파란불에 건너라고 해?' 라고 하면 답이 없죠. 이 문제에 대해 경향신문에서는 1984년 12월, "초록색 신호등이 왜 파랑색인가"라는 제목으로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인데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호등에는 파란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꼭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언어가 초록색과 파란색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한글도 '푸른색'은 파랑과 초록을 함께 지칭하죠. 예를 들어 '푸른 바다'와 '푸른 숲'이 둘 다 맞는 표현인 것입니다.
다른 언어를 살펴 보면 일본어의 みどり, 베트남어의 Xanh, 타이어의 เขียว, 전통 웨일스어의 glas가 한글의 '푸른색'과 비슷합니다. 현대화 되면서 몇몇 표현들은 '초록색'의 의미가 강해지고 있다네요. 이런 단어가 여러 언어에 있다보니, 영어권의 언어학계에서는 푸른색을 다루기 위해 green과 blue를 섞어 grue라는 표현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반인은 아무도 안 씁니다.
왜 이렇게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지 않는 지역이 많은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론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민족마다 무의식적으로 색을 인지하는 정도가 지역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과 그 결과를 언어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는 정도만 정설인데요.
하늘의 파랑과 숲의 초록이 모두 자연에서 오는 안정을 가져다주는 색이라서 2개의 색으로 보지 않고 '자연의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인식한다는 설이 조금 설득력있지 않나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푸른색_물감_하나로_그린_그림.JPG
신호등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새 버렸는데요, 원점으로 돌아가보죠. 논리적으로는 사람이 무의식중에 파랑과 초록을 구별해서 인지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으로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는대서 그것이 진실이 되진 않죠. 초록색 불빛은 초록불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파란불에 건너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파란불은 말 그대로 '파란색의 불빛'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청신호'라는 추상적인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게임산업 매출에 청신호가 켜졌다'같은 표현도 있잖아요.
아래는 국어사전에 있는 '파란불'의 예문입니다. 참고로 녹색불이나 초록불은 사전에 따로 없습니다.
"길 건널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며 모여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파란불이 켜졌는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처 : 한무숙, 어둠에 갇힌 불꽃들
많은 사람들이 신호등의 초록색 불빛을 보고 '파란불'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표준어로 인정되고 청신호라는 새 표현까지 생긴 것입니다. 언어는 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언중의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을 따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래서 언어를 연구하면 언중의 기본 사고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것이고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조금 더 하도록 하죠.
결론을 내리자면, 초록불이나 파란불이나 모두 맞는 말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