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갈래처럼 여겨지는 ‘블록버스터’는 원래 마케팅 용어다. 잘 알려져있듯 ‘한 블록을 모두 파괴하는 위력의 폭탄’을 의미하던 미국식 표현이 어원이다. 영화계에서는 1943년 미국 전쟁 영화 <봄바디어>의 광고 문구에 삽입된 것을 최초 용례로 본다. 이후로 영화 산업 내에서 완전히 굳어진 표현이 됐다.
블록버스터 영화 업계는 ‘돈을 쓸수록 영화가 더 볼 만해진다’는 논리로 무장하고 있고, 마케팅에도 이런 접근을 활용한다. ‘제작에 1,000억이 들었는데 영화가 지루할 리 없다’는 식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영화의 ‘볼거리’로서의 가치에 집중한 이 마케팅 전략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꽤 잘 먹히고 있다. 세계에서 블록버스터를 제일 잘하는 감독 제임스 카메론(역사상 최고매출 영화 3편중 2편이 카메론 영화다)의 <아바타 2>는 2022년을 지나 2023년 1월 현재까지 몸소 그 유효성을 증명 중이다.
게임 산업에서 ‘블록버스터’에 대응하는 단어를 찾는다면 단연 ‘트리플A’다. 영미권에서는 아예 트리플A 대신 ‘블록버스터 게임’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두 분야의 생리는 서로 닮았다. 막대한 돈을 들인 화려한 결과물로 대중을 끌어모으고, 여기서 다시 막대한 돈을 버는 사이클을 통해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블록버스터’라는 단어의 힘은 예전만 못하다. 심지어 마케터들은 이제 이 단어를 잘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제작비가 담보하는 재미’라는 신뢰 자산을 상당 부분 탕진한 결과다. 다소 걱정되는 것은 일부 트리플A가 블록버스터의 전철을 따르는 듯하다는 점이다. 2022년의 트리플A, 뭐가 문제였을까? 2023년 라인업에는 어떤 기대를 걸 수 있을까?
먼저 다소 모호한 ‘트리플A’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제작비 얼마부터는 트리플A’라는 식의 기준은 없기 때문에, 흔히 메이저 제작사가 수백~수천만 달러, 더 나아가 수억 달러 단위 예산을 들어 만드는 게임을 트리플A로 부르고는 한다.
트리플A 게임들의 제작 비용이 늘 공개되는 건 아니다. 다만 유명 사례를 통해 범주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는 있다. <사이버펑크 2077>의 제작비는 마케팅비 제외 1억 7,400만 달러(약 2,212억 원)로 알려져 있다. 10년 전 게임인 다이스의 <배틀필드 4>에도 1억 달러(약 1,272억 원)가 들었다. 이런 극단적 사례를 제외한다면 4,000~6,000만 달러가량을 쓴 게임들이 주로 언급되고 있다.
2022년에는 <고스트와이어 도쿄>, <모던 워페어 II>, <고담 나이트>, <다잉 라이트 2>, <세인츠 로우>, <엘든 링>, <칼리스토 프로토콜>,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등 게임이 규모, 분량, 퀄리티 면에서 트리플A 타이틀로 이야기되었다. 대부분 액티비전, 워너브라더스, 크래프톤 등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유명 게임사들의 작품이다.
이중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엘든 링> 등은 상업적 성공과 평단의 호평, 게이머들의 호의를 모두 거머쥔 케이스다. 다른 한편으로 게임 평가는 갈렸으나 판매에선 호성적인 케이스도 있다. 거듭된 출시 연기로 불안을 안겼던 <다잉 라이트 2>는 출시 한 달 만에 500만 장 판매 기록을 올리면서 손익분기에 도달했다.
‘내놓으면 팔리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최신작 <모던 워페어 II> 역시 소비자 반응(특히 싱글플레이 평가)에서는 호불호가 나뉘었으나 판매에선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는 성과를 보여줬다. 출시 후 3일 만에 8억 달러(약 1조 160억 원), 10일 만에 10억 달러(약 1조 2,702억 원)를 벌어들였는데, 이것은 시리즈 중 가장 빠른 판매 속도다.
몇몇 트리플A 타이틀은 사업 성공 여부가 겉으로 잘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트리플 A 게임은 막대한 투자로 만들어지는 만큼 뚜렷한 시장 성과가 있을 경우 개발사 차원에서 대외적으로 크게 알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아무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타이틀이라면 조심스럽게 중간 이하의 성적을 추정해볼 만하다.
실제 2022년에도 성과가 뚜렷하지 않던 몇몇 트리플A 타이틀이 ‘사업 실패’의 징후를 내비친 바 있다. 전문가 평점 60점대를 기록한 <세인츠 로우>의 퍼블리셔 엠브레이서 그룹 CEO는 실적 발표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뒀다”고 털어놨다. 10월 출시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은 <고담 나이트>는 출시 한 달 만에 40% 세일 행사를 단행하면서 간접적으로 게임의 흥행 현황을 드러냈다.
9개 게임 중 최소 6개가 시장에서 ‘괜찮은’ 실적을 거뒀다는 사실은 외려 트리플A의 건재성을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2022년의 트리플A 라인업에는-이전 연도의 트리플A 게임들과 마찬가지로-겉으로 잘 보이지 않는 몇 가지 문제가 도사려 있다. 새로운 이슈가 갑자기 돌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며 반복 지적되는 문제들이 개선 없이 또 답습되고 말았단 점에서, 2023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 한 번 되짚어볼 만하다.
앞서 말했듯, 블록버스터는 ‘최소한의 볼거리 보장’이라는 긍정적 인식 덕에 일정량의 흥행을 깔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블록버스터 산업의 기본 동력이기도 하다. 동일한 원리로 트리플A 역시 막대한 자금으로 만들어진 만큼, 최소 수준 이상의 플레이 경험을 제공한다는 신뢰가 장사의 중요한 밑천이 되어줬다.
따라서 이런 신뢰에 금을 가게 만드는 이슈는, 해당 게임뿐만 아니라 트리플A 카테고리 전반의 기본 동력을 해치는 요소로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트리플A가 거의 반드시 7~8만 원을 호가하는 ‘풀프라이스’ 가격에 판매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 영역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는 바로 퍼포먼스 저하, 버그 등 기본적인 퀄리티 이슈다. 2022년의 경우 <고담 나이트>, <칼리스토 프로토콜>은 물론 ‘올해의 게임’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엘든 링>마저 해당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세 게임 모두 너무 늦지 않게 패치를 통해 문제를 개선한 것은 맞다. 그러나 대규모 예산과 시간, 인력을 투입하고도 걸러내지 못한 품질 문제에 다시금 유저들의 머릿속에 의문 부호가 찍히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더욱 궁극적인 차원에서 트리플A의 신뢰 자산을 깎아 먹은 문제가 있다면 몇몇 게임의 콘텐츠적 부실함, 더 나아가 근본적인 재미 이슈다.
<세인츠 로우>는 평점 종합 사이트 오픈크리틱 기준 149명의 평론가 중 절반이 안 되는 37%에게서만 추천을 받았다. 평점 평균도 63에 불과하다. 평론가들이 직접 입을 열어 지적한 단점을 살펴보면 더욱 뼈아프다. 재미있는 구간이 ‘더러’ 있지만, 수 시간 만에 질려버린다는 평가다. 기본적인 월드 비주얼과 스토리적 개연성은 기본에 못 미친다는 혹평도 뒤따른다.
마찬가지로 오픈크리틱에서 추천율 43%, 평점 평균 69점을 기록한 <고담 나이트>의 사정도 별다른 것이 없다. 루팅, RPG, 코옵 등 인기 있는 메카닉을 여럿 추가해 <배트맨: 아캄> 시리즈로부터의 탈피를 노렸지만, 정작 게으른 디자인으로 인해 이것이 실제 게임플레이에 어우러지지 못하면서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칼리스토 프로토콜>을 향한 비판에서는 콘텐츠 빈약에 관한 불만이 자주 포착된다. 근접전투를 강조하면서도 근접 무기가 한 종류뿐인 점, 중력 무기 ‘그립’의 활용도가 너무 높은 점, 전체 분량이 짧고 적의 종류가 한정된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아쉬움을 표하는 유저들이 많다.
비판의 기저에 깔린 것은 트리플A의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는 불만이다. 위 게임들은 모두 트리플A라는 이유로 일반적 수준의 풀프라이스 가격(7만 원가량)이 책정되어 있다.
한편 앞서 언급된 9개 게임을 하나씩 살펴봤을 때는 눈에 띄지 않으나 전체 구성을 살폈을 때 파악되는 또 하나의 이슈가 있다. 이들 중 ‘완전히 새로운’ 타이틀이 거의 없다는 점.
<모던 워페어 II>, <다잉 라이트 2>, <세인츠 로우>,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는 기존 게임 시리즈의 직접적인 후속작이거나 리부트 작품이다. <고담 나이트>, <칼리스토 프로토콜>, <엘든 링>은 신규 게임이기는 하나, 역시 이전 유명 IP의 인기와 명성을 많은 부분 활용했다. 완전히 새로운 작품은 <고스트와이어 도쿄> 하나로 압축된다.
'리스크 감수'를 극단적으로 회피하는 트리플A의 제작 관행이 갈수록 심화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막대한 제작비가 고스란히 리스크로 작용하는 트리플A 게임 시장에서 과도한 모험을 피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인기가 입증된 기존 IP의 직간접적 활용에 주안을 두는 것도 그 해법으로서 충분히 고려될 만하다.
그러나 시장 전반의 고착화는 우려되는 지점이다. 시장 내 다양성이 부족할수록 종합적인 환경 변화 대처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 단적으로 인플레이션, 국제분쟁 등 거시경제의 악재들이 게임 지출을 억제할 가능성이 대두되는 상황이다. 이때 새로운 맛 없이 가격 대비 만족도에서 하락세를 보이는 트리플A 게임들은 저가형 게임들에 비해 더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트리플A 게임의 다양성 감소 문제는 비단 오늘내일의 문제로 지적되어온 것이 아니다. 인디 게임씬에서는 아예 트렌드로 자리 잡은 장르 융합 등의 시도가 트리플A 업계에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하다. 당장 2022년 트리플A 중 대부분이 -이전 연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오픈월드 액션’ 카테고리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23년 출시될 트리플A급(으로 추정되는) 게임은 많다. 주요한 게임만 언급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여러 타이틀이 있다.
▲<호그와트 레거시> ▲<데드스페이스 리메이크> ▲<용과 같이: 유신! 극>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 ▲<바이오하자드 RE: 4> ▲<데드 아일랜드 2>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수어사이드 스쿼드: 킬 더 저스티스 리그> ▲<디아블로 4> ▲<파이널 판타지 16> ▲<스타필드>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 ▲<마블 스파이더맨 2> ▲<P의 거짓> ▲<아머드 코어 6> ▲<철권 8> ▲<포스포큰> ▲<와일드 하츠> ▲<와룡: 폴른 다이너스티>
아직 한 편도 출시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결과값을 짐작하기란 이르다. 다만 일차적으로 반가운 지점이 있다면 <P의 거짓>, <포스포큰>, <와일드 하츠>, <와룡: 폴른 다이너스티> 등 오리지널 게임들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트리플A 카테고리 안에서 (이제) 드물게 일어나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한 번쯤 응원하며 눈여겨볼 만하다.
한편 전작 <마일스 모랄레스>에서 분량 부족 문제가 지적됐던 <마블 스파이더맨 2>, 그리고 이제는 팬들조차 피로감을 호소하는 장수 시리즈의 신작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는 다소의 자기복제 우려를 안긴다. 리메이크 작품 <데드스페이스 리메이크>, <용과 같이: 유신! 극>, <바이오하자드 RE: 4>의 경우 원작의 인기에 기댄 불성실한 타이틀이 아니기를 희망해본다.
<스타워즈 제다이: 서바이버>, <데드 아일랜드 2>,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디아블로 4>, <파이널 판타지 16>, <아머드 코어 6>, <철권 8> 등 타이틀의 경우 시리즈의 직접적 후속작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 전편과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시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별화 요소를 갖춘 독립적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다만 개별 게임에 품는 기대와는 별개로,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2022년과 유사한 아쉬움이 포착된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 '오리지널 게임'으로 언급한 4개 게임도 면면을 뜯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P의 거짓>, <와룡: 폴른 다이너스티>는 기존 소울류 팬덤의 공략을 노리고 있다. <와일드 하츠>는 노골적인 <몬스터 헌터> 대항마다. 오픈월드 ARPG <포스포큰>은 데모 버전 평가에서 유저들에 새로운 재미를 거의 어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게이머들은 화려함만으로 현혹하기에는 고도화된 재미를 지나치게 많이, 일상적으로 맛볼 수 있게 됐다. 예컨대 개발 기술의 발전으로 중·소 게임들이 '트리플A 바이브'를 내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되면서, 인디 특유의 도발적 아이디어와 높은 프로덕션 퀄리티가 만난 <스트레이> 같은 사례들도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리플A라는 분류 자체를 판매 강점 삼아 정작 재미 발굴에 소홀한 게임들은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장에서 도태될 것으로 보인다. 2022년 2월 유비소프트가 내놓은 <레인보우 식스: 익스트랙션>은 <레인보우 식스: 시즈>의 '모드'같다는 평가를 들은 뒤 흥행에 실패했다. 올해의 다크호스 게임 중 하나로 호평받은 <스트레이>의 주요 개발자들은 유비소프트 퇴사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