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트렌드 변화에도 스토리 게임은 꾸준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좋은 스토리 게임을 즐기려다 보면, ‘언어 장벽’이 발목을 잡을 때가 많다. ‘스토리 게임’을 온전히 즐기려면 언어 이해가 필수이기 때문에 해당 언어 숙달자가 아니라면 플레이를 아예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스토리 게임’은 번역이 가장 어려운 게임 유형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절대적 양이 많고 ▲화자 간의 관계나 대화 상황 등 맥락을 잘 알지 못한 채 번역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여러 작업자가 동시에 작업해 용어 및 문체 통일이 귀찮아지는 등, 난점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스토리 게임은 한국어를 공식 지원하지 않는 경우가 조금 더 잦은 편이다.
그렇지만 게이밍 문화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게이머 중에도 전문적 로컬라이징 작업이 가능한 프로그래밍, 번역 인재들이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유저들의 자발적, 조직적 참여로 많은 게임의 한국어 번역이 이뤄지고 있다.
좋은 평가를 받은 해외 스토리 게임 중 일반 유저들의 노력을 통해 한국어 번역이 이뤄진 사례들, 그리고 아쉽게도 아직 번역이 안 돼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하는 수작 게임들을 몇 가지씩 꼽아 보았다.
유저 번역 작업이 ‘정식 번역’으로 채택된 다소 특수한 사례다. 과거 본지 인터뷰에 따르면 번역을 진행한 ‘팀 왈도’는 개발사 ZA/UM에 번역 허가를 받으려다 아예 본격적 지원을 받게 됐고, 덕분에 방대한 분량의 번역을 빠르게 해낼 수 있었다.
*팀 왈도는 고정 멤버들로 구성된 팀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프로젝트팀’의 성격을 띤다. 누구나 ‘팀 왈도’라는 이름 아래 번역에 착수할 수 있다. 다만 여러 프로젝트에 중복으로 참여하는 멤버들도 간혹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기억을 잃은 주정뱅이 형사가 되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RPG 어드벤처 작품이다. 주인공 내면의 정신적 특성들이 각각 별개 인격처럼 상황에 따라 주인공에 말을 걸어오고, 이들과의 대화에 따라 퀘스트가 진행되는 독특한 구성을 띈다.
사상, 철학, 정신 과학적 관념들이 이야기 얼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텍스트가 때로 난해해지고는 한다. 쏟아지는 활자의 막대한 양만 보더라도 번역팀의 노고에 절로 감탄하게 되는 작품. 번역팀은 번역문이 인게임 대화 맥락에서 어떻게 보일지 확인할 수 있는 전용 프로그램인 '대화문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활용하는 등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작품 고유의 황폐해진 누아르 적 분위기, 일부러 두서없이 쓰인 주인공 내면의 대화 어투 등이 번역문에 잘 반영됐다는 평가. 간혹 매끄럽지 않게 읽히는 문장들이 있지만, 원문 자체의 복잡성 때문일 경우가 많다.
<스틱 오브 더 트루스>와 <프랙쳐드 벗 홀>은 20년 넘게 방영 중인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우스 파크> IP에 기반한 RPG다. <사우스 파크>는 주로 미국의 다양한 사회현상, 유명인, 사건·사고를 풍자하는 수위 높은 성인용 블랙코미디로, 현지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콘텐츠다.
그뿐만 아니라 장수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하기에 시리즈를 꾸준히 즐겨온 유저만 이해할 수 있는 ‘인사이드 조크’가 많고, 그 외에도 상당히 뒤틀린 센스의 유머나 말장난이 많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국내의 <사우스 파크> 인지도는 그다지 높지 않고, 팬도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유저들의 힘으로 번역이 이뤄졌다는 점이 인상적.
번역팀은 <사우스 파크>의 작품 특징(?) 중 하나인 끊임없는 비속어를 최대한 비슷하게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정식 번역물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의 수위 높고 다양한 욕설이 나온다. 덕분에 '원작 감성'이 잘 전달되는 편. 일부 언어유희는 괄호 안에 역자주를 달아 설명해주는 등 친절함을 발휘했다.
게임으로서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스틱 오브 더 트루스>는 원작 특유의 황당한 유머와 자체적인 ‘밈’ 활용에 더해 RPG로서의 재미를 갖춰 단순한 ‘팬 게임’ 이상의 플레이 가치를 지녔다는 평가다(스팀 유저평가 ‘압도적으로 긍정적’). 반면 후속작 <프랙쳐드 벗 홀>(Fractured But Whole)은 스토리 및 플레이 모두 전편에 비해 다소 둔해졌다는 비판이 있다.
2014년 출시된 액션 RPG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은 스토리와 대화를 중시한 게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플레이타임은 150시간, 대사량은 100만 단어에 달한다.
이런 막대한 작업량 때문일까? 무려 7년의 기다림 끝에 지난 6월에 비로소 한국어 패치가 배포돼 화제를 모았다.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은 과거에도 번역 시도가 있었고, 미완 상태의 번역이 나돌면서 유저들이 아쉬움을 표했던 적도 있다.
이번 번역 버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어투가 적절히 사용됐고, 다양한 용어의 통일과 정리가 이뤄져 몰입을 깨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전체 분량이 워낙 많아 최종 완성을 위한 검수 작업이 아직은 필요한 상태로 보인다. 패치를 제작한 팀 왈도 공식 블로그에 따르면 6월 말 기준으로 검수자를 모집했고, 향후 검수 버전 패치도 배포할 예정이다.
<드래곤 에이지>는 EA 산하 바이오웨어가 개발한 오리지널 판타지 시리즈다. 장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동료들의 흥미로운 개인사와 긴박한 메인 스토리가 어우러지는 전성기 바이오웨어의 작품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드래곤 에이지 인퀴지션>은 극찬받았던 1편과 평가가 곤두박질쳤던 2편에 이어 출시된 세 번째 작품이다. 높은 완성도로 2편의 흥행 참패를 극복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4년 기준 여러 매체에 의해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코옵 액션 어드벤처 게임 <잇 테이크 투>로 스타덤에 오른 개발사 ‘헤이즈라이트’의 2018년 작품이다. 교도소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자가 함께 탈옥을 감행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잇 테이크 투> 흥행 이후 헤이즈라이트 대표 조지프 파레스는 ‘게임은 스토리 매체’라는 소신을 여러 인터뷰에서 강하게 밝혔는데, <어 웨이 아웃>에서도 이런 개발 철학이 드러난다. 메카닉적 측면에서의 핵심 콘텐츠는 ‘코옵’과 ‘액션’이지만, 두 인물의 성격차와 입장차를 드러내는 끊임 없는 대화가 게임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을 이룬다. 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게임을 절반밖에 즐길 수 없다.
다만 스토리에 힘을 잔뜩 준데 반해 그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뚜렷한 주제 의식으로 찬사를 받은 <잇 테이크 투>와 달리, 상투적인 줄거리와 캐릭터 연출로 인해 ‘B급 할리우드 범죄 영화 같다’는 비판까지 들었다.
이처럼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 때문에, 대사 역시 분량은 많지만 내용은 직선적이고 어렵지 않다. 번역에서도 평어와 존대가 간혹 섞이거나 직역 어투가 보이는 등 마감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은 있으나, 게임 플레이에는 지장을 주지 않고,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도 않는다.
베데스다 소프트웍스는 <스카이림>, <폴아웃 4> 등 자사 게임 상당수에서 한국어를 정식 지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극적인 모딩 지원과 대규모 팬덤의 힘 덕에 주요 작품들은 유저 한국어 패치가 제작되어왔다.
특히 2015년작 <폴아웃 4>의 경우, ‘팀 왈도’의 이름 아래 수백 명이 모여 번역 작업을 진행하면서 화제가 됐다. 중간중간 작업을 방해하는 ‘트롤’까지 등장했고, 미검수된 번역물을 누군가 유출하는 사고까지 일어났지만 결국 공통된 노력 끝에 한 달여 만에 본편 전체 번역을 완수하는 성과를 이뤘다.
<폴아웃 4>는 오픈월드 RPG 장르답게 다양한 상황이 펼쳐지고, 이에 맞춘 여러 가지 캐릭터간 상호작용 대사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번역 검수에서 이런 상황을 일일이 재현하기란 힘든 일이어서, 이 중 일부는 맥락에 맞지 않거나 어색하게 번역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 대화나 문서는 모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플레이나 감상에 결정적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발더스 게이트 3>
서양 RPG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리즈 중 하나로 꼽히는 <발더스 게이트>의 최신작이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시리즈로 명성을 쌓은 라리안 스튜디오가 제작을 맡아 더욱 화제를 모았다. 아직은 얼리억세스 단계로 게임 초반 챕터만 공개됐지만, 꽤 많은 분량을 플레이할 수 있다. 공식 한국어 지원은 없으며, 기계 번역을 활용한 유저 패치만 나와 있는 상태.
<웨이스트랜드 3>
<폴아웃>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고전 <웨이스트랜드>의 후속작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적 재미에 충실하고 RPG로서의 완성도가 높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국어판이 존재하는 2편보다 판매량이나 흥행성적이 좋지만, 아직 공식/유저 번역 소식이 없다.
<더 포가튼 시티>
게임 모드로서는 이례적으로 AWGIE Awards(호주 작가조합 시상식)에서 수상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은 <스카이림>의 인기 모드 <더 포가튼 시티>의 독립 버전이다. 원작의 경우 유저들이 모여 한국어 패치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다. 이번 작품도 유저 번역이 이뤄질지 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