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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러시아 칼럼 1] 보드카, 톨스토이 그리고 리니지 2

시몬의 러시아 온라인게임 시장 이야기 ①

임상훈(시몬) 2010-08-15 23:24:08

5월 말, 난생 처음 러시아를 갔습니다. E3(와 월드컵, 이사) 등으로 보고가 늦어졌습니다. 애초 기획했던 콘텐츠 양식은,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처럼 딱딱했죠. 일문일답으로 하나하나씩 게임회사를 소개하는 방식이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경험한 러시아는 그렇게 딱딱하게 담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수박 겉핥기 체험과 독서였지만, 풍성한 문화와 따뜻한 인정, 재미있는 사연이 넘쳤죠. 제 무식함, 그리고 미국 중심의 정보편식, 깊이 반성했습니다. 급기야 글을 풀어내는 방식부터 내용까지 싹 바꾸었습니다.

 

러시아 온라인게임 시장을 소개하는 이번 기획의 첫 번째 꼭지는 '러시아의 겨울'에 주목했습니다. 길고 혹독한 시베리아로 연상되는 러시아의 풍토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온라인게임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아래 글에는 게임 이야기보다 잡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양해 부탁 드립니다. /시몬


 

# 두 번의 조국전쟁과 혹독한 겨울

 

러시아에는 두 번의 조국전쟁이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 전쟁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더군요. 첫 번째 전쟁은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영화로도 유명한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리나>는 이 전쟁을 배경으로 했죠. ‘대 조국전쟁으로 불리는 두 번째 것은 네이버평점 9.06의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나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한 것이었죠.

 

<미지의 여인>(1883년). 톨스토이와 절친했던 '이동파'의 수장 이반 크람스코이가 말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감명을 받아, 소설 속 주인공을 그린 거죠. 도도하면서도 처연한 눈빛의 숙녀를 그린 이 작품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두 전쟁 모두 러시아 인민의 끈끈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막강 화력의 적 앞에서 군인과 함께 일반 인민이 함께 싸워 이긴 전쟁들이니까요. 두 전쟁은 또한 러시아 겨울의 혹독함을 웅변하기도 합니다. 전 유럽을 휩쓸던 두 제국이었지만, ‘동장군앞에 무릎을 끓었고, 급기야 멸망하게 됐으니까요. 러시아인들이 조국전쟁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는, 러시아 인민의 단결로 벼랑 끝에 있던 유럽을 지켰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 겨울의 또 다른 선물, 보드카와 문학

 

혹독한 겨울은 두 번의 조국전쟁을 러시아, 그리고 세계에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겨울의 선물은 더 있었습니다. 보드카, 그리고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은 러시아의 길고 추운 겨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TV도 없고, PC도 없었던 러시아인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겠죠. 달리 할 게 없어서 혹은 추위를 이기려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도박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단편소설 <가수들>(투르게네프)이나 <마지막 한발>(푸슈킨) 등을 읽어보세요. 그 자체로 멋진 단편소설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무료한 일상과 음주 문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한편에서는 책을 보고, 생각을 하고, 토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그런 유산에서 나왔겠죠. 게임 업계 종사하면서 많은 외국인을 만났지만, 인식론과 존재론에 관한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이는 러시아 친구였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초상>(1872년).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 고독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러시아 지식인의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귀족 가문의 톨스토이와 달리, 그림 속 주인공은 빈곤과 사형선고, 시베리아 유형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작가죠. 이런 경험 덕분에 의식의 분석과 심리 묘사에 탁월한 작가로 인정받습니다.

 

 

# 술꾼, 철학자 그리고 게이머

 

그래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술꾼이거나 철학자이거나.” 그런데, 이제는 우스갯소리가 좀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게이머말입니다. 길고 추운 겨울,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생겼습니다. 술잔과 책 대신 마우스를 잡은 손들이 급속하게 늘어난 거죠.

 

러시아 메이저 온라인게임 퍼블리셔 이노바 시스템즈에 따르면, 러시아 시장은 2006 3,700만 달러(약 440억 ) 규모에서 2007 7,500만 달러(약 890억 ) 100% 이상 성장했습니다. 2008년에는 1 3,000만 달러(약 1,540억 원) 73% 이상 성장했고, 2009년에는 2 4,000만 달러(약 2,850억 원)으로 추정되고, 올해 규모는 3 4,000만 달러(약 4,030억 원)으로 예상됩니다. 불과 4년 사이에 온라인게임 시장이 10배 가까이 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죠. 지난 4년 간 전 세계에서 이 규모로 급격히 커진 시장은 러시아 밖에 없는 듯합니다.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한 게임대회 사진인데요, 게이머들을 놀라게 하고, 집중도를 테스트하기 위해 미지의 여성들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게이머들 참 꿋꿋하네요.

 

러시아에서 온라인게임이 성장하는 이유를 날씨 하나만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환경은 사람의 삶에 꽤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환경 속에서, 오락이자 스토리텔링인 게임이 을 대체하는 것은 얼추 말이 되지 않나요? 술과 책이 줬던 즐거움과 새로운 세계,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온라인게임의 속성에도 가까우니까요.

 

 

# 푸시킨과 <리니지 2>

 

톨스토이나 체호프 같은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이는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유명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근대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죠. 서유럽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던 러시아 문학은 그의 감성과 언어를 통해 모든 장르에서 꽃을 피워냈으니까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는 것이나,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미술관이 이유 없이 그의 이름을 따온 것이나, 러시아 미술사에서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시절이 푸시킨 시대로 불리는 것이나, 수많은 러시아 가정에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시인 알렉산드로 푸시킨의 초상>(1872년). 농노 출신의 화가 오레스트 키프렌스키는 농노제 하의 러시아 현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자유의 가치를 드높이 푸시킨을 무척 좋아했나 봅니다. 오른쪽 배경에 학문과 예술의 신 뮤즈가 그려진 것을 보면요. 자신의 초상화를 본 푸시킨은 곧바로 화가에게 시 한 편을 보냈습니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듯 / 이 거울이 나는 마음에 드네"라는 문구가 들어있었죠.

 

러시아의 근대문학을 푸시킨이 열었다면, 온라인게임에는 <리니지 2>가 있었습니다. 2003년 겨울, 러시아에서 자체 개발된 <스피어>(니키타 온라인)도 나왔지만, 이듬 해 선보인 <리니지 2>권역을 훌쩍 벗어난 압도적인 게임이었거든요. <리니지 2>가 술꾼과 철학자에 이어 게이머의 등장을 촉진시킨 셈입니다. 2000년대 중반 <리니지 2>의 인기를 정량적으로 보여줄 데이터는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만나 본 10여명의 러시아 게임업계 관계자 모두 <리니지 2>의 압도적인 인기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이었습니다. 그런데….

 

 

# <리니지 2>와 신성(New star)

 

2000년대 중반의 <리니지 2>는 정식으로 수입된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우후죽순 늘어난 불법 프리서버를 통해 운영됐거든요. 온라인게임 수출 초창기 <라그나로크> <> 등의 불법서버가 동남 아시아에서 극성이었다면, 러시아에서 <리니지 2>가 그랬던 셈이죠.

 

<리니지 2> 2008년 겨울 이노바 시스템즈(Innova Systems)에 의해 정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불법서버가 존재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현재 200만 개 이상의 계정과 40만 명 이상의 액티브 유저를 가지고 있죠. 2006년 설립된 신생 벤처였던 이노바 시스템즈는 덕분에 러시아 온라인게임 업계에서 선두에 나설 수 있었고요. 라틴어 ‘nova’새로움또는 지금까지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난 신성’(New star)을 뜻하듯 말이죠.

 

이노바 시스템즈는 국내 메이저 업체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리니지 2> 이후에도 <아이온>(엔씨소프트) <카트라이더>(넥슨) <R2>(NHN) 등의 라인업을 확보했습니다.

 

이노바 시스템즈의 이네사 아이젠버그 이사는 “<리니지 2>는 단순한 게임 이상이다. 긴 역사와 거대한 커뮤니티, 아름다운 전설을 가진 프로젝트다. 이 게임은 러시아 게이머들에게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리니지 2> 불법서버는 이노바 시스템즈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모스크바 등 러시아 내에서는 거의 폐쇄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공권력이 닿지 않는 우크라이나 등으로 옮겨간 불법서버를 통해 게임을 즐기는 유저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이노바 시스템즈는 이웃 나라 정부와도 협력해 이 서버들을 닫게 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 유저

 

<리니지 2> 이후 러시아 온라인게임 유저의 수도 확 늘어났습니다. 이노바 시스템즈에 따르면, 2005 130만 명 남짓이던 게 2009년 말 약 1,7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주목할 점은 유저들의 절반 이상이 헤비 유저라는 점입니다. KOTRA(2008)에 따르면, 러시아 온라인게임 유저의 60% 이상이 하루 2시간 이상 온라인게임을 즐깁니다. 하루 2시간 이상 하는 유저 비율이 20% 수준(게임백서, 2009)인 우리나라와 꽤 다른 모양새입니다.

 

지난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게임대회에 참가한 러시아 하드코어 게이머들.

 

헤비 유저가 많은 것은 최근까지 러시아 온라인게임 유저들이 대부분 MMORPG를 즐기는 탓이 큽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리니지 2>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완미시공> <얼로즈 온라인> 등이 모두 MMORPG니까요. 근래 온라인게임 시장의 확대를 기대하며 상당 수의 캐주얼 게임이 러시아 시장을 노크하고 있지만, 아직 눈에 띄는 결과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PC(인터넷 카페)의 발달이 미비하며, 대부분의 유저가 집에서 게임을 즐기는 것(73%, KOTRA 2008)도 헤비 유저의 비율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러시아 가정의 PC 보급율이 50% 수준이고, 상당수의 유저가 조립 PC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온라인게임 유저들이 기본적인 IT에 대한 지식, 즉 하드코어 게이머의 소양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 비주얼에 대한 관심

 

이런 하드코어한 소양을 지닌 러시아 유저들의 게임에 대한 취향은 어떨까요? 러시아 게임업계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모든 유저를 일반화하기는 힘들겠지만, 대체적으로 서구적인 스타일의 게임에 대한 선호가 높다거나, /악 구도와 풍부한 스토리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그래픽에 대한 높은 눈높이와 관심이었습니다. 제가 만난 관계자 모두, 일단 비주얼이 좋아야 한다, 는 점에서는 매우 일치된 의견이었거든요. 그 동안 만나 온 다른 나라 관계자들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로 말이죠. 아마도 <리니지 2>부터 시작한 탓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무채색에 가까운 러시아 산하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고요. 또는 <안나 카레리나> 등에서 봤던 화려한 치장과 스타일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착일 수도 있겠고요. 러시아 게임 업계 관계자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떼까마귀가 돌아오다>(1871년). 이동파 화가인 알렉세이 사브라소프가 그린 그림으로 러시아인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풍경화입니다. 침울하고 조용하지만, 떼까마귀와 살짝 녹은 눈밭이 다가오는 봄을 또렷이 보여주고 있죠. 1년의 반 이상이 겨울인 러시아의 일상 풍경은 이보다 더 우중충하다고 합니다. 

 

세르게이 오르로프스키 대표(나이발 네트워크) = “러시아 산야를 보라. 흐린 날씨에 대부분 우중충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런 탓에 러시아 유저들은 게임에서는 화려한 이미지를 찾는다. 화려한 그래픽으로 어필하지 못한 게임은 성공하기 힘들다.”

 

올레샤 코롤레바 이사(니키타 온라인) = “다른 국가 유저들은 아이템을 살 때 그 성능에만 관심을 기울이지만, 러시아 유저들은 그에 못지 않게 시각효과와 스타일에도 비중을 많이 둔다.” 

 

10년 전, LA 공항에 착륙하기 전이 떠올랐습니다. 레고 조각처럼 잘 구획된 건물들과 도시에 놀랐습니다. 옆에 앉았던 당시 엔씨소프트 부사장 송재경 님이 그러더군요. “<심시티>가 한국에서 못 나오고, 미국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 환경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게임은 삶의 한 부분이고요.

 

 

다음 꼭지에서는 러시아의 정치경제 체제가 게임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한 거친 잡설을 늘어놓겠습니다. sim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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