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이즈게임이 ‘게임미술관’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게임업계 금손 아티스트들을 소개합니다. 작품과 함께 작품의 목적과 작업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유저들에게는 흥미로운 읽을 거리를, 지망생들에게는 참고가 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오늘 만나볼 '금손'은 넥슨 데브캣 스튜디오의 이근우 아트 디렉터입니다. 2000년 안다미로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넥슨에서 <어둠의 전설>, <테일즈위버>, <마비노기>, <마비노기 영웅전>, 그리고 <마블 배틀라인> 등 다수의 게임 아트를 그렸습니다. 경력이 20년에 달하는 업계의 베테랑이라고도 할 수 있TMQ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려온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 중에는 개발 취소된 작품도 많으며, 고난 끝에 서비스를 시작한 게임 중에서도 유저들의 비판을 받은 경우가 다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고난을 극복했을까요?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을까요?
이근우 디렉터의 출발은 낙서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드래곤볼>이나 <시티헌터> 등 일본 만화를 따라 그리며 그림 그리는 사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 그의 캐릭터 모작으로 얻은 경험은 오늘날 마블 IP를 재탄생시킨 <마블 배틀라인> 원화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그림을 손에 놓은 적이 없습니다.
이 디렉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할 무렵, 젊은 세대는 적극적으로 일본 문화를 향유했습니다. "내 원화가 세대는 대체적으로 참고할 콘텐츠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으로 한정적이었다"는 이 디렉터는 그 무렵 <에반게리온>과 그 원화가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화풍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대학 전공으로 산업디자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즐겨 보던 만화와는 다른 분야였지만, 결과적으로 게임 쪽 업무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촉망받는 기술이었던 컴퓨터 그래픽(CG)을 빠르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게임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게 아니라 도트 아트로 시작해 그림 동호회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일러스트레이션과 콘셉트 아트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2000년대 초 아마추어 '금손' 사이에는 자신의 캐릭터 일러스트를 올리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이 디렉터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CG로 표현한 캐릭터 일러스트를 올리곤 했는데요. 아케이드 게임 개발사 '안다미로'는 이 디렉터의 홈페이지를 보고 그를 회사로 스카우트했습니다.
안다미로에 입사한 그는 당대를 풍미했던 오락실 댄스 게임 <펌프 잇 업>의 화면 댄스 모션과 뒷배경 애니메이션을 그렸습니다. 그는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안다미로에서 일하며 게임 아트에 대한 이해를 쌓았습니다. 이근우 디렉터가 참여한 아케이드 네트워크 FPS 게임 <아크쉐이드>는 비록 시장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캐릭터 원화, 3D 모델링, GUI 아이콘, 출력 등 게임 아트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다양한 기술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근우 디렉터가 넥슨으로 둥지를 옮긴 것은 2004년의 일입니다. <어둠의 전설> 일러스트를 시작으로 넥슨 게임에 사용되는 아트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넥슨 입사 이후 그의 커리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데브캣 스튜디오에서 캐릭터 콘셉트를 맡았던 그는 MMORPG 프로젝트 <뫼비우스>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년 동안 공들여서 작업했지만 이 게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프로젝트 XR>의 아트 디렉터를 맡아 마비노기 엔진을 활용한 NPR 계열 렌더링 방식을 연구했지만 이 프로젝터 역시 중간에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실패는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종합적인 요소를 검토해서 내려지는 프로젝트 중단의 책임을 이근우 디렉터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그는 "퇴직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까지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두 번의 프로젝트 실패로 인한 고비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뫼비우스>가 엎어진 후에는 <마비노기> 챕터 2의 신대륙 발레스와 신규 캐릭터 자이언트의 작업을 맡았고, <XR> 이후에는 <마비노기 영웅전>의 드래곤을 그렸습니다. 오랜 기간 매달리던 프로젝트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지키는 힘이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이지요.
이근우 디렉터는 "맡았던 프로젝트가 취소되면 몸도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지치게 된다"라면서 "서비스 중인 라이브 게임을 맡게 되면 즉각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내 작업물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 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프로젝트 취소로 받은 상처를 라이브 게임에 그린 일러스트가 좋다는 유저들의 응원으로 치유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2차 창작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어렸을 때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아트를 그렸던 그는 이제 팬들의 2차 창작물을 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도 현역의 다른 원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팬들의 2차 창작물을 보고 영감을 얻는 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근우 디렉터는 늘 좋은 피드백만 받아온 것은 아닙니다.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성격은 다른 게임'이라는 홍보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유저들이 아기자기한 MMORPG <마비노기>에서 상대적으로 무게감 있는 분위기의 액션을 추구하는 3D ARPG <마비노기 영웅전>(이하 마영전)으로의 이행을 반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게임의 시각적 핵심 요소인 아트를 담당하는 이근우 디렉터는 이런 비판을 가장 최전선에서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였을까요? 그에게 <마영전>은 지난 두 번의 실패와 달리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게임이기 때문에 '내성'을 가지고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2년 <마영전> 시즌 1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추가된 드래곤 작업이 그렇습니다. 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드래곤이지만, 그것을 그려내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한 번씩 만들어 보는 건데 얼마나 어렵겠어?"라는 생각으로 드래곤을 구상했던 이 디렉터는 드래곤 작업이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고, 전투 기획과 모션도 함께 고려해야 했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드래곤 종류가 있었고 자신이 원화를 그려서 주기 전까진 다른 부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압박감도 들었습니다. 상상을 통해 그려낸 드래곤을 3D 모델로 만들기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기획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꼬리는 길게, 목은 짧게. 네 발로 민첩하게 걷고, 날개는 최대한 크게. 스케일이 큰 만큼 원화도 세밀하게'라는 원칙을 세워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규칙이 정해지자 그 후는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뼈대를 잡아서 모션제작팀에 맡기고 불과 번개, 얼음 등의 속성을 적용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모델러의 고민을 최소화하기 위해 몸의 각 부분이 어떻게 나뉘는지도 원화 단계에서 고민했습니다. 규칙에 맞는 정보만 얻으면 되니 자료의 홍수에 시달릴 일도 없었지요.
그가 <마영전>에서 제작을 맡은 영웅으로는 델라와 린이 있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두 캐릭터를 작업할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라고 합니다.
북미 시장을 타겟으로 한 벨라는 그리는 과정에서 기존과는 다른 느낌으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이 디렉터는 와인레드의 머리카락, 도톰한 입술을 가진 자유분방하고 당찬 성격의 여검사를 그려냈습니다. 기존의 영웅들과는 다른 성격의 캐릭터가 나왔습니다. 초기 어색함을 느낀 유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벨라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영화 '지.아이.조'에 이병헌이 입고 나오는 흰색 수트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네요.
마찬가지로 중국 시장을 타겟으로 한 린은 이미 서비스 중이던 중국 <마영전>을 위해 만든 영웅입니다. 역시 영감을 얻기 위해 중화권 무협 영화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마비노기 나오의 트윈테일을 참고하고 영화 '아이언 피스트'의 중국인 쌍둥이의 복장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이 과정에서 헐리우드가 해석한 유니크한 동양풍 아우라를 연출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는 캐릭터 콘셉트를 잡을 때 영화를 챙겨 보는 편입니다. 예전에 봤던 영화들을 다시 살피면서 자신의 현재 작업과 연결한다는데요. 현재 <마블 배틀라인>의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는 그는 마블 영화를 주로 챙겨 보고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어벤저스: 엔드게임>도 벌써 2회차 관람을 돌파했다고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나 견자단이 나오는 영화 등 시원하고 역동적인 액션이 연출된 영화를 좋아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지망생들에게 "게임 콘셉트 아티스트는 게임 안에서만 단서를 찾지 말고 여러 가지 콘텐츠에서 영감을 얻으면서 폭넓은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마영전>의 갑옷을 작업할 때는 최신 자동차 광고 이미지의 라인 엣지, 면처리를 적용해서 중세 고증의 느낌보다는 현대적 재해석의 느낌을 연출하려 했고 스팀펑크 타입의 복장을 그릴 땐 '은하철도 999'나 빅보이 증기기관차 등 산업혁명을 연상케 하는 기차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주어진 그림 레퍼런스란 일본 애니메이션뿐이었지만, 요즘에는 인터넷과 서점에 참고할 거리가 넘쳐나는 환경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마블 코믹북은 올컬러에 한국어 번역까지 되어 서점에 비치되어있고, 아트스테이션에서 전 세계 '금손'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2년 전 디스이즈게임과의 인터뷰에서 "아트의 경계는 계속 허물어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태생적인 차이가 있어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추구하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요즘은 소속된 문화권의 영향만큼이나 유튜브, 구글 등 전 세계적으로 열려있는 오픈 플랫폼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다른 문화권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설명한 이근우 디렉터는 "앞으로 더 오픈된, 동서양의 조화가 더 잘 이루어진 콘텐츠를 다양한 분야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내비쳤습니다.
그는 마블 유니버스 IP 홀더와의 컨펌 이슈가 있어 <마블 배틀라인> 작업 과정에 대해 세세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그가 게임미술관 자리에서 <마블 배틀라인> 작업 과정에 대해 말해준 유일한 것은 "IP 홀더마저도 너무 북미풍으로 그림을 그리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했다"라는 것입니다."
콘텐츠의 글로벌 서비스를 진행 중인 IP 홀더는 동서양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IP를 변화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뉴욕 코믹콘을 찾았을 때 만난 마블 아티스트 중 많은 이들이 동양 출신의 아티스트였고, 추구하는 스타일도 다양했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피부 노출은 피하고 총구는 유저를 피해서" 마블과 게임 아트 협업하기 (바로가기)
이근우 디렉터는 한 사람의 아티스트이지만 동시에 넥슨의 직원입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100% 고수할 수 없이 회사의 니즈와 다른 직원들의 상황을 복합적으로 판단하며 작업을 진행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는 "맡는 프로젝트마다 스타일이 굉장히 많이 다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맞게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나보다 팀에 맞춰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아티스트 같은 경우 작가 지향적인 부분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곤조'를 부려볼 수 있지만, 이것은 이근우 디렉터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네요.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좋으니 마스터피스를 뽑아내겠다'라는 장인의 자세로는 회사의 타임라인을 맞춰서 유동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따라가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게임 개발 타임라인의 무게가 모바일로 옮겨온 요즘, 캐쥬얼부터 실사까지 다양한 아트 스타일을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게임 아트란 본질적으로 팀 작업이기 때문에 내 캐릭터를 만들더라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파트와 협업을 하고 피드백도 받으면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그 결과물을 100% '내 것'이라고 부르기 힘든 것입니다.
그림 밑에 '어떤 작가가 그렸다'라는 낙관이나 타이틀이 들어가곤 하지만, 그것이 팀의 작업이라면 디렉터가 방향성을 제시해준 것도 반영됐을 것이고, 작가들 사이에서 검수와 피드백 과정도 거친다든지, 채색을 돕는 일도 있기 때문에 작가 개인의 이름 뒤에는 팀의 이름이 같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려오던 그림 스타일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결국 펜을 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회사 소속으로 그림을 그릴 때라도 자기 스타일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 개인의 소양을 어느 정도는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원화가 지망생에게 해줄 말이 없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지만, 그는 말을 흐렸습니다. "나는 운이 좋았던 케이스"라며 어렵게 입을 연 그는 "사실 산업 규모는 더 커졌지만 그만큼 경쟁도 더 치열해졌다. 옛날과 지금은 인프라도, 필요한 기술도, 시장 규모도 전부 다르다. 내가 게임 아트를 처음 그리던 시절과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후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많이 그려보라는 대답 외에는 따로 해줄 말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근우 디렉터는 당분간 <마블 배틀라인>에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실무 중심으로 동료 아티스트들의 실력을 점검하고 체크하면서 자신의 작업도 그려낼 수 있는 실무형 아티스트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기 전 "할아버지가 돼서도 이 일을 놓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업계 최정상급 아티스트들이 인정하는 이가 있다. 이근우. 극단에 가까울 정도로 폭넓은 아트 스타일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며, 깊은 매력을 발산하는 천재 아티스트, 심지어 성품까지 좋다. 나는 15년간 그의 단점을 찾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에게 이 문구를 읽어주었습니다. 이근우 디렉터가 NDC 17에서 한 개인전 때 같은 스튜디오의 임학수 아티스트가 써준 추천사였습니다. 호기심이 들어 이 디렉터의 단점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열정이 많지 않은 게 단점이라면 단점 같다, 앞으로도 노력해야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이근우 디렉터는 진심으로 자신의 이력과 작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