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마스터(DM)라고 불리는 게임 진행자는 출판사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출간하는 규칙 안내서의 틀 안에서 자유롭게 시나리오를 만들어 제시한다. 플레이어도 같은 규칙에 따라 DM이 상상한 역경과 상황을 헤쳐 나가면 된다.
D&D 룰은 수십 가지의 직업과 마법, 특수능력 등을 제시하고 있어 그것만으로 다채로운 게임플레이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D&D 시스템 특유의 방대함은 그 이상이다. 비단 전투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상호작용, 인물 간 대화 등의 매우 다양한 상황을 커버하는 것이 D&D룰의 특징이다.
이를테면 ‘나무 탁자를 내려쳤을 때 다치지 않고 부술 확률’ 따위의 사소한 상황까지 커버할 정도로 D&D 룰은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적용 가능한 범위가 넓다. 이런 토대에 힘입어 DM과 플레이어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게 된다.
상상력에 기반한 D&D만의 자유도는 비디오 게임의 시대에도 D&D 커뮤니티가 명맥을 이어온 동력으로 볼 수 있다. CRPG(컴퓨터 RPG)에서는 쉽게 만나보기 힘든 창의적 상황 전개는 D&D의 참된 묘미로 꼽힌다.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관절기로 드래곤 날개를 꺾어 추락사시킨 오크 전사’와 같은 흥미로운 사례를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호평받은 D&D 기반 영화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
D&D에 기반한 CRPG는 종종 출시되어 왔다. 하지만 세계관 및 전투시스템을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데 그쳤던 것이 대부분이다.
다종다양한 변수에 즉석에서 대처할 능력을 지닌 인간 DM과 달리, CRPG 시스템은 고정된 가능성 안에서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투 내/외 상황에 지나친 변수로 작용할 수 있거나, 표현하기 어려운 요소들은 생략되거나 약화하곤 했다.
한편 지난 8월 3일 출시한 <발더스 게이트 3>는 이러한 ‘D&D CRPG’의 오랜 한계를 상당 부분 극복해 내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고전 RPG로서는 이례적으로 최대 87만 동시 접속자를 기록했고, 3주가 지난 현시점에도 55만 명 수준을 유지 중이다.
<발더스 게이트 3>는 12개 종족, 30여 개 직업, 10여 명의 동료, 200여 개 주문과 능력 등을 통해 유저에게 처음부터 방대한 선택지를 부여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교한 레벨/전투 디자인, 수백 명의 NPC와 200만 단어에 달하는 대사, 그물처럼 뻗어 나가는 퀘스트라인을 통해 각각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게 지금까지 대중의 평가다.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에 이어 2023년 메타스코어 최고점을 기록했다.
“유저가 던지는 모든 커브볼을 쳐내는 게임”, “실제 D&D 경험에 가장 근접한 게임”과 같은 외신들의 평가는, 게임이 지니는 성격을 잘 요약한다. 특히, 과거에는 기술적·기획적 난점으로 인해 생략되었던 여러 D&D 요소들을 재현했다는 점이 게임을 차별화하는 일등 공신이다.
예를 들어 캐릭터의 크기를 키우거나 줄이는 ‘극대화/소형화’ 주문, 이미 죽은 캐릭터에게 5번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자와의 대화’ 주문, 범위 내에서 제약 없이 이동하게 해주는 각종 순간이동 아이템 등, 게임 시스템이 미처 다루기 힘들 수도 있는 여러 ‘변수’들을 가감 없이 구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완성된 획기적 자유도와 독특한 재미는, 현재 게임을 굳이 직접 플레이하지 않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기상천외한, 혹은 지극히 마이너한 방법으로 퀘스트를 수행하는 스트리머/일반 유저들의 게임플레이가 온라인상에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해외 유명 게임 성우 매슈 머서의 ‘성 침투’ 영상이다. 그는 맵에 흩어져 있는 상자를 무려 45개나 쌓아 그 위에 ‘등반’한 뒤, 꼭대기에서 순간이동 마법 화살을 성 안쪽으로 발사, 불가능한 침투에 성공해 개발자들을 감탄시켰다.
이외에도 얄미운 NPC를 인형 크기로 만들어 절벽으로 집어 던지거나, 내구도 높은 보관함으로 건물 입구를 틀어막아 적을 손쉽게 상대하는 등, 저마다의 성향과 상상력을 드러내는 영상들이 현재 해외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성우 매슈 머서는 라리안 스튜디오 스벤 빈케와 함께하는 라이브스트림에서 창의적 플레이를 선보였다.
<발더스 게이트 3>의 자유도는 그러나 전투 및 탐험 시스템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근래 오픈 월드 게임들의 경우,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더라도, 결국엔 비슷한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타협적 게임 디자인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제작 프로세스상의 여러 어려움을 생각할 때, 반드시 탓할 일만은 아니겠으나, 만약 그 정도가 과하다면 ‘선택의 허상’(illusion of choices)으로 유저를 기만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흥미롭게도, <발더스 게이트 3>의 퀘스트 디자인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서 있다. 무의미한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사소한 선택, 혹은 인지하지 못한 갖가지 제반조건이 현재의 사건에 느닷없이 맞물려. 예측 못 했던 결과나 콘텐츠로 귀결되는 경우를 꾸준히 만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연쇄작용’은 단기적이고 즉발적인 것에서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당장의 퀘스트에 큰 행운(혹은 믿을 수 없는 불행)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라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발더스 게이트 3>의 분기 시스템은 그래서 ‘나무’보다는 차라리 ‘혈관’에 비유하는 편이 더 알맞다. 분기의 위치나 개수가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기존의 게임들과 비교해, <발더스 게이트 3>의 분기는 스토리의 기저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고,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촘촘하기 때문이다.
또한 혈관이 그러하듯 <발더스 게이트 3>의 분기 시스템은 인게임 세계를 살아 맥동하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 또한 특기할 만하다. 유저가 생각해 내는 온갖 창의적 선택에 ‘유기적으로’ 반응하는 <발더스 게이트 3>의 게임 시스템은, 실제로 작중 무대인 ‘페이룬’ 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가 된 기분에 젖어 들게 만든다.
소매치기를 시도한 어린 NPC를 역으로 소매치기해 혼내줄 수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녀석의 '두목'을 만났을 때 다시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까지 게임을 즐겼다면, 한 가지 분명하게 파악되는 것이 있다. 이례적 게임 디자인의 이면에 깔린, 마찬가지로 이례적인 수준의 ‘작업량’이다.
많은 개발사가 절차적 생성법 등의 자동화 공정을 통해 개발 프로세스를 크게 효율화하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 3> 개발사 라리안 스튜디오 대표 스벤 빈케 역시 매체 인터뷰를 통해 제작에 있어 이러한 기술들의 도움이 컸다고 밝혔다.
문제는 정작 <발더스 게이트 3>를 차별화하는 핵심 콘텐츠 대부분은, 반드시 인간 제작자의 손길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고전적 유형이라는 점이다.
‘동물과의 대화’ 주문을 대표적 예시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동물과의 대화’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시전 후 일정 시간 동안 동물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하급 주문이다.
기존 게임들이라면, 미리 정해진 명령이나 대사 몇 가지를 동물 NPC에 전달하는 반복 메커니즘으로 구현했을 법한 주문이다. 그러나 <발더스 게이트 3>의 경우, 주문 사용 시 게임 내 수많은 동물의 목소리와 대사를 실제로 들어볼 수 있게 된다.
'동물과의 대화'는 상황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해준다.
심지어 동물들은 나름의 개성과 서사를 갖고 있으며, 그에 어울리는 말투와 대사를 읊는다. 물론 대부분은 한두 줄의 대사를 말한 뒤 자리를 이탈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의외의 정보를 제공해 유저에게 도움을 주거나, 별도의 사이드 퀘스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때문에 ‘동물과의 대화’ 주문은 <발더스 게이트 3>의 경험을 확장해 주는 요소로서 초보자들에게 추천되고 있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주문으로는 앞서 언급된 ‘죽은 자와의 대화’가 있다.
무수한 게임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제작진의 ‘휴먼 터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모든 NPC 대화에는 최소한의 컷씬과 함께 성우 목소리가 입혀져 있다. 모든 전장은 다양한 전략이 구사될 수 있도록 다면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띠며, 활용할 수 있는 오브젝트와 환경요소, 우회로, 함정 등을 빼곡히 배치해 뒀다.
또한, 동일한 대화라 하더라도 주인공의 능력치와 출신, 대화 관련 기술의 성공 여부, 동료들의 구성, 이전에 벌어진 사건들에 따라 대사와 상황이 달리 펼쳐진다. 전후 맥락에 따라 가변성을 띠는 퀘스트라인 설계 또한 분명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이러한 ‘한 땀 한 땀’의 정서는, 게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비용 및 리스크 최소화를 부르짖는 오늘날의 창작환경을 감안할 때, 400여 직원과 함께 이를 가능케 한 라리안 스튜디오의 개발 철학은 분명 이질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성’은 현재 해외 개발자 사이에서 논란을 넘어 분열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