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블랭크>(제페토 개발)가 2009년 3월 19일 오픈베타 서비스를 시작했다.
관심을 모았다. 엔씨소프트가 처음으로 퍼블리싱하는 FPS였기 때문이다. 기본기는 좋았다. 최적화가 특별했다. 낮은 사양에도 그래픽 퀄리티가 뛰어났다. 보안이나 서버도 튼튼했다. 기존 인기 FPS들의 주요 요소도 완성도 있게 가져왔다.
오픈베타와 함께 본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사람이 모여들었다. 초기 동시접속자 수는 꽤 많았다. 금세 빠져나갔다.
엔씨소프트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리니지 2>와 콜레보레이션이었다. 4월 <리니지 2>의 대표적인 명소 ‘기란성 마을’을 대전 맵으로 추가됐다. MMORPG의 맵이 FPS에 등장하는 첫 사례였다. 화제가 됐다.
<리니지 2>의 유저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 중 남은 이는 별로 없었다. ‘총싸움이네’ 하고, 나가버렸다. 신기해서 찾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욕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리니지 2> 보물상자 같은 ‘아이템 빨’이었다. 그들을 계속 붙들어 둘 ‘엣지’는 없었다.
<포인트블랭크>에 대한 관심이 식었다. 기본기는 좋았지만, <서든어택>을 대체할 메리트가 없었다. 축구 팀으로 비유하면, 수비는 견고했다. 공격수가 없었다. 이미 점수 차가 많이 나는 경기에서 골을 못 넣었다. 졌다.
기란성은 너무 빨리 들어갔다. 더 갖춘 상태에서 추가돼야 했다. 뼈대만 충실한 상태에서, 게임의 핵심처럼 전달됐다. 맵 하나가 게임을 띄울 수도 있다. 맵 하나만으로 게임을 띄울 수는 없다. 기란성은 <서든어택> 유저들에겐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리니지 2> 팀도 별로 안 좋아했을 것이다.
<포인트블랭크>의 실패는 엔씨소프트의 약점을 보여줬다. 엔씨는 큰 게임을 잘 만드는 메이저 회사였다. 1년 반 전에 계약한 <포인트블랭크>의 론칭은 꽤 늦어졌다. 시장에 내놓기 전, 엔씨와 함께 튼튼한 근간을 잘 갖춰야 했다. 기본기와 완성도는 엔씨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안정적인 게임이 나왔다.
당시 디스이즈게임은 이렇게 리뷰했다.
아직은 ‘뼈대 뿐’이라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맵, 기본 캐릭터, 사운드, 총기, 아이템 등 기본적인 요소들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지만, ‘게임 모드’, ‘즐길 거리’, ‘코스튬’ 등의 주변적인 요소들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포인트 블랭크>만의 특징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사실 무언가 눈에 띄는 새로운 요소가 없다면 <서든어택>이나 기존의 다른 FPS 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엔씨는 1등 회사답게 마케팅을 했다. 대형 MMORPG를 론칭했던 경험으로 <포인트블랭크>에 접근했다. 니치 마켓은 거들떠 볼 곳이 아니었다. 쪼잔해 보였다. 안정적인 시스템과 운영, 대규모 마케팅을 통해 큰 수익을 기대했다. 한 달 10억 원은 성에도 차지 않는 숫자였다.
현실은 달랐다. FPS 시장에서 엔씨는 비주류 회사였다. <서든어택>이 꽉 잡고 있는 시장이었다. 3~4등 회사처럼 니치 마켓을 노려야 했다. 무난함은 큰 약점이었다. 3~4등 회사처럼 새로운 기능, 요소, 실험을 기민하게 넣어보며 기회를 노려야 했다. 엔씨의 기민함은 해킹에 관련된 이슈가 나올 때나 볼 수 있었다.
<포인트블랭크>에게는 큰 반전이 없었다. 2011년 7월 13일 국내 서비스를 종료했다.
<포인트블랭크>의 완성도 높은 기본기는 해외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경쟁 FPS가 약하거나 없는 곳에서는 특히 그랬다.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그런 곳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국민게임’이 됐다. 5년째 여전히 그렇다. 인도네시아 크레온은 단숨에 시장지배적 온라인게임 퍼블리셔가 됐다.
엔씨소프트는 제페토와 <포인트블랭크> 글로벌판권 계약을 했다. 딱 한 나라만 빠졌다. 인도네시아였다. 별 이슈가 아니었다. 당시까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작은 시장 중 하나였다. 역사는 그렇게 바뀌었다. simon :)
- 2009년 3월 19일 <포인트블랭크> 오픈베타 서비스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