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날'은 있습니다. '만화의 날'도 있습니다. '게임의 날'은 없습니다.
속상합니다. 게임의 날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역사나 매출 등을 따지며 구구절절 근거를 댈 필요는 없겠죠. 바로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게임의 날'이 생긴다면 언제가 좋을까요?
문화 콘텐츠 선배인 영화와 만화 쪽에서 힌트를 얻어 보겠습니다.
지난해는 한국 영화 100주년이었습니다.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많이 이야기했죠. 덕분에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됐습니다. 한국 영화의 시작은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의리적 구토>로 칩니다. 영화인협회는 1963년부터 이 날짜를 영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만화의 날은 유래가 좀 다릅니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1990년대 중반 청소년 보호라는 명목으로 만화를 유해매체로 지정하고, 사전 심의와 서점 유통 금지 등 제재가 심해졌습니다. 1996년 11월 3일 만화인들은 여의도에 모여 '만화 심의 철폐를 위한 범 만화인 결의대회'를 열었죠. 이듬해 이 날짜를 기념해 '만화의 날'로 정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01년 정부 공식 기념일로 인정받았죠.
게임의 날도 한국 게임계에 의미있는 날을 골라 정하는 게 타당할 듯합니다. '최초'나 '역사적인 분기점'에 해당하는 날이 좋겠죠.
여기 여섯 개의 후보가 있습니다.
1992년 SKC가 유통했던 <폭스레인저>(소프트월드)는 '첫 국산 게임'이라고 광고를 많이 했습니다. 흥행에 크게 성공한 덕분에 <폭스레인저>는 이후 '최초의 국산 PC게임'이라는 인식을 심어줬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초 아마추어 개발자가 자신이 만든 게임을 소규모로 판매한 사례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문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거죠. 따라서 <폭스레인저>에게 '최초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IBM PC가 아닌 애플 컴퓨터 기반으로는 한참 전인 87년 출시된 RPG <신검의 전설>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날이 더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게임 역시 출시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죠.
특정한 게임이 아닌 게임업계와 게이머가 다 모였던 첫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날입니다.
연혁을 올라가 보면, 지스타(2005년~)가 열리기 전 카멕스(2000~2004년)가 있었습니다. 카멕스 전에는 어뮤즈월드가 있었죠. 1995년 12월 16일 첫 행사가 열렸죠. 카멕스의 영문명(Korea Amuse World Game Expo)이 이 행사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어뮤즈월드의 한글명은 '한국 게임기기 및 소프트웨어전'였습니다.
다만, 당시 이 행사는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게임쇼와는 다릅니다. 아케이드 관계자들이 주최로 열렸고 주로 오락실 게임들이 대세였죠. <바람의 나라>가 나오기도 전이었고, PC게임 산업의 규모도 크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이런 한계를 감안해 지스타가 열리는 '11월 둘째 주 목요일'이 게임의 날 후보가 될 수도 있겠네요. 만화 업계에서 매년 만화의 날 전후로 각종 행사가 개최되는 예도 있으니까요.
한국 게임의 역사는 온라인게임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바뀝니다. 온라인게임 시대, 그 시초가 되는 게임은 <바람의 나라>(넥슨, 1996년)입니다. 한국 최초의 MMORPG이자, 상업적으로 서비스된 세계 최초의 MMORPG이기도 하죠.
20세기 국내 PC게임은 미국, 일본은 물론 대만 게임에 비해 경쟁력이 뒤졌습니다. 영화와 비디오에 이어 게임에 손을 뻗쳤던 삼성이나 SK 등 재벌들도 주로 해외 PC게임 유통에 주력했죠. PC통신에서 머드게임의 성공을 확인한 송재경과 넥슨은 미지의 '그래픽 머드'의 세계로 가장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한국 게임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아니, 세계 게임의 역사도 크게 변화했습니다.
한국 게임 생태계는 <리니지>(엔씨소프트, 1998년) 이후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리니지>는 최초의 윈도우 기반 온라인게임이었고, 확산되던 PC방을 통해 기존과 전혀 다른 규모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동시접속자 1만, 10만, 20만, 30만의 벽을 최초로 허물며 게임 대중화의 문을 열었죠. 해외로 수출됐고, 대만 국가 인터넷망을 두 번 다운시킬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보여줬습니다. 게임 한류도 이끌었죠.
<리니지>가 나오기 전 사정은 끔직했습니다. '온라인게임, 그게 뭔데?' 당시 투자자들은 온라인게임을 무시하고 외면했습니다. <리니지>의 성공 이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인재와 자본이 온라인게임 쪽으로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PC방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한국 게임 생태계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와 분위기가 형성됐죠. <라그나로크>, <뮤> 등이 그런 토대 위에서 개발됐습니다.
<카트라이더>(넥슨)는 카카오톡 이후 <애니팡>이 나오기 전, '국민게임'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게임입니다. 2000년대 초반 PC방의 절대 강자는 <스타크래프트>였습니다. <카트라이더>가 2004년 이날 PC방 점유율에서 처음으로 영원한 강자<스타크래프트>를 제쳤습니다.
<카트라이더> 성공 역시 <리니지>처럼 더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초고속 통신망의 시대를 맞아 수많은 캐주얼 게임이 나왔고, 부분유료화 모델이 안착했습니다. 게임생태계 차원에서는 개발사 창업, 퍼블리싱 모델 정착, 투자 증가 등 선순환 효과가 생겨나 2000년대 중반 한국 게임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게임을 전문으로 다루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법 체계에서는 일종의 '기타 항목'이나 다른 문화 콘텐츠와 묶음으로 취급됐죠.
게임은 원래 '유기장법'에 속해 있었습니다. 1973년 개정된 유기장법 시행규칙에 '전자유기시설'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죠. 오락실 정도를 생각하면 맞을 겁니다. 이후 이 법은 '공중위생법'에 통합됩니다. 게임의 신세가 위생의 관리 대상인 거죠. 그나마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9년 '음반, 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위생 관리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리니지>와 <카트라이더> 등의 성공으로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2006년 4월 28일 게임을 전담으로 다룬 법안이 제정됐죠. 제정 이후 시행도 하기 전에 개정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날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제가 생각해본 '게임의 날' 후보들입니다. 이 밖에도 다른 추천할 만한 날이 있다면 꼭 댓글 달아주세요. 언젠간, 조만간 '게임의 날'이 반드시, 기필코, 꼭 생길 테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날이 '게임의 날'이 됐으면 좋겠습니까? 공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