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서양 최대의 게임회사 중 하나인 EA는 고민 중이었다. 아시아 시장은 ‘온라인게임’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한국의 온라인게임들이 중국 등 아시아를 휩쓸었다. EA도 이런저런 온라인게임을 시도했다. 하는 족족 실패했다. EA 소속 유명 개발팀들은 온라인게임을 어떻게 만들지 몰랐다. 만들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는 X박스를 가지고 있었다. EA가 가진 건 IP와 돈이었다.
한국의 네오위즈도 고민 중이었다. 네오위즈의 역사는 고비고비 큰 ‘한 방’이 이끌었다. 세이클럽의 성공으로 원클릭 고사의 위기를 넘겼다. 피망을 통해 뒤늦게 웹보드 3강에 합류했다. <스페셜포스>로 온라인게임 퍼블리셔로 자리잡았다. <크로스파이터>는 중국 특수까지 안겨줬다. <피파 온라인>으로 개발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온전한 자체 타이틀의 성공은 없었다. 피망 이후 성공한 게임들은 모두 시한폭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재.계.약. 네오위즈는 ‘한 방’이 다시 필요했다.
EA와 네오위즈는 2006년 2월부터 <피파 온라인>을 통해 ‘합’을 맞춰봤다. <피파 온라인>은 EA의 온라인 시도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아니, 유일한 성공이었다. 네오위즈에 합류한 정상원과 띵소프트 멤버들의 공이 컸다.
EA는 자신의 IP를 활용해 아시아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싶었다. 네오위즈가 눈에 띄었다. 함께 도모하고 싶었다. 네오위즈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재계약이 골치였다. 검증된 IP는 매력적이었다. 국내외에 다 통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EA였다. 네오위즈의 글로벌 브랜드에도 큰 도움이 됐다.
두 회사는 추가적인 공동개발에 머물지 않았다. 2007년 3월 20일, 네오위즈는 게임계를 깜짝 놀라게 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EA는 (네오위즈의) 자사주를 제외한 의결권 주식의 약 19%가량을 확보하게 되며 15%의 보통주와 의결권 주식의 4%에 해당하는 전환우선주를 받아 일정 시점 후에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EA의 투자금액은 약 1억5백만 달러(약 1,000억 원)가 된다. 계약이 완료되는 시점에 EA는 1대주주인 나성균 사장에 이어 네오위즈의 2대주주가 된다.
한편, EA와 네오위즈는 아시아 시장에서 퍼블리싱하기 위한 온라인게임 4종을 공동개발할 예정이다. 네오위즈는 공동개발하는 4종의 게임 중 적어도 2개를 한국과 일본에 퍼블리싱할 권한도 가지게 된다.
EA는 ‘미래의 아시아 베이스캠프’에 아예 투자까지 했다. 개발력은 이미 검증했다. 잘 되면 투자이익도 보고, 최대 주주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다. 네오위즈는 때맞춰 회사를 4개로 분할할 예정이었다. 향후 EA가 합병하기에 더 좋은 모양새였다. 네오위즈도 좋았다. 공동개발할 4개의 IP를 확보했다. EA의 투자를 통해 주가는 더욱 올라갈 수도 있었다. 네오위즈게임즈는 네오위즈로부터 분할돼 그해 5~6월 재상장될 예정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네오위즈게임즈가 EA의 산하 스튜디오가 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비슷한 시기, 중국 업체의 개발사 투자나 인수에 비해 반발은 거의 없었다. 이중잣대라는 소리도 나왔다. 퍼블리싱 권한 등 개발 조건이 네오위즈에게 다소 불리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유저들은 공동개발 4개의 타이틀에 관심이 몰렸다. 3개월 뒤 그 중 하나가 <배틀필드>라는 게 발표됐다.
양자의 니즈가 맞았다. 네오위즈로서는 거대한 시도였다. 한국 게임 역사에 의미있는 한 페이지였다. 결과는 실패였다. EA는 2012년 말 떠났다.
정상원이 먼저 떠났다. 2009년 11월이었다. <피파온라인 2>는 2010년 7월로 계약기간이 끝났다. 두 회사는 1개월 단위로 계약기간을 늘렸다.
2012년 7월 말 EA는 넥슨과 <피파온라인 3> 퍼블리싱 계약을 발표했다. 2012년 11월 네오위즈는 <피파온라인 2> 서비스를 이듬해 3월 말에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2012년 말부터 EA가 네오위즈 관련 지분을 뭉치로 판매하기 시작한 게 알려졌다. simon :)
- 2007년 3월 20일 EA, 네오위즈 지분 19% 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