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트리스> 모르는 게이머가 있을까요? 무척 드물 겁니다. 그렇다면, 성 바실리 성당은 어떨까요? 웬 뜬금없는 성당 이야기냐고요? <테트리스>에 나오니까요. 동그란 지붕이 앙증맞은 건축물이 바로 이 성당입니다.
<테트리스>를 즐겼을 대다수 국내 게이머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이 세계적인 건축물을 잘 모릅니다. 당연합니다. 동서 냉전 이후 철의 장벽 너머로부터는 대부분 정치인 뒷담화나 운동선수 소식 등만 들렸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는 혹독한 겨울이 러시아의 문화와 예술을 넘어, 게임에까지 미친 영향을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추운 날씨만큼 역사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해온 러시아의 ‘권위적인 국가 체제’와 게임시장의 관계에 줌인했습니다. 성 바실리 성당과 <테트리스>로부터 글을 풀어볼까 합니다. 어김없이 잡설이 많습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시몬
# 성 바실리 성당의 슬픈 사연
<테트리스>는 1984년 모스크바 과학아카데미 연구원이던 알렉세이 파지트노프가 러시아 전통퍼즐 <펜토미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습니다. 그 후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와 함께 ‘역대 최고의 게임’ 1, 2위를 다투는 타이틀이 됐죠. 1980년대 후반 미국인들이 만사 제치고 <테트리스>에 빠져들자, “KGB의 공작”이라는 황당한 음모론도 나왔고요. 덕분에 게임 속에 등장하는 성 바실리 성당도 친근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테트리스 궁전’.
일명 ‘테트리스 궁전’은 양파 모양의 8개 지붕이 각기 색깔과 높이, 크기를 달리해 비대칭적이지만,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크렘린궁 바로 바깥에 있는 붉은광장에 들어서면, 마치 광장의 주인공처럼 건너편 정면에 우뚝 서 있죠. 외국 관광객은 물론 러시아 각지에서 모스크바로 놀러 온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쪽으로 몰려듭니다. 모스크바에 다녀왔노라, ‘인증샷’을 찍으려면, 그만한 배경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지붕 뒤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고려가 그랬듯, 러시아도 1240년부터 300년 가까이 몽고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몽고 세력이었던 카잔 한국의 공격에 시달렸죠. 1552년, 폭군으로 유명한 이반 뇌제(이반 4세)가 마침내 일을 냈습니다. 카잔을 정복함으로써 남러시아에 남아 있던 몽고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킨 거죠. 이를 자축하기 위해 이반 뇌제가 러시아 최고의 건축가(포스토닉 야코블레프)를 불러 1555년부터 1560년까지 지은 건축물이 성 바실리 성당입니다.
그런데, 건축물이 너무 멋졌다는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습니다. 성격이 급작스럽고 불 같고, 후에 공포정치를 실행해 ‘뇌제’(雷帝, 천둥 뇌)로 불린 황제가 이 성당을 너무 끔찍이 좋아했던 거죠. 황제는 비슷한 건축물이 다시 지어지지 않도록 건축가의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성 바실리 성당에 반한 영국의 여왕이 이 건축가에게 새로운 작업을 의뢰하자, 독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전제군주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 <테트리스>의 파란만장한 사연
눈을 잃은 건축가만큼은 아니지만, <테트리스>를 만든 개발자도 억울한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게임을 갖고 나라 밖 여러 회사들이 돈을 긁어모으고 있을 때, 손가락만 빨고 있었으니까요.
애초에 ‘상품’으로 나온 게 아닌 터라, 개발자와 친구들은 <테트리스>의 PC 버전을 소련과 동유럽 등에 뿌렸습니다. 1년 이상 지난 뒤, 영국 소프트웨어 업체(안드로메다)가 헝가리에서 이 보물을 발견했고, 해외 판권을 얻기 위해 파지트노프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 파지트노프는 이를 직장이던 과학아카데미에 10년 동안 양도했습니다.
과학아카데미로부터 PC 버전의 판권을 얻은 안드로메다는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다른 큰 업체들에게 판권을 다시 팔아넘긴 거죠. 그런데, 문제는 안드로메다와 계약한 업체 등 당시 게임업계는 이 판권이 PC 버전에만 국한된 것을 몰랐던 거죠. 다른 몇몇 업체를 거쳐, PC와 콘솔, 아케이드 판권을 확보한(것으로 안) 아타리 게임스는 열심히 콘솔용 <테트리스> 카트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닌텐도와 친했던 로저스라는 사람이 <테트리스>의 휴대용 게임기 판권을 얻으려고 소련에 갔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 콘솔 판권을 사라는 거였죠. 결국 이 판권은 닌텐도에게 넘어갔고, 닌텐도는 아타리와 소송을 벌였습니다. 결과는 뻔했죠. 1989년 11월, 닌텐도 승. 불티나게 팔리던 아타리의 <테트리스> 카트리지는 회수됐고, 미처 나가지도 못한 25만 개의 카트리지가 폐기됐습니다. 이후 닌텐도 게임보이의 <테트리스> 타이틀은 3,300만 개 이상 팔렸습니다.
아타리도 억울했겠지만, 알렉세이 파지트노프만 할까요? 정부 측에 양도한 판권은 10년이 지난 1995년이 돼서야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 로열티 한 푼도 못 벌었죠. 소련에서 개인의 저작권을 인정하기 시작한 게 1991년임을 생각해 보면, 속이 더 쓰렸을 겁니다. 왜 하필 10년씩이나…. (그는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 테트리스 컴퍼니를 만들었고, 또 나름대로 돈을 벌었지만, 한창 때에 비하면 한참 뒷물이었습니다.)
# 크레믈린, 러시아 국가 권력의 중심
사람은 자연환경의 영향도 받지만, 본인이 속한 정치경제적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상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건축가와 개발자, 두 사람 사이에는 400년이 넘는 시차가 있지만, 러시아의 권위적인 국가 체제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닮은꼴입니다.
그 국가 체제를 상징하는 곳은 성 바실리 성당 바로 옆에 있는 크레믈린입니다. 차르(황제)가 살던 곳이죠. 크레믈린은 권력의 중심을 상징하듯, 양파 모양의 방사형 도시 모스크바의 중앙에 위치합니다.
이 곳은 199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죠. 차르가 살던 곳이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우스펜스키 성당, 블라고베시첸스키 성당 등 러시아 정교회의 상징적인 건축물과 유적이 많아서였죠. 살고 있는 세상의 중심에 더해, 크레믈린은 삶 너머 영적인 구원의 중심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그만큼 러시아 정치권력이 셌던 거죠. 민중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종교까지 그들을 버리고, 권력의 시녀가 된 꼴이니까요. 19세기 말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를 혹독하게 비판했던 것도, 차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건축가의 눈을 뽑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을 테죠.
차르의 뒤를 이은 소련의 지도자들도 크레믈린에 머물렀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종교를 아편처럼 여깁니다. 현실에 눈을 멀게 하고 특권층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고 보기 때문이죠. 당연히 크레믈린 안팎의 성당들은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온전히 살아남았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정적 등 2,000만 명을 숙청했다고 전해지는 악명 높은 스탈린 덕분에 말이죠.
스탈린이 유년 시절 성직자 교육을 받은 탓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차르 시절처럼 종교가 권력에 유용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특히, ‘대 조국전쟁’이 있었던 2차 대전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구국 방송을 했죠. 스탈린의 말발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인민들에게 정교회 지도자들은 참전 의지를 북돋았습니다. ‘대 조국전쟁’의 극적인 역전승과 함께, 스탈린의 통치에 정교회의 공이 무척 컸던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 정교회는 살아남았습니다. 부주교는 스탈린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바짝 엎드렸고요.
# 우주의 유리 가가린, 동토 속 게임산업
2차 대전 이후 소련에게는 자본주의와 체제 경쟁이 중요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얼른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했죠. 조건은 척박했습니다. 땅덩어리는 크고, 산업화는 유럽에 한참 뒤졌으니까요. 일단 기간산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대화가 지상과제였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포항제철과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졌던 우리나라와도 비슷합니다. 냉전 상황상, 군사력도 길러야 했습니다. 유리 가가린이라는 세계 최초(1961년)의 우주비행사는 집중적인 국가주도형 산업 덕분에 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환경에서, 개인의 권리는 국가의 이해 앞에 무너졌습니다. 이를 전체주의라고 부르죠. 우리 역사에서도 익숙한 부분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런 예였을 겁니다. 국가적 프로젝트에 끼지 못하는 산업군은 찬밥이 됐습니다. 먹고 사는 소비재 영역도 아닌,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더욱 냉대를 받았겠죠. <테트리스>가 가가린보다 해외에서 더 지속적인 관심과 매출을 만들어 냈지만, 소련의 게임산업은 시베리아보다 더 혹독한 겨울을 보냈습니다. 소련은 결코 게임산업의 싹을 틔울 수 있는 밭이 아니었죠.
소련이 붕괴했던 그 해(1991년) 바로 싹이 돋았습니다. 현존하는 최초의 러시아 게임회사 ‘니키타 온라인’이 문을 열었던 거죠. 언 땅에서 바로 게임회사가 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기초과학의 강국이었다는 배경도 있었을 겁니다. 1960년대 초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던 실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니키타 온라인의 창립자 니키타 스크리프킨 대표도 알렉세이 파지트노프처럼 국가 소속 연구소에서 자동 로봇과 알고리즘을 연구하던 인물입니다. 회사를 만들기 전인 1987년부터 그 곳에서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PC와 게임들이 나타났던 시기였다. <테트리스>, <디거> 등 가장 기본적인 게임들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연구소에서 연구했던 분야가 게임을 만들기 위한 기반으로 괜찮았고, 게임을 만드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니키타 대표)
하지만, 게임사업을 하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초창기인 1996년 자신의 첫 게임회사를 만든 나이발 네트워크의 세르게이 오르로프스키 대표는 “1990년대는 PC도 무척 비쌌고,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말하더군요.
# 재기한 크레믈린의 게임산업 밀어주기
게임사업만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심하게 휘청거렸으니까요. 중심을 잡아주던 신념 대신 곳곳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급격한 자본주의화에 따른 인플레이션, 복지 시스템 해체로 인한 사회양극화 등 위기가 고조됐고요. 치안은 엉망이 됐고, 지하경제가 더 발달하는 양상도 빚어졌습니다. 외부 전문가들은 붉은 곰이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런데, 주저앉을 것 같던 러시아가 우리나라의 ‘묻지 마 펀드’ 주요 종목이 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2003년 세계적인 투자그룹 골드만삭스가 신흥 4대국으로 지목한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에 포함될 정도로 경제가 부활했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러시아는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이후 2008년까지 매년 7% 수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나라가 넓은 게 한몫했습니다. 땅속, 바닷속 천연가스, 석유 등을 팔아서 다시 일어섰으니까요. 이런 에너지 산업을 상징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20%를 보유한 세계 최대 가스생산 기업 ‘가스프롬’입니다. 확인된 수준으로만, 우리나라가 900년 동안 쓸 수 있는 가스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소비하는 가스의 절반 가량을 이 회사가 공급하는데, 가스를 내보내지 않으면, 유럽은 꽁꽁 얼어버리는 거죠. 이렇게 막강한 가스프롬은 러시아 연간 세금 소득의 25%를 차지합니다. 푸틴 체제, 그리고 러시아의 확실한 자금원인 거죠.
푸틴은 똑똑했습니다. 권좌의 유한함을 인지하고 후계자 메드베데프를 키운 것처럼, 지하자원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뒤를 이을 국가산업들을 육성한 거죠. 2002년 시작한 ‘e-Russia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IT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IT 인프라 확충, IT 밸리 구축, 전자정부 구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국가적인 프로젝트였죠. 2015년까지 국내총생산의 17%를 IT 영역에서 확보하겠다는 것을 목표로요.
러시아 땅속에 오늘을 벌어줄 가스관과 더불어 내일을 벌어줄 초고속 케이블이 뿌려지기 시작한 셈입니다. 그동안 찬밥 신세였던 게임, 특히 온라인게임 산업에게 드디어 기회가 열렸습니다.
# 한국과 두바이, 그리고 러시아
‘e-Russia 프로젝트’는 어딘지 김대중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를 벤치마킹한 느낌이 듭니다. IMF 환난 이후 나라 전체가 구조조정으로 위축되던 시절, 우리나라는 IT 인프라의 공격적인 확충을 통해 단숨에 세계적인 정보통신 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국내 메이저 게임업체들이 다른 산업군에 비해 정부의 지원을 덜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간 IT 인프라 확장의 덕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PC방(인터넷 카페)을 찾기 힘든 러시아에서 온라인게임 산업이 뜨고 있는 것은 이 산업계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대만, 베트남, 터키, 인도네시아 등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온라인게임이 급속히 큰 시장은 공통적으로 PC방(인터넷카페)의 역할이 무척 컸거든요. 여기에서 우리는 러시아 IT 인프라 구축사업의 속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초고속통신망을 통해 집에서 온라인게임을 즐기는 유저층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죠. 브로드밴드 보급율이 2007년 400만 가구에서 2009년 900만 가구로 2년 사이 2배가 넘는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올해는 1,200만 가구까지 보급될 것으로 전망되고요.
그런 덕분일 겁니다. 나이발 온라인이 <얼로즈 온라인>(위 이미지) 같은 대형 MMORPG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요. 이런 수준의 대형 MMORPG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국∙미국∙중국∙일본(∙노르웨이) 등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죠. 러시아 최대 이메일 업체인 Mail.ru와 아스트롬의 합병이나 이노바 시스템의 유럽 진출 등도 러시아 온라인게임 사업의 성장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일 거고요. 참, <얼로즈 온라인>은 CJ인터넷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서비스될 예정입니다.
중동의 두바이는 오일달러를 이용해 사상 최대의 건설∙토목사업을 벌이며 세계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벤치마킹하겠다고 나섰죠. 하지만, 지난 7월 두바이 국영건설사는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하면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부동산 불패신화를 믿고 과시용 빌딩을 짓다가 채무위기에 부딪힌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도 비슷한 꼴이죠.
반면, KGB 출신의 푸틴은 눈에 띄지 않은 땅 밑을 팠습니다. 러시아는 2009년 1분기 국제 유가 하락으로 마이너스 9.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IT의 성장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2010년 러시아 인터넷 유저는 6,300만 명, 즉 전체 인구의 약 40% 수준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