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전파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게임을 만난 곳은.
동그란 볼륨 같이 생긴 패드를 돌려가며 조종하는 '오트론 게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파상 아저씨가 어디선가 그 물건을 구해왔는데, 온 동네 주민들이 다 나와서 구경할 정도로 인기였다. 그런 물건이 신기할 수 밖에 없었던 70년대 말이었다.
'오트론 게임기'는 요즘 나오는 콘솔 게임기와 비슷하다. TV에 연결해, 패드를 돌리며 테니스 같은 게임을 했으니까. 그렇다고 여러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장된 서너 개의 게임만 하는 전용 게임기였다. 아마 오리지널은 미국 아타리의 '퐁'이었을 것이다. 전파상에서 본 것은 '퐁'을 베낀 ‘짝퉁’이었을 테고.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게임은 <스페이스 인베이더>다. 워낙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꽤 비싼 편이었다. 오락실에서 한 판을 하려면 100원. 떡볶이 한 접시가 50원 하던 시절 이야기다. 당연히 직접 플레이는 거의 못 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남 하는 것, 뒤에서 구경만 많이 했다.
PC를 처음 접한 곳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네 집. 그 친구 집에 샤프(Sharp)에서 나온 8비트 컴퓨터(MZ-80, 아래 사진)가 있었다. 지금도 '아이폰'의 애플이 핫이슈지만, 8비트 시절의 대세도 '애플2'였다. 삼보는 거의 베낀 물건을 팔았고, 당시 국내외 가전 회사들도 자사의 8비트 컴퓨터를 만들었다.
FM8(후지쯔), FC-100(금성), DPC-200(대우), SPC-1000(삼성) 등이 다 그런 종류였다. 당시 청계천 세운상가에 가면 애플 클론(복제품)들이 꽤 많았다. (애플 베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안 바뀌는 것을 보면, 애플은 훌륭한 회사인 것 같다.)
친구네 집에서 처음 만난 컴퓨터는 무척 신기했다. 열심히 그 집을 들락거리며, '나도 키보드 만지게 해줘'라고 사정했다. '베이직'(BASIC: 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nstruction Code)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언어로 내 첫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다. 간단히 덧셈이 되는 프로그램 정도.
하지만, 내 컴퓨터가 아니어서, 프로그램을 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신 게임을 더 많이 했다. 잠깐씩 만져보는 수준이었는데, 오락실에 나와있던 게임의 후진 복사판들이었다. <팩맥>이나 <스페이스인베이더> 비슷한 것들이 있었는데, MZ-80에서는 도트 그래픽이 안 되고, 화면에 글씨 밖에 출력이 안 됐다. 게임들도 그래픽 대신 글씨들이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애플2는 고등학교 때 친척 형 집에서 처음 만났다. 애플 하드웨어 짝퉁이었지만, 주말이나 방학 때 열심히 놀러 갔다. 애플 베이직으로 프로그램을 짰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맥 갖고 놀고 있다. 물론 요즘은 오리지널을 사서 하고 있지만. <팩맨> <로드러너> 비슷한 게임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내 내 컴퓨터 갖게 된 것은 대학 입학하면서였다. IBM PC XT(아래 사진). 그것도 IBM 오리지널은 아니었다. 청계천에서 애플을 베끼던 사람들이 8비트는 더 이상 아니다, 하면서 16비트를 베껴 만든 컴퓨터였다. 25년 전 그 때 가격이 100만 원이었다. 요즘 제일 싼 컴퓨터는 20만원 정도에 맞출 수 있는데, 그 당시 16비트 IBM PC 중에 100만 원이 제일 싼 것이었다. 당시 100만 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우리 집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귀한 물건이었다.
이 컴퓨터로 대학교 1학년 때 생애 첫 게임을 만들었다. 당시 '터보파스칼'이라는 프로그램 언어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제작한 <자동차 경주게임>이었다, 고는 하지만, 예전 오락실에 있던 게임을 베낀 간단한 프로그램이었다. 화면을 좌우로 나누고, 왼쪽에서 흘러내리는 자동차를 피해가고 조종하면, 오른쪽에 점수를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흘러내리는 자동차의 속도가 빨라져서 결국 죽게 된다. 오른쪽에는 그 동안 흘러간 자동차의 수를 표시해줬다.
도트도 직접 찍어가며 자동차도 직접 만들고, 숫자도 그렸다. 과 친구들에게 다 나눠주고 해보라고 했다. 플로피 디스켓 한 장짜리 게임이었다. 당시 PC는 본체에 플로피 디스켓 2장을 읽게 돼있었다. 위에 파스칼 디스켓 넣고, 아래에 게임 디스켓을 넣어야 실행이 됐다. 왜 이런 것 만들었냐는 부류도 있었고, 약간 신기해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후 C언어를 혼자 공부하게 됐다. 1학년 동안 학교에서는 파스칼만 가르쳤는데, 정작 숙제는 C로 프로그램을 짜오게 시켰다. 1학년 겨울방학 때, C언어를 마스터 하려면 게임을 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아래 이미지)를 C언어로 짜게 됐다. 게임의 대명사이기도 했고,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생생하기도 했으니까. SD풍의 문어를 예쁘게 그리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도트를 하나하나 찍어 가며 겨울방학 동안에 2~3달 걸려 대충대충 완성했다.
당시에는 장래 계획이나 그런 것이 없었다. 나중에 뭐 하고 살까 그런 생각 전혀 하지 않았다. 게임 만들어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전혀 안 했다.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고등학교 교육 받으며 대학 오면, 인생을 고민하고, 존재에 대한 고민도 하는 게 당연한데, 한국 교육의 모범생인 나는 국영수 점수 잘 받는 공부∙고민만 해서 장래 고민은 안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처럼 취업을 고민할 필요가 없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때그때 관심분야가 달라졌다. 3~4학년 때의 관심은 온통 한글 에디터, 한글 워드프로세서로 옮겨갔다. 기본적으로 개발자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만들고 싶어한다. 컴퓨터가 있으니 한글로 리포트 써서 내고 싶은데, 당시 워드프로세서는 삼보에서 외국 소프트웨어 기능을 수정해 내놓은 <보석글> 밖에 없었다. <아래아 한글>이 나오기 전이었고, 나도 무언가 만들고 있었다. 2년 가까이 한글 폰트도 그리고 있었고, 한글 에디터도 만들고 있었다.
그때 <아래아 한글>이 나와서 그런 니즈를 해결해 버렸다. 혼자 만들어봐야 이것(<아래아 한글>)보다 더 잘 만들 수 없겠다 싶어서 포기했다.
당시 우리 학교 컴퓨터공학과는 졸업 후 바로 취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부분 더 연구하는 것을 많이 선호했다. 실제로 7할 이상의 졸업생은 대학원 진학을 택했다.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은 사회적 환경도 있었고, 대기업 입사에 대한 두려움 같은 심리적인 요인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대기업 들어가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싫었다. '대기업 입사해서 10~20년 다녀 부장 해봐야 별 비전 없다, 인생 종친다' 이런 분위기 탓도 있었던 것 같다.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겠지만, 장래가 고정되는 것을 회피하고, 유보 상태로 남겨놓기 위해 대학원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에 이야기했지만, 대학 졸업할 때까지 인생 고민 같은 것을 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교육 시스템이 엉망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진학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대학원만 있던 카이스트는 학비가 면제됐고, 용돈도 줬다. 서울대 대학원도 실질적으로는 학비가 안 들어가긴 했지만, 카이스트는 무료 기숙사가 매력적이었다. 혼자서 살 수 있는 공간의 확보가 가능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