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 에미 어워드 6관왕에 올랐다. ‘이질적인' 미디어가 점차 대세가 되어간다. 존재조차 몰랐던 세상 속에서 보편적 재미를 발견하는 시대다. 핀란드 1인 개발자 예쎄 꼰또니에미(Jesse Kontoniemi)의 <써니 컵>도 그런 게임이다. <이니셜 D> 등 매체로 일부 세상에 알려졌지만 역시나 익숙하지는 않은 ‘드리프팅 씬’을 그려내고 있다.
탑다운의 먼 시점으로 진행되는 <써니 컵>(Sunny Cup)은 여느 레이싱 게임처럼 차량을 리얼하게 움직여 도로 위를 정확하게 주행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운행의 상당 부분은 주행 보조 시스템이 담당하고, 유저는 그저 멋진 드리프팅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 게임이다.
이런 독특한 게임이 탄생한 배경에는 ‘드리프팅 문화’를 향한 개발자의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과거 한국에 약 2년 살아본 경험이 있다는 그는 최근 열렸던 부산인디커넥트(BIC) 참여 후 국내 퍼블리셔들과의 미팅을 위해 한국에 잠시 남았다. 그가 귀국하기 전 잠시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눠봤다.
개발사 '루나 액티비티즈'의 예쎄 꼰또니에미
Q. 디스이즈게임: 퍼블리셔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반응이 어땠나?
A. 예쎄 꼰또니에미: 몇 군데 만났는데, 공통으로 매우 흥미를 보였다. 다만 의구심을 느끼는 부분은 역시나 게임의 독창성인 듯하다. 3인칭이고, 주행보조 시스템도 들어 있는 레이싱 게임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게다가 판타지 차량이 아닌, 현실적인 낡은 차들만 나오는 게임 이기도 하고.
사실 애초에 <써니 컵>은 현실의 드리프팅 씬을 아는 사람들에게 더 통할 만한 게임이기는 하다. 이것이 다소 이슈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분을 제외하고 말한다면, 일단 관심을 가지는 퍼블리셔가 많아 놀랐다. 그리고 퍼블리셔들은 BIC 현장에서 <써니 컵>이 긍정적 반응을 얻는 것을 보며 놀랐다고 말하더라.
Q. 현장에서 확인한 유저 반응은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A. 일단 첫 번째 반응은 게임이 아주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게임의 핵심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더라(웃음). 아주 확실히 나뉘었다.
Q. 5대5 정도?
A. 그 정도 됐다. 일부 유저들은 즉시 시스템에 숙달해서 플레이했지만, 다른 일부는 조작 방향과 실제 이동 방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기 힘들어하더라.
게임을 꽤 오래 만들어왔지만 대중에게 전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그래서 실제 유저 반응을 확인한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튜토리얼을 좀 바꿨다. 이제 방향키를 움직이면 차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 지 화살표로 표시된다.
BIC 현장에 전시됐던 <써니 컵>
Q. 현재 버전에 등장하는 차들에 관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나.
A. 실존하는 차들이다. 이 게임은 실제 드리프팅 씬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니셜 D>에도 등장하는 고전적 드리프팅 카 도요타 하치로쿠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유럽의 드리프팅 씬에서 가장 인기 높은 BMW 해치백 모델이다.
Q. 사실 드리프팅 씬은 잘 모르겠다. 설명해줄 수 있나?
A. 현재 이 문화가 가장 보편화한 곳은 일본인 듯하다. 일본에는 낡은 차를 타고 드리프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나 다름없다. 차를 고쳐서 타다가 고장 나면 다시 고쳐서 타는 것을 반복하는… 그리고 이 문화가 2005년쯤부터 유럽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로 경기도 열렸고, 자기가 원래 타던 차량으로 시도하며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Q. 본인도 드리프팅 레이서라고 할 수 있나?
A. 그건 좀 과한 표현 같고(웃음). 그냥 무모한 젊은이(young idiot)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씬에서는 흔한 일이다. 한창 겁 없는 20대~30대쯤 되는 사람 중에 그냥 취미로 드리프팅을 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손쉽게 멋진 드리프팅 장면이 연출된다.
Q. 게임에 주행보조 시스템이 들어가 있는 점이 특이하던데, 목적이 뭔가?
A. 이 게임 자체가 ‘주행보조 시스템으로 드리프팅을 구현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가 나온 결과다. 그런데 실제로 구현해보니 꽤 재미가 있더라. ‘가속’과 ‘브레이크’ 기능만 구현된 채로 친구들에게 보여줬는데 첫날 함께 거의 6시간을 플레이했다. 뭔지 모를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대부분의 레이싱 게임에서 드리프팅은 아주 해내기 힘들다. 그걸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게, 드리프팅의 ‘플로우’에 빠질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Q. 드리프팅의 까다로운 부분은 빼고 재미있는 부분만 즐길 수 있게 해줬다는 건가?
A. 그렇다. 드리프팅을 실제로 하려면 오버스티어링(oversteering), 그러니까 후륜이 바깥쪽으로 크게 도는 현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걸 하려면 핸들 조작을 거꾸로 해야 한다. 내 게임에서는 그런데 이 조작이 필요없다. 큰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순수하게 매치를 즐길 수 있게 했다.
Q. 내려다보는 카메라 시점도 다른 레이싱 게임에 비해 독특한데, 이건 왜?
A.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게임을 처음 만들 때 전체 모습을 확인하려고 내려다보는 앵글을 잡았는데, 그 상태가 눈으로 보기에 더 재미가 있더라. 게다가 주행 보조 시스템이 있어서 (이런 앵글에서도) 도로 주행이 어렵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전체적 분위기를 느끼는 데에도 이 각도가 더 좋았다.
Q. 드리프팅 문화의 즐거움을 알리고 싶어 <써니 컵>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그러면 애초에 게임 개발자가 된 계기는 뭔가?
A. 아주 간단한 사연이 있다. 사실 원래는 핀란드에서 제일 좋은 대학 중 하나에 가구 디자인 전공으로 진학했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됐는데 교수님이 그러는 게 아닌가. “여러분은 절대 가구 디자이너가 될 수 없을 거다. 업계가 너무 변했다. 다른 일을 찾아봐라”라고.
그래서 2010년쯤 개발 공부를 시작했고 2012~2013년쯤 유니티를 처음으로 만졌다. 그러다가 또 진로를 바꿔 게임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다가 2019년쯤에 <써니 컵>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전에도 계속 게임 프로토타입을 여러 개 만들어왔었다.
Q. BIC 참가 직전에 거의 게임 개발을 포기할 뻔했다고?
A. 올해 여름쯤 개발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 열중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치고 말았었다. 그래서 '이제 데모를 완성했으니까 멈추자, 버려뒀다가 몇년 후에나 다시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핀란드의 개발자 네트워킹 행사에 참석했다. 술과 사우나가 있는 전형적인 핀란드식 네트워크 행사였는데, 아무튼 거기서 유명한 프로 개발자를 많이 만나고, 어떤 사람과 친해졌다. 그 사람이 말하길 “인디 개발자들을 데리고 BIC를 방문할 계획인데 한 팀이 한국행을 취소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 무리에 끼게 됐다. ‘유턴’을 한 거지. 이후로 데모 빌드를 다듬었고 약 한 달이 지나 여기 이렇게 왔다.
사실 코로나19 시기에 개발을 시작한 바람에 이렇게 사람들을 직접 만나 게임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반응이 굉장히 좋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BIC 현장에서의 모습
Q. 게임 타이틀 화면을 보니 일본어가 적혀 있더라. 아까 <이니셜 D> 얘기를 잠깐 하기도 했고,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한데?
A. 맞다. 2001년 내가 13살쯤 됐을 때 <이니셜 D>가 핀란드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때 나는 친구들이랑 일본 만화를 이것저것 보던 시기였는데, 그러다가 <이니셜 D>를 만났다.
핀란드 역시 자동차 문화가 매우 강하고 나도 차에 관심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건 대체 뭐지’하며 빠져들었다. 14살쯤에는 아예 드리프팅용 차를 한 대 사야겠다 마음먹었고 이후로 집착이 시작됐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영향을 준 것은 일명 ‘드리프트 킹’이라고 불리는 드리프트 선수 츠치야 케이이치의 ‘드리프팅 바이블’ 영상이다. 드리프팅 방법을 알려주는 영상인데 친구랑 이걸 보고 또 봤다. 이것도 드리프팅에 빠져든 계기가 됐다.
Q. 게임의 스토리 모드에 관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나? 다양한 스타일의 드라이버가 상대편으로 등장하는 것 같던데?
A. 경기의 다양한 측면을 가르쳐주는 교육 모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플레이 방식은 <젤다의 전설>과 비슷하다. 새로운 보스를 이기려면 새로운 스킬을 배워서 써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 버전의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만나는 상대는 경기 시작부터 유저의 뒤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유저는 세 바퀴 동안 상대방을 계속 뒤에 두기만 하면 이긴다. 나는 유저들이 항상 영웅처럼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잘 버티기만 해도 이길 수 있게 했다.
아니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타이틀 화면
Q. 핀란드와 한국 게이머들의 차이가 있다면?
A. 한국인들의 게임 이용 성향은 아주 캐주얼한 것 같다. 무슨 의미냐면, 핀란드 게이머들은 게임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여긴다. 일상적으로 PUBG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닌다든지(웃음).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그냥 생활이다. 한창 게임을 취미로 삼다가, 또 한동안 안 하기도 한다. 이런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Q. 한국 인디 개발자들도 만나봤을 텐데, 핀란드와 비교해서 어땠나?
A. 이번에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큰 차이는 없다고 느꼈다. 전반적으로 게임 퀄리티가 높고 각자 분명한 스타일이 있다는 것 정도가 눈에 들어왔다. 개발자 씬 자체가 다른 점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핀란드와 한국 인디 개발자 씬의 공통점은 하나 느꼈다. 서로 도와주고 지지한다는 점이다.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한배를 탄 동료로 생각한다.
Q. 한국에 와있기도 하고, 한국 퍼블리셔들과 얘기도 잘 나눴다고 하니, 국내 게임 씬에도 한 마디 부탁한다.
A. 이 게임을 잘 출시하고 나면 나를 좀 고용해달라(웃음). 그것 외에는, 한국의 작은 규모 게임 스튜디오들에 대해 더 알고 싶다. 한국은 대기업 중심 문화가 있지 않나. 하지만 핀란드는 정반대다. 작은 회사일수록 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의 작은 스튜디오들을 소개해준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