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고 자유로운 삶이란 어떤 걸까? 흔히 사람들은 "눈치 보지 않는 삶"을 떠올린다. 원하는 대로 무언가 마음껏 할 수 있는 인생, 그런 게 가장 많은 힘을 가진 삶 아닐까.
<레인즈> 시리즈로 익숙한 영국 인디 개발사 네리얼은, 이미 여러 차례 "왕의 삶도 피곤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여러 세력의 요구사항에 맞춰 눈치를 보며, 좌우로 카드를 넘기는 형태로 선택을 이어가면, 왕국의 수명과 함께 플레이어의 수명도 함께 깎여나가는 듯한 매우 매력적인 게임이다.
<카드샤크>를 기억하는 게이머도 있을 것이다. 일명 '사기도박' 기술을 연마하며 '타짜'가 되어가는 게임이다. 역시나 게임 속 등장인물들에게 '사기'가 발각 당할까 주의하며, 노심초사 눈치를 봐야 한다.
그런 네리얼이 8월 10일에 출시된 따끈따끈한 신작 <크러시 하우스>를 들고 한국을 방문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리얼리티 쇼의 PD가 되어 방송 폐지를 막는 게임"이다. 이쯤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다양한 취향을 가진 시청자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출연자들의 연애와 싸움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정상적(?)인 청중도 있는가 하면, 뜬금없이 화단의 꽃을 찍어 달라거나 출연진의 엉덩이를 찍어 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 '왕'이나 '타짜'나 'PD'나 극한직업이다. 네리얼의 시니어 프로듀셔이자 작가 로라 포니에(Laura Fournier)와 <크러시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 헤(Nicole He)를 만나 여러 질문을 던져봤다. 네리얼은 왜 눈치 보는 게임을 계속해서 만들어온 것일까? 꽤나 재밌는 답변들을 들을 수 있었다. /부산=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니콜은 먼저 기자의 관찰력을 언급하며 좋은 질문을 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네리얼이 만들어온 게임들의 공통된 핵심을 짚었다는 것이다. "히어로니까 착한 사람이고 착한 일만 할 거야-와 같은 식의 뻔한 스토리를 피하고 싶었다. 명확한 해법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기자가 "눈치 보기"라고 포괄한 행위들이 바로 그런 게임 메카닉이었다는 것이다.
로라는 "게임을 많이 플레이하다 보면 너무 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많은 내부 테스트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라 설명했다. <카드샤크>는 상대를 속이는 '트릭'의 과정을 미니게임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어려운 과정엔 힌트를 제공하는 한이 있어도, 도전할 수 있게끔 조정하고 설정했다고 한다. <크러시 하우스>에서의 방송 촬영 플레이도 마찬가지다.
다른 질문들보다 "눈치 보기"에 대해 먼저 소개한 이유가 있다. 이 시선으로 바라보면 네리얼 게임의 재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최동훈 감독의 역작 영화 <타짜>나, 사기도박 콘텐츠로 방송을 하는 유튜버 '김슬기' 등을 아시는가. 밑장빼기를 비롯해 많은 '기술'들을 대중들도 알고 있을 정도다. 다만, '도박'이라는 소재 자체는 게임 업계에선 매우 민감하게 다뤄지고 있다. 소셜 카지노 게임이랑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고, 마냥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진 않기 때문이다.
<카드샤크>는 독특하게도 '도박'의 과정 자체를 플레이로 묘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포커' 플레이 중에 상대를 속이는 걸 게임으로 만든다고 하면, '포커' 플레이 과정 자체도 함께 담아 그 안에 녹여내기 마련인데, 정확하게 상대를 속이는 '트릭' 부분만 미니게임으로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카드게임을 몰라도 플레이할 수 있는 독특한 '타짜' 게임이 됐다.
로라는 스토리 안에 상대를 속이는 과정들을 녹여내면서 지금의 형태가 됐다고 설명했다. 초기 개발 과정에서는 '포커'를 치는 과정과 '속이는' 과정을 모두 담았으나, 그 형태가 재미없다고 판단해 지금의 버전으로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도박'이라는 소재 또한 이기고 지는 과정에서의 긴장감을 스토리에 녹여낼 수 있는 소재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사기만 치면 언제든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상대와 세계는 항상 있다는 것이다. <레인즈> 때부터 계속 그래왔지만 이들이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화두와 선택지는 꽤나 철학적이지 않은가.
<크러시 하우스>는 리얼리티 쇼의 PD가 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방송 폐지를 막기 위해 다양한 시청자들의 입맛을 맞춰줘야 한다. 다만, 하나의 룰이 있다. 낮에 라이브 방송을 하는 동안엔 PD가 상황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 캐스팅한 4명의 출연진과 야간에는 따로 대화를 하며 속내를 들을 수도 있고, 세트장에 물건을 구비해 다른 행동을 유도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베이스는 "촬영"에 있다.
관찰한다는 느낌에 가까워 수동적이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런 질문에 니콜은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게임도 물론 재밌지만,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닌 플레이어가 시청자 반응 등 여러 환경에 맞춰가는 게 <크러시 하우스>의 재미"라고 설명했다.
그래서인지 밋밋할 수 있는 "촬영"이라는 행위에, 청중의 기호와 반응을 넣어, 서문에 언급한 것처럼 사람 대신 꽃을 찍어야 하거나, 출연진의 엉덩이를 찍어줘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주어진다. 그 자체로 일종의 코미디인 셈이다. 실제 세계의 사람들도 그런 괴상한 취향들을 각자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리얼리티 쇼를 볼 때 재밌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때론 "악마의 편집"이고, 서구권 방송의 경우 욕설이나 과격한 감정 표현을 포함한 출연진의 꽤 과장된 리액션들 아닌가. 이 지점에서 <크러시 하우스>는 뻔한 정공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왜 촬영 외에도 "악마의 편집"과 같은 편집하는 플레이 구성을 넣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니콜은 "처음엔 편집하는 플레이를 포함한 버전도 내부 테스트를 해봤으나, 촬영분을 다시 돌려보며 편집하는 게 플레이를 루즈하게 만들었고, 기대보다 재미가 없어서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PD라면 편집도 할 것이라는 상상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지만, 플레이에 꼭 적합하진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꽤나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난리법석을 떨 것 같은 출연진들이, 의외로 <동물의 숲>과 같은 '멈블'로 말을 한다는 것이다. 다소 귀엽게 보이기도 하는 이런 음성 연출은, 절차적 생성으로 만들어지는 상황과 대사를 커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말의 입길이를 맞추는 측면에서도, 각기 다른 뉘앙스를 적절히 커버하는 측면에서도 '멈블'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니콜은 설명했다.
다만, <크러시 하우스>의 한국어 지원 계획은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하지만 영국에서 BIC 현장까지 시니어 프로듀서와 디렉터가 찾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네리얼은 한국 시장에 꽤나 진심이다. <카드샤크>의 스팀 넥스트 페스트 데모 당시에도 가장 첫 번째 다운로드가 발생한 건 한국 지역이었다고 하고, 첫 팬아트도 한국에서 받았다고 한다. 진심으로 애정과 감사를 표했다. 그러니 적절한 환경만 마련되면 한국어 지원도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