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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칼럼] 2022년 10월 29일, 시뮬레이션 게임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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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우티) 2022-11-04 18:11:00
사고 현장으로부터 2km 떨어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그곳에서 자주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 골목은 과장 조금 보태서 100번도 넘게 지나다녔던 길이다. 성인이 된 뒤로부터는 그곳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녀석들이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며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는 데'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 오후에는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마침 박물관 앞 공원에서는 'K-귀신잔치'라는 행사가 열렸다. 요즘 유행하는 스티커 사진 촬영기가 있었고, 푸드트럭이 영업 중이었고, DJ가 음악을 틀고 있었고, 핼러윈 분장을 해주는 부스가 있었다. 바로 옆 용산가족공원에서도 국제학교 아이들이 코스튬을 입고 파티를 즐겼다.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 한 방이면 해결되는 합리적인 코스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물관에도 대단히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얌전히 한강을 넘어가 노량진에서 회 한 접시 먹고 귀가했다. 사람을 피해 간 노량진에도 수협 창립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고, 초장집에 자리가 없어서 하마터면 회를 먹지 못할 뻔했다.

회에 곁들인 소주에 얼큰하게 취해 자고 일어났더니 안부를 묻는 연락이 가득 쌓여 있었다. 보기 싫은 것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전시됐고, 보기 괴로운 것들은 한없이 읽기 힘들었다. SNS에 아는 사람과 건너 아는 사람의 생존기와 부고가 보였다. 꼴값을 떠는 것 같아도 충격에 빠져 멍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 슬픔의 기간이 11월 5일까지로 한정되지 않을 듯하다. 또 나의 직업적 자아는 게임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감상에 빠지는 것보다 게임 이야기라도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2022년 10월 29일 오후 5시 16분의 용산가족공원. 멀리 보이는 사람들은 핼러윈 파티를 즐기는 국제학교 아이들과 그 가족.

# 안전에 적당히는 없다

<911 오퍼레이터>는 도시의 마스터가 되어 빗발치는 각종 범죄와 응급 사고를 해결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인력을 고용하고 사건의 경중을 파악해 경찰관, 구급대원, 소방대원을 보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약파티에 대한 신고를 접수하면 위치를 파악하고, 적당한 조처를 내려서 사고를 수습해야 한다. 그러니까 화재 용의점 없는 마약파티라면 굳이 소방대원은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게임을 하면 할수록 사고는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오고, 플레이어는 필연적으로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과속 주행 중인 차량' 1대 정도는 '무시하기'나 '대기'를 고르고 현재 남아있는 요원들을 보다 요긴한 데 보내 보다 급한 불을 끌 수 있다. 유선상으로 소화기 사용 요령을 일러주어 문제가 해결된다면 최상이겠지만, 게임 월드에는 인력을 보내야 할 수준의 사건들이 계속 접수된다.

<911 오퍼레이터> (출처: 스팀 페이지)

대형 사고는 여러 곳에서 한정된 인력을 보내며 게임을 플레이할 때 접수된다. 어느 순간 게임이 편해졌을 때,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고들이 지루할 즈음, 대형 사고가 나타난다. 플레이어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시험의 순간이다. 큰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았지만 관리 중인 모든 소방차가 다른 지점에 출동했다면, 플레이어는 하릴없이 화마가 빌딩을 덮치며 걷잡을 수 없이 큰 피해가 발생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이 게임은 일상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트롤리 딜레마'를 도전과제로 여기고 당연시하는 것보다  어떠한 피해라도 발생시키지 않는 쪽으로 시스템을 운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911 오퍼레이터>는 돈을 벌어서 강해지는 게 목적인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형 사고를 똑바로 수습하지 못하면, 플레이어의 평판(Reputation)은 바닥까지 떨어져 해고, 게임 오버를 맞게 된다.

<911 오퍼레이터> (출처: 스팀 페이지)

 

# 효율의 동선, 유한의 동선

공간의 성공적인 운영을 목표로 기획된 타이쿤 장르에서는 동선 관리가 대단히 중요하다. 타이쿤 게임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롤러코스터 타이쿤>에서 플레이어는 어떻게 하면 고객들에게 기념품과 먹거리를 다 많이 판매할 것인지, 또 어떻게 하면 놀이기구에 줄을 잘 세울지를 끝없이 검토해야 한다. 거기에 통달한 몇몇 플레이어들은 기상천외한 모습을 선보이며 재미를 주기도 한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에는 관객들의 충돌 방지 요소 같은 기능이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각형 한 칸에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관객을 집어넣고 놀이공원의 가로와 세로를 구획하는 것이 효율적인 공략법으로 여겨진다. 현실과는 다른, 게임적 허용이다.

간혹 어지러운 놀이기구를 탑승한 관광객들은 욕지기를 호소하며 길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토를 하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현장을 빠져나가곤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청소부를 고용해 바닥의 오물을 잘 치워야 한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에는 기술자, 안전 요원, 광대(엔터테이너) 등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을 적당한 곳에 모자라지 않게 배치해야 놀이공원을 잘 가꿀 수 있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파키텍트>는 <롤러코스터 타이쿤>으로부터 지대한 영감을 받은 건설&경영 시뮬레이션이다. 마찬가지로 테마파크를 꾸미는 게임인데, 이 게임에서는 동선 관리의 중요성이 보다 커졌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의 직원들은 놀이공원이 열려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지만, <파키텍트>의 직원들은 무한정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키텍트>에서는 보다 섬세한 길 구획이 요구된다.

직원들이 쉴 수 있게끔 휴게소가 있어야 하고 그곳까지 가기 위한 길을 잘 짜줘야 효과적인 운영이 가능하다. 게임에는 물류 시스템까지 구축되어있다. 특정 직원의 동선이 관람객의 동선과 똑같을 경우, 손님들의 불만이 쌓일 수 있으므로 직원 전용 통로가 있어야 한다. <파키텍트>도 한 칸에 무한에 가까운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좁은 길에 많은 인원을 몰아넣으면 장식 점수에 악영향을 미쳐 어려운 시나리오를 깨기 어려울 수도 있다.

<파키텍트> (출처: 스팀 페이지)

# 모든 것은 정치가 된다

'데모크라시' 시리즈는 어느덧 4편까지 나온 장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2020년 10월 스팀에서 최신 버전이 나왔는데, <데모크라시 4>는 스팀에서 '매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고, 한국어 자막을 지원한다.

<데모크라시 4>에서는 '닭튀김'을 좋아하는 '근면'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국을 플레이할 수 있다. '해결되지 않은 대북 긴장'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예비군 규모'와 '가장 많은 고등학교 졸업자'는 물론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보유한 덕인지 꽤 플레이하기 쉬운 국가에 속한다. 정말이다.

<데모크라시 4>. 한국인들이 '닭튀김'을 좋아하는 건 무슨 수로 알았을까?

게임에서 대한민국을 선택할 때 디버프로 '호흡기질환'이 존재하는데, 이는 봄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미세먼지에 관한 표현으로 보인다. 플레이어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나무를 심고, 자동차의 사용과 같은 공해를 줄여야 한다. (아쉽게도 옆 나라에 으름장을 놓아서 호흡기질환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 자본가들과 운전자들은 '호흡기질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결정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다.

게임 속 국민에게는 자본주의자, 중산층, 환경주의자, 노동조합원, 농민과 같은 정체성이 있다. 플레이어는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인기'를 유지하며 나라 살림을 책임져야만 한다. 언제나 그렇듯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힘든 일이다. 농민은 좋아하지만 환경주의자는 싫어하는 정책이 있고, 자유주의자는 좋아하지만 애국주의자는 싫어하는 정책이 있다.

<데모크라시 4>는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연결된 거미줄을 다루는 게임이다. 부자를 위한 세금을 감면하면, 부자들은 좋아하지만 세수는 줄어들고 빈곤층은 분개한다. 만성적인 적자 속 민영화를 통한 수입은 달콤한 유혹이지만, 국민들은 그 결정에 크게 실망할 것이다. 플레이어는 정책 결정자로 외교, 국방, 경제, 사회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고 내각을 관리해야 한다.

<데모크라시 4>는 인기를 유지하며 나라를 성공적으로 굴리는 게임이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정치'로 수렴된다.

<데모크라시 4>에서 국가는 어디에서나 작동하고 있다. 모든 것은 정치가 되고, 게임은 턴마다 플레이어의 결정에 책임을 묻는다. 국가의 공백은 곧 플레이어의 실책이다. 그러한 치명적인 실수가 반복되면, 국가는 망가지고, 플레이어의 지지율은 떨어져 게임은 끝나게 된다. 국가의 치안이 붕괴될 정도로 '막장' 운영을 했다면, 범죄 조직에 암살될 수도 있다.

현실에서도 모든 것은 정치가 된다. 2022년 10월 29일 오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5,489명의 시민이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비위에 대한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며 신분증을 들고 줄을 섰다. 정치적 행위라고 부름 직하다. 이 '정치적 행위'의 결과로 감사원은 '자체등급분류 게임물 통합 사후관리 시스템 구축 사업'을 감사할 것인지 심사하고 그 결과를 알려야 한다.

지난 주말의 사고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 신고는 언제 접수되었는지 ▲ 현장은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 국가는 무엇을 했는지 같은 주제는 어떻게 이야기하든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사고를 그렇게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면, 이런 말이 있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그랬다.

2022년 10월 29일 오후, 게임위 감사 서명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출처: 이상헌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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