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게임을 만든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꿈일 겁니다. 굳이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사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혹은 글을 쓰는 사람 등 누구라도 그런 꿈을 한 번쯤은 가져보게 마련이죠.
필자 역시 그런 흔한 게이머 중 하나입니다. 취미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막연히 '언젠가는 내 글과 그림으로 게임을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상상만 하며 지내왔죠. 스스로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게임 제작에 뛰어들기엔 당장의 생활고와 바쁜 일상에 쫓겨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몇달이나마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쭉 꿈꿔왔던, 그동안 바쁜 일상이라는 핑계로 상상속으로만 그려오던 것을 현실로 옮길 기회가 왔다고요.
그래서 무작정 뛰어들었습니다. 잠시나마 일을 쉬고 있는 이 기간이 스스로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요. 오로지 완성만을 목표로 달린 끝에, 정말로 7월에 일본 동인 샵에 게임을 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게임 개발은 커녕 프로그래밍의 ㅍ자도 모르던 평범한 글쟁이가 혼자서 게임을 완성하기까지, 그 우여곡절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필자가 경험한 내용이 혹시라도 앞으로 동인게임 개발을 꿈꾸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작게나마 기원해 봅니다.
# 그래서 어떤 게임을 만들지?
막연히 '게임을 만든다'라고는 해도, 일단 결심하고 나면 여기에서부터 생각이 시작됩니다. 꿈속에서야 화려한 연출 속에서 뛰어다니는 3D 액션 게임을 상상해도, 자신의 적성과 기술적인 한계는 분명히 있는 거니까요.
필자가 생각한 장르는 '비주얼 노벨'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Fate/Stay Night>나 각종 미소녀 게임처럼, 그림과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텍스트 어드벤쳐 장르죠. 스스로가 가진 특기가 글쓰기와 그림그리기 뿐이었던 만큼,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타협안이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이 장르를 좋아하기도 했고요.
▲ 일러스트와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비주얼 노벨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이미지는 <Air>의 한 장면.
약간 다르게 표현하면 "그림이랑 텍스트만 들어가니까 초심자도 만들기 쉽겠지" 하고 만만하게 본 거죠. 이 생각은 개발에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순식간에 깨져버렸습니다.
어찌됐든, 장르를 비주얼 노벨로 잡았다면 이제 게임을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연애 게임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해도, 그 안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캐릭터와 콘텐츠가 있습니다. 스토리를 중시해 소설처럼 만드는 게임도 있고, 상대방의 호감도를 올리는 게임도 있고, 성장 요소를 넣어 RPG처럼 만드는 게임도 있죠.
캐릭터성 역시 대부분 게임에서 누님 취향인 유저를 노린다든지, 크든 작든 바스트 사이즈로 유저를 사로잡는다든지, 미청년을 내세워 여성 유저를 노린다든지 하는 '방향성'이 명확한 경우가 많습니다.
필자의 경우는 '나 자신의 작품 세계를 나타낼 수 있는 완성물을 만들자'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캐릭터성은 명확한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평소 그림을 그릴 때부터 여성 캐릭터의 평균 체중이 100kg은 훌쩍 넘는, 그런 소수 취향의 작품을 고집해 왔거든요.
(※ 당연한 얘기지만 너무 소수 취향이다 보니 이런 쪽을 만족시켜주는 '게임'은 정말 손에 꼽아도 부족할 정도로 없습니다. 필자가 아는 한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같은 사람이 즐길 게 없으면 내가 만든다"는 심정으로 게임 제작에 뛰어든 부분도 있습니다.)
▲ 캐릭터성을 내세운 콘텐츠의 경우 '다양한 스타일'로 물량전을 벌이는 경우도,
'단일된 스타일'로 특정 소비자층을 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필자는 후자를 노렸습니다.
(이미지는 필자의 취향과는 별 상관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마스보단 러브라이브가...
▲ 사족으로 덧붙이면 필자의 취향은 대충 이렇습니다. 이러니 취향 맞는 게임이 없죠.(...)
"존중입니다 취향해 주시죠"
게임 콘텐츠에 대해선 적잖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처럼 연애 시 호감도 관리를 하는 '연애 시뮬레이션'을 만들 것인가, 선택지에 따라 엔딩이 나뉘는 '비주얼 노벨'을 만들 것인가, <쓰르라미 울 적에>처럼 단일노선으로 진행되는 '키네틱 노벨'을 만들 것인가. 저마다 장단점이 있었죠.
필자의 선택은 키네틱 노벨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키네틱 노벨'이라는 명칭은 비주얼 아츠라는 회사에서 만든 브랜드 네임이긴 하지만, 국내에선 장르 명칭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죠. 쉽게 설명하자면 '선택지가 없는 비주얼 노벨'이라고 받아들이면 될 겁니다. 게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내용물은 게임이라기보다는 소설책에 가까운 장르죠.
캐릭터 자체가 소수 취향의 캐릭터인데다 장르도 장르다 보니 게임은 일본 동인 시장에만 내놓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그나마 바다 건너에는 이 소수 취향의 수요층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거든요.
# 그러면 비주얼 노벨을 어떻게 만들어?
작품의 장르와 캐릭터의 방향성이 정해졌으니, 이제는 실현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야겠죠?
학창시절, 혹은 평소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우리가 상상한 스토리를 게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대부분 프로그래밍 단계에서 막혀버립니다. 글쓰기 좋아하는 친구와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친구가 의기투합해도, 이걸 '게임'이라는 형태로 만들 방법이 막막하거든요.
필자도 같은 이유로 오랜 기간 꿈만 꾸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케이스입니다. 취미로 글쓰고 그림만 그려봤지, C언어가 뭔지 C++이 뭔지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이었거든요.
▲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건 외계인의 교신 수단 아니던가요? 지구
언어 맞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게임 제작 툴입니다. 가까운 예로는 <RPG Maker> 시리즈를 들 수 있겠네요. 비단 RPG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게임 제작 툴이 있어 초심자의 진입 장벽을 낮춰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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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눈여겨본 툴은 Ren'Py(렌파이)라는 엔진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주얼 노벨 제작 툴이 일본어를 기반으로 해서 국내 PC에선 언어 코드 문제로 사용이 까다로운 반면, 이쪽은 영문을 기반으로 제작된 툴이기 때문에 언어 코드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고, 상업용 게임 제작에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렌파이의 기본적인 사용 방법 자체는 간단한 편이었습니다. 직접 스크립트를 작성해야 하긴 하지만, 스크립트 문법이 비교적 단순한 편이고 사용법도 쉽게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거든요. 공식 홈페이지의 가이드나 프로그램 내 튜토리얼, 국내 커뮤니티에 올라온 강좌 등을 참고해서 잠깐 써보니 이건 필자도 충분히 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만들고 싶은 게임과 그걸 현실화시켜줄 도구가 준비됐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꿈을 실행해 나갈 차례가 왔습니다.
# 일단 스토리를 쓰자! ...그런데 막상 쓰려니 어려워!
위까지의 내용이 게임 제작의 준비 단계였다면, 이제 1단계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스토리와 세계관 설정을 잡는 일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가 게임을 완성하기까지의 모든 단계 중 가장 오래 걸린 것이 스토리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몇년간 쓰다가 갈아엎기를 반복했거든요.
결말이 있는 한 편의 게임 스토리는 다르게 표현하면 단편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게임처럼 뒷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 수 없고, 확실하게 게임 하나로 완결이 지어지도록 써야 하기 때문에 무작정 스케일을 넓힐 수도 없죠.
많은 구상이 있었고, 일부는 전체 플롯을 짠 뒤 실제 작성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마물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된 나라에서 탈출하는 생존 스토리도 있었고, 어른들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 정치의 희생양이 된 어린 공주의 이야기도 있었고, 탈출한 실험체를 먼저 잡기 위해 여러 나라의 첩보원들이 암투를 벌이는 스파이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구상했던 것 중에는 무협지도 있었네요.
# 스토리가 완성되고 나니 새로운 고민... 18금? 전연령?
처음엔 단순히 '나만의 작품 세계로 구성된 게임을 만들어보자'로 시작했는데, 스토리를 완성하고 나니 새로운 욕심이 생겼습니다. 정말로 이걸 게임으로 완성하려면 못해도 몇개월은 걸릴 텐데,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팔리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요.
먼저 설명하자면 필자가 구상한 게임은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단 캐릭터부터 소수 취향이고, 스토리 분기도 없는 데다가, 유명 IP의 2차창작도 아닌 오리지널 작품이었죠. 심지어 완성된 스토리는 베드씬마저 생략한 전연령 버전. "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 게임을 살까"싶은 그런 조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