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이즈게임은 얼음병정 님의 게임 비평과 리뷰를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냉철한 자신의 시선으로 풀어낸 리뷰와 비평을 통해 디스이즈게임이 놓칠 수 있었던 게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담론의 장을 열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리뷰리퍼블릭에 먼저 게재된 글입니다.
주의!
본 비평은 게임 전반에 대해 스포일링을 하고 있습니다.
언더테일은 스포일러에 굉장히 민감한 작품입니다.
반드시 게임을 플레이하고 비평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intro
<언더테일>은 제게 있어 각별한 게임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게임'이라는 콘텐츠와 '게임 스토리텔링’ 시장의 큰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유저들도 적지 않습니다.
"흔한 RPG에 슈팅 요소를 넣은 것에 불과하다."
"반전이 대단할 것 없다."
"스토리가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오글거릴 뿐이다."
"과대평가된 가장 대표적인 게임"
이라고 말이죠.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참 유감스럽습니다. <언더테일>은 시작은 밝고 경쾌한 동화 같지만, 끝은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만큼이나 묵직하고 날카롭습니다. <언더테일>의 칼날은 깊숙이 찔러 들어오고, 치명상을 남깁니다.
지금부터 <언더테일>이라는 작품이 어떤 비수를 꽂는 작품인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갈림길 서사
<언더테일>은 '갈림길 서사'를 채택한 작품입니다. 갈림길 서사란 '둘 또는 그 이상의 양립할 수 없는 세계가 동일한 디에게시스 층위*에 공존하는 서사'를 뜻합니다(책 <서사학강의>에서 인용). <언더테일>의 갈림길은 크게 세 개로 분류됩니다.
* 디에게시스: 어떤 스토리와 그 스토리에 관련된 실제의 말하기를 구분하기 위해 서사 이론에서 사용하는 용어.
- 불살
- 노멀
- 학살
학살 루트와 노멀 루트는 게임 시작 후 일정 조건 충족 후 얼마든지 플레이할 수 있지만, 불살 루트는 반드시 노멀 루트를 클리어한 후에만 볼 수 있습니다. 길(route)은 게이머의 사소한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노멀 루트의 세세한 이야기는 이 사소한 행동의 결과가 반영되어 다양하게 변화합니다.
길의 변화에 있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은 플레이어의 '이름'입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가장 먼저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이름을 짓습니다. '프리스크(frisk)'라고 지으면 이스터에그가 작동합니다. '차라(Chara)'라고 지으면 이 이름이 "진짜 이름"이라고 알려줍니다. 이를 통해 어떤 이름을 짓든지 당신은 'Chara' 즉, 'Character'를 플레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름을 결정하고 게임에 들어가면 동굴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플라위(Flowey)를 만납니다. 플라위는 여러분들에게 게임의 조작법과 시스템을 알려줍니다. “당신은 LV를 올려야 하며 LV는 LOVE의 약자다”, “이 세계에서는 친절 알갱이로 친절을 나눈다”와 같이 말입니다.
이내 플라위는 당신을 등쳐먹으려고 시도합니다. 다행히 당신은 토리엘에게 도움을 받아 플라위를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경험에서 한 가지 인상을 얻습니다.
"이 게임은 시작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유저를 속여먹는구나"
토리엘의 행동도 하나하나 수상합니다. '그 누구도 해쳐선 안 된다', '퍼즐은 위험하니까 가까이하지 말렴', '잠깐만 혼자 어디까지 가보렴(그러면서 몰래 감시하고 있다)', '어디 잠깐 다녀올 테니 절대 움직이지 말거라', '가만있으랬는데 왜 혼자 여기에 찾아온 거니?' 토리엘의 언행은 플레이어를 옭아매고 통제하려는 것만 같습니다.
더욱이 한 개구리로부터 '토리엘이 여기를 지나갔다.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더더욱 토리엘을 의심하게 됩니다. 토리엘과 함께 토리엘의 숙소에 들어서게 되면 토리엘은 플레이어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고, 동굴에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동굴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토리엘은 무력으로 당신을 못 나가게 막아섭니다. 당신은 그녀를 해칠 수도, 해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건 당신은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토리엘이 얼마나 선한 인물이었는지 게임은 지속해서 상기시켜줍니다.
토리엘은 그저 전형적인 '부모'의 속성을 띤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묘하게 게임은 플레이어가 토리엘을 죽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불응하고 선한 의지를 이어나갈 수도 있지만, 이런 유도에 빠져 죄책감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게임은 플레이어가 먼저 '노멀' 루트를 향해 나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노멀' 루트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루트들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전 제공을 하고자 하는 거죠. 그러나 비평에서는 이 순서을 그대로 따르진 않을 것입니다.
# 메타성
<언더테일>의 또 다른 서사 양식으로는 메타제시 서사(Metalepsis narrative)가 있습니다. '메타제시(Metalepsis)'란 이야기의 세계에 다른 세계가 침투하거나 이야기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침투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갈림길 서사와는 다릅니다.
작품은 이야기의 세계, 서술자의 세계, 독자의 세계 등 다양한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의 세계의 주체가 다른 세계에 침투하는 상황을 '메타제시' 또는 '메타성'이라고 합니다.
<언더테일>의 길은 불살, 노멀, 학살로 크게 세 개가 있습니다. 각각의 길은 불살 → 노멀 → 학살 순으로 메타성이 짙어집니다. 불살루트는 메타성이 가장 얕은 작품이며, 따라서 이야기의 세계가 완고하게 이야기를 지배합니다. 침투한 메타성은 이야기에 흡수되어 인물의 동기를 독자에게 설득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불살 루트의 조건은 ‘NPC 어느 하나 죽이지 않고, 노멀 엔딩을 본 후, 주변 인물(파피루스, 언다인, 알피스) 전원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노멀 엔딩을 보지 않으면 불살 루트를 진입할 수 없죠. 토비 폭스가 이런 선택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불살 루트를 먼저 살펴보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노멀 루트 후반부 진입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아스고어와 토리엘, 그리고 아스리엘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됩니다. 아스고어와 토리엘에게 아스리엘이라는 아이가 있었고, 어느 날 지하세계로 인간 아이가 떨어지면서 둘을 함께 길렀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다 인간 아이가 병들고 앓아눕게 됩니다. 아이는 고향에 있는 꽃을 보고 싶다고 했죠.
하지만 인간과의 전쟁 이후 인간이 지하세계에 쳐놓은 결계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인간의 영혼과 괴물의 영혼이 합해져야만 결계를 뚫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결국, 인간 아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아스리엘은 인간 아이의 영혼을 이용해 결계를 빠져나오고 아이에게 고향의 꽃을 보여주지만, 인간에 의해 쫓겨나고 맙니다. 그리고 그때 입은 상처로 인해 아스리엘도 세상을 떠나지요.
지하세계는 절망에 빠지고, 아스고어는 인간의 영혼을 모아 결계를 부수고 인간계에 복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아스고어의 결정에 토리엘은 실망하고 아스고어를 떠나버리죠. 그러나 정작 플레이어가 만난 아스고어는 인간계를 침공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괴물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죠.
아스고어는 적극적으로 인간 사냥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하계로 떨어진 인간들의 영혼만 수거하는 수동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인간과의 전쟁의 시일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7번째 인간(플레이어)가 하계로 떨어지면서 아스고어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맙니다.
그런데 불살루트로 들어가게 되면 이상한 정보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스고어가 알피스에게 결계를 부수고 괴물을 자유롭게 할 방법을 찾아내도록 의뢰했단 것입니다. 이에 알피스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망한 괴물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말하는 꽃' 플라위의 탄생 과정으로 짐작되는 정황을 포착합니다.
그리고 토리엘과 아스고어, 아스리엘과 인간 아이의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도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인간 아이의 이름을 듣게 됩니다. 바로 'Chara(플레이어가 지은 이름)' 였습니다. 정리하면 플레이어는 이전에 지하세계로 떨어져 아스리엘과 생활했고 곧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지하세계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차라는 아스리엘에게 어떤 '계획'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에는 '6개의 영혼'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알피스의 '아스고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는 기록에서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짐작대로 플라위가 아스리엘이었습니다.
불살루트에서 '메타제시'가 드러나는 부분은 이곳입니다. 플라위의 "이것은 게임이다"라는 언급에서부터요. 이것은 일반적으로 극 중에서 사용되는 인물과 인물 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사건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더테일>이 '게임'이라는 걸 의미하죠.
유저는 중간에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엔딩'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끝없이 게임을 반복할 것입니다. 플레이어를 남겨놓으려면 플라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플레이어가 엔딩에 다다르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6개의 인간의 영혼과 숱한 괴물들의 영혼을 모두 흡수한 플라위는 아스리엘로 돌아옵니다. 당연히 플라위보다 더 강력해졌어야 할 아스리엘이 "너를 쓰러뜨리고 내 힘을 되찾으면"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다른 인물들을 흡수하고 강해졌는데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이 납득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스리엘은 체감 난이도 면에서 노멀 루트의 플라위만큼 강력하지 못합니다.
연출되고 있는 능력 면으로 따지면 아스리엘은 노멀루트의 플라위보다 한참 아래입니다. 노멀루트의 플라위는 멋대로 save/load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한참 위의 힘을 가진 아스리엘은 플레이어의 의지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합니다.
더 심층적으로 고민해보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는 바로 '의지'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의지'는 이야기상에서 명명된 관념체가 아니었습니다. 플레이어의 의지를, 심리상태를 지칭하는 말이었죠. 플레이어가 게임오버 될 때마다 "의지를 살려야 한다"는 말로 게임을 계속 진행할 것을 종용하듯이 말이죠.
'인간은 의지를 가진다'는 말도 인간이 플레이어이기 때문입니다. 패배하고 패배해도 계속 반복되는 상황은 게임에 대한 플레이어의 '의지'가 발현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살루트에서는 '의지'가 게임 내에 존재하는 하나의 관념체를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됩니다. 아스리엘과의 싸움에서도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게임에서 알아서 의지를 발현시켜 게임을 진행합니다.
깨어진 하트가 갑자기 다시 붙으면서 저절로 게임이 계속되는 것으로 말이죠. 작품 밖의 요소로 메타제시가 되고 있던 요소들이 게임 내로 들어오면서 도리어 이야기에서 진행하고 있는 오브제(object)로 변이되었습니다.
이렇듯 불살루트는 이야기의 주도성이 강합니다. 인물, 사건, 배경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차라(chara)가 죽었는데 다시 차라가 살아난 모순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게임은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이름을 공개합니다. 프리스크(frisk). 차라와 프리스크가 분리되면서 모순이 해결됩니다.
불살루트를 기준으로 기존의 루트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언더테일>에 대한 해석들입니다. 독자들은 일반적으로 사건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죠. 이제 관점을 비틀어봅시다. 이번에는 메타성이 가장 강한 학살 루트를 살펴볼 겁니다.
# 학살의 의지
학살 루트는 메타성이 가장 강한 루트인 동시에 이야기가 가장 빈약한 루트입니다. 학살 루트의 진입방법은 진행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메인 이벤트 전투들이 분기점이 되어 각 분기점마다 학살 루트 진입을 위해 일정한 사살자 수를 요구합니다. 이를 충족하면 다음 분기에서도 학살 루트를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엔딩까지 모조리 죽이면 됩니다. 각 분기점마다 필요한 학살의 수는 세이브 포인트에서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를 충족시키면 '의지'라는 글이 나오죠. 오로지 학살 루트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루트에서는 “생쥐가 구멍으로 나와 치즈를 먹을 것을 알기에 당신의 의지가 충만해진다”는 등의 문장이 나오고 세이브가 열리는 방식이었죠. 이런 모든 것들이 생략되고 오로지 '의지'만 뜨게 됩니다.
학살 루트의 메타성은 시작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지만 유저가 메타성을 인지하게 되는 기점은 다른 루트들과 마찬가지로 종반지점에 있습니다. 플라위와 샌즈의 대사를 통해서 말이죠. 플라위와 샌즈는 인물상에 있어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게임의 저장(save)/불러오기(load)를 알고 있는 유일한 작중 인물들입니다.
플라위는 저장과 불러오기를 이용할 수 있었고, 샌즈는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플라위는 저장과 불러오기를 통해 모든 가능성을 경험했고, 샌즈는 세계의 모든 인물의 열망을 이해합니다. 샌즈의 경우 플레이어의 성향을 추론하여 답을 도출해내는 경지에 이르죠. 그리고 플레이어를 설득합니다. 지금까지 네가 한 선택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더 나은 선택을 하라고.
즉, 독자의 세계가 이야기의 세계에 종속되던 불살 루트와 달리 학살 루트는 이야기의 세계가 독자의 세계에 종속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의 시스템과 플레이어의 의지가 게임의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침투하여 장악합니다. 게이머에겐 이야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물의 성격? 알 바 아닙니다. 인물들의 사연? 알 바 아닙니다. 인물들의 소망? 알 바 아닙니다. 게이머들은 그저 때리고 죽이고 Exp(경험치)를 얻어 LV(레벨)을 올리기를 원합니다.
일단 눈앞에 돌아다니는 모든 것들은 죽여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못 죽이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불만과 실망이 솟구칩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자유도가 높은 게임'을 선호합니다. 못 가게 막는 곳이 있단 것도 불만스러워 '어디에나 갈 수 있는 게임'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게임이 우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픈월드'와 '샌드박스'가 유독 각광받습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게이머들은 선형적인 게임마저 "왜 멀티 엔딩을 만들지 않았느냐", "선택을 했으면 엔딩이 바뀌어야지!"와 같은 반발을 합니다. “게임인데 뭐”라는 한마디로 그들의 욕망은 쉽게 정당화됩니다.
게임 내 인물과 세상은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당연히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언더테일>은 의도적으로 그런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모두를 죽일 수 있게 해놓고 공격 버튼을 사용하지 못하게끔 이야기를 통해 플레이어를 유도합니다. 이런 유도에 순순히 따라가 '노말 루트'와 '불살 루트'를 본 유저들마저도 내가 아직 건드려보지 않은 '모두를 죽였을 때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고, 이에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해볼 수 있는 건데 해보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살 루트의 진입 조건은 필요치 만큼의 NPC를 죽이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는 학살루 트로 진입하기 위해 지역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언제 NPC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무작정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죽이다 보면 LV가 오릅니다. 위의 행위는 다른 롤플레잉 RPG게임에서 늘 하던 일입니다. ‘노가다’ 또는 '파밍'이라는 정당화를 통해 수없이 반복되던 '학살'이었습니다.
다른 RPG와 <언더테일>의 차이는 다른 RPG 게임들은 LV를 올려 강해지는 것이 목적이지만 <언더테일>은 학살 루트를 보기 위해 죽이다 보면 자연스레 Exp와 LV가 올라간단 겁니다. 차이는 전자가 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후자는 폭력에 초점을 맞춘 것에서 비롯됩니다. <언더테일>에서 Exp와 LV가 처형 점수(Execution Point)와 폭력 지수(Level of Violence)의 약자라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입니다.
RPG에서 우리의 성장은 폭력으로 점철된 피의 성장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학살 루트의 진입 조건의 진정한 의미는 "유저가 자율성을 추구할 것"이 됩니다. 유저가 자율을 추구하고 학살을 목표로 잡아 학살을 자행하면 당신은 NPC들마저도 기피하는 최악의 존재로 <언더테일>의 세계에 군림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의지'입니다.
샌즈는 이것을 간파한 유일한 NPC입니다. 샌즈는 노멀, 불살 루트에서는 어벙하고 덜떨어진 개그나 하는 흔한 주변인물에 불과했습니다. 몇몇 구간에서 게임 내의 시스템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비논리적이고 비물리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학살 루트에서의 샌즈는 플레이어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플레이어에게 저항합니다. 지금껏 <언더테일> 내에서 맛볼 수 없었던 가장 극악의 난이도를 보여줍니다. 처음 보는 유저는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도 못 할 정도죠. 사망한 이후에 다시 도전하면 샌즈는 플레이어가 몇 번 사망했는지 가르쳐주며 플레이어를 지속적으로 자극합니다.
샌즈와 수십 번 수백 번을 싸워 그의 공격에 익숙해지지 않는 이상 그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샌즈와 끊임없이 싸우는 행위는 게임 내의 인물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게임 외의 인물, '저장/불러오기'를 할 수 있는 존재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샌즈는 <언더테일>세계 내에서의 전지자의 입장에서 플레이어를 맞이하는 존재이며, NPC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그간 <언더테일>이 플레이어에게 제공한 모든 정보와 이야기들을 모조리 소거하고 오롯이 플레이어로서 샌즈에게 부딪쳐야만 샌즈를 공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기존 루트에서의 샌즈와의 관계, 파피루스와의 관계 및 다른 NPC들과의 관계 때문에 일말의 망설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나 언다인의 경우 불살 루트와 노말 루트에서의 관계 때문에 '불사의 언다인'을 상대하는 동안 내내 죄책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특히 '불사의 언다인'의 선의지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악인이 되어 선인을 죽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기점 하나하나가 사실은 '언제든지 학살 루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호기심'이나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안일한 정당화를 통해 샌즈에게 다다르게 됩니다. 물론 샌즈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한계를 느껴 포기를 고민하는 유저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이겨내고 샌즈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하면 샌즈는 결정적인 한 방을 던집니다.
게임 내 시스템을 이용하여 NPC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수, 바로 턴을 넘기지 않는 것을 택합니다. 여기서 또 언더테일의 독특한 시스템이 한몫합니다.
본래 턴(turn)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순서화한 것입니다. 5인의 플레이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동시에 5인의 행동을 순서화하여 배열한 후 다음 시간으로 넘기는 방식인 거죠. 때문에 턴 하나하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모든 플레이어의 시간이 합쳐져야만 시간으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언더테일>은 플레이어의 공격과 NPC의 공격 모두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도 순서로서의 턴이 존재합니다. 단순히 슈팅게임을 RPG에 접목시킨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스토리텔링에 쓰기 위해 실시간 요소인 슈팅게임을 가미한 것입니다.
그러니 샌즈가 턴을 넘기지 않으면 기한 없이 계속해서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하고, 플레이어는 절대로 샌즈를 죽일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됩니다.
샌즈를 게임 내 전지자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게임 내의 모든 것을 알고, 게임 내의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게임 외부에 있는 플레이어까지도 파악합니다. 또한, 샌즈를 표현하는 연출 자체가 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플레이어가 샌즈에 대항하는 것은 '게임'의 전지자 그 자체에 부딪히는 것이며, 인간의 폭력 의지가 자연스럽게 표출되도록 만드는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의 룰까지 어겨가며 끝끝내 샌즈를 죽이는 데 성공합니다. 플레이어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자신을 수도 없이 죽이고 방해한 샌즈에 대한 분노입니다.
샌즈는 단순히 마지막 보스였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플레이어에게 남아있는 선의, 게임 내 인물로서의 인물성, 도덕적인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플레이어를 욕망 그 자체로 변이시킬 의무가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래서 샌즈에 대한 연민은 샌즈를 죽인 이후에야 다시 드러납니다.
샌즈를 죽인 이후에 플레이어가 할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미 당신은 차라에게 장악당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차라는 플레이어의 조종과는 무관하게 아스고어와 플라위를 죽이고, 세계를 멸망시켜버립니다. 이때 차라는 말합니다. 플레이어가 날 깨웠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힘이라고.
플레이어가 그 시점에 와서야 세상(게임)을 부수기를 거부할 지라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차라는 "언제부터 네게 주도권이 있었지?"라고 말하며 게임을 망가뜨려 버립니다. 이후 게임을 실행하면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 차라의 의미
결국 차라는 무엇이었을까요? 차라는 인간의 의지 그 자체이며, 우리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입니다. 불살을 중심으로 해석하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프리스크여야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불살 루트로 가야만 프리크스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른 루트에서의 프리스크의 영향력은 없습니다.
시작할 때 이름을 프리스크(Frisk)라고 지으면 이스터에그만 발동되고 게임이 진행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조종하는 인물은 애초부터 프리스크가 아닙니다. 프리스크는 게임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인물과의 관계를 형성하여 모두와 친구가 되었을 때만 부여받을 수 있는, 즉 게임 내에만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불살루트를 탔을 때 우리의 인격은 프리스크에 준하게 성장한 상태이며, 오직 이때만 프리스크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라는 게임 세계 내의 모든 가능성이 잔존한 상태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의지'입니다. 스토리상 차라의 영혼은 아스리엘이 가지고 있으므로 영혼이나 의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 의지를 깨운 것이 바로 플레이어입니다.
플레이어가 차라를 갖고 그의 의지를 투영하면서, 차라는 점점 최초의 '차라' 그 자체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다르면 "네 덕분에 내가 살아났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후반부에 차라가 깨어난 이후 우리는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차라는 제멋대로 세계를 파괴해버리죠.
이후 파괴된 세계에 10분 이상 자리하고 있으면 차라가 나타납니다. 왜 여기 있냐구요. 아직 그 세계에 미련이 남은 거냐고요. 그리고 영혼이 없는 자신에게 너의 영혼을 주면 세계를 다시 돌려놓겠다고 제안합니다. 플레이어가 이에 불응할 시 차라는 돌아갑니다. 플레이어가 이에 순응할 시 게임은 다시 작동합니다.
마치 원상태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플레이어는 이제 다시는 불살엔딩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살 엔딩으로 끝까지 잘 마무리했더라도, 마지막에 차라가 깨어나 모두를 죽이는 엔딩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차라는 이미 우리의 의지를 빼앗았고, 그 의지는 폭력과 학살에 찌들고 분노와 증오로 점철된 의지니까요. 또 그것이 차라에게 걸맞는 의지기도 하구요.
한 번 세계의 종말을 경험했는데도 플레이어가 또다시 학살 루트를 걷게 되면 차라는 새로운 멘트와 나타납니다. 자신은 악마라고요. 한 번 세계를 되돌려놓고 또 부수려 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요. 그리고 이 세계를 파괴하는 건 오롯이 너의 의지였다고 말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를 파괴합니다. 이때는 영원히 게임을 다시 플레이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부서진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차라(Chara)'는 그 이름의 어원에 따라 플레이어라고 하는 외부 존재의 게임 내적 투영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모두를 죽여보고자 하고, 마주하는 모든 장소를 가보고자 하는, 숨어있는 이들까지 찾아내서 죽이고 성장하길 원하는 의지를 투영한 인물입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
이제 남은 루트는 '노멀 루트' 하나입니다. 이 루트야말로 토비 폭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 그 자체입니다. 불살 루트와 학살 루트 플레이하기 이전, 게임에 막 입문했을 시기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 노멀 루트입니다. 그 상황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겠죠. 이 인물은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이때 당신에게 남아있는 건 플라위 뿐입니다.
차라는 게이머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게이머가 가지고 있는 더러운 욕망 덩어리를 표현한 것이죠. 토비 폭스가 이 작품에서 진정 '게이머'라는 가치를 부여한 존재는 따로 있습니다.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차라에게 주도권을 뺏겼던 존재. 몸에 대한 감각을 잃고 도덕성도 잃어버린 존재. 저장과 불러오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순수하게 힘을 추구했던 존재. 플라위입니다.
플라위는 시작부터 힘을 추구하던 캐릭터였습니다. 상대를 속여 Exp를 올리고 LV를 올릴 생각이나 하던 놈이죠. 이런 욕망은 LV와 Exp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게이머의 것입니다. 게이머는 게임 세상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조종하므로 그 캐릭터의 감각은 느끼지 못합니다. 당연히 내 세상이 아니고 실제 인물도 아니므로 그 인물에 대한 애정도 없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설사 그 대상이 게임 밖에서 게임을 하는 게이머라고 해도 말이죠. 사람이라 해도 속이고 괴롭히는 것을 즐깁니다. 이것이 플라위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면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플레이어와 플라위는 전적으로 PVP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거죠. MMORPG에서 겪을 수 있는 관계를 NPC와 맺고 있는 겁니다.
후반부에 아스고어가 플라위의 손에 죽고, 게임이 꺼진 후 다시 실행했을 때 보이는 플라위의 저장 파일에서 우리는 플레이의 레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레벨은 플라위가 곪고 곪은 게이머의 정신상태와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플라위는 결국 게임 내부에 속해있는 존재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일 수 없죠. 그래서 마지막에 인간의 영혼을 흡수한 플라위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바로 게임 내의 존재이면서 인간의 의지까지 가진 게이머죠. 이런 게이머를 현실에 빗대려면 플라위의 성격을 뒤집으면 됩니다.
게임 외부의 존재이지만 게임 내부에 영향력을 갖는 게이머. 게임을 플레이 하는 동시에 게임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존재. 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핵쟁이'들이죠.
곪고 곪은 정신상태는 그를 절대자 위치를 갈망하는 존재로 만듭니다. 학살루트의 플라위의 표현처럼 "이 세계에 있는 가능성을 모두 해보았으니까"요.
어쩌면 인터넷에서 우리는 타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우습게 아는 것이죠. 플라위의 상태는 이와 동일합니다. 플라위가 '알 수 없는 무언가(운영자)'에 의해 힘을 봉인 당하고(제재) 당황하다 자멸하는 모습 게이머와 닮았습니다.
아스리엘이 저장/불러오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스리엘은 게임 내 인물입니다. 아스리엘의 정체성은 오로지 아스리엘로만 귀결됩니다. '게이머'가 아닙니다. 게이머이기 위해서는 아스리엘의 정체성으로 플라위라는 형체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게임을 하기 위해 캐릭터(Character, Chara)가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래서 프리스크도 우리의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프리스크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캐릭터화된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플레이어화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유년시절 아스리엘과 함께 있어 주는 존재는 차라(캐릭터, 게임, 게이머로서의 의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스리엘이 플라위가 된 이유입니다.
# Outro
아스리엘이 플라위가 된 경위는, 게이머가 차라가 된 경위와 같습니다. 자율을 추구했으나 도리어 그 '가상의 존재'에 귀속되어 자율을 잃어버리는 거죠. 한 편 불살 루트를 통해 우리는 그 비틀어진 마음을 치유하고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유지할 여지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상 세계에서 '무엇이든 열려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병들게 하고 세계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람과 무관하게 일어나겠죠.
토비 폭스는 오로지 불살 루트에만 엔딩크레딧을 넣어두었습니다. 토비 폭스가 지향하는 세계가 이쪽이기 때문일 겁니다. 토비 폭스를 플라위가 아닌 아스리엘로, 차라가 아닌 프리스크로 있게 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토비 폭스가 이 게임의 창작자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게이머이기도 하니까요.
게이머이기에 게이머를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가장 잘 파악하는 동시에 가장 잘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죠. 가상세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우리들의 이야기(undertale), 그것이 <언더테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