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안정빈 기자)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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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귀농일지 ‘태초에 공용농장이 있었다’

본격 아키에이지 영농 플레이 체험기행 ①

채소. 인간의 적.

 

 

척 봐도 맛이 없을 듯한 그 푸르름은 식욕저하에 한몫하, 온갖 비타민을 인질로 잡은 채 자신을 섭취하기를 강요하는 그 자태는 협박범의 그것과 같다. 생각해 보라, 채소의 절정인 녹즙이 왜 독약과 같은 녹색인지를. 생각해 보라. 만약 채소가 온갖 비타민을 고기에 넘겨줬다면 매일 저녁 채소 좀 먹으라며 싸우는 어머니와 아들, 남편과 아내의 저녁식탁은 얼마나 더 평화로웠을(?)지를.

 

그런 채소의 악독함은 <아키에이지>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키울 수도, 안 키울 수도 없는 <아키에이지>의 농장! 그래서 시작했다. 본격 <아키에이지> 농경 프로젝트! 쓰라는 리뷰는 안 쓰고 농장이나 운영하는 기자의 최후! 회의 시간에 바나나 가격 떨어졌다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지금 확인하자.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기행기 시작 전에 보는 흔한 페레의 초반 스토리.(뻥)

 

 

 

태초에 공용농장이 있었다.

 

만물을 만드는 ‘송(Song)’께서 농장이 있으라 하시매 그곳에 농장이 생겼다. 이어 수목원도 있으면 좋겠다 하시매 수목원이 생겼다. 둘이 보기에 흡족했기에 그 분께서 어여쁜 유저들을 위해 이를 공용으로 만들어 주시니라.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을 16비트 자진모리 박자로 두드리는 소리냐고 되물을 독자들을 위해 잠깐 설명하자면 <아키에이지>의 핵심 콘텐츠 중 하나는 서리, 아니 농사다. 정말 이상한 부분에서 유난히 현실적인 <아키에이지>에서는 정말 온갖 재료를 다 요구한다. 집을 만들 때는 수 백 개의 목재와 석재가 들고 요리 좀 하려면 양고기에, 보리에, 기장에, 창포는 기본이다.

 

이게 일반적인 레벨 30의 창고와 가방이다.

 

여기에 지역별 특산물에 무기와 방어구 제작까지 따지면 들어가는 재료는 한도 끝도 없다. 물론 하루 종일 전투만 할 유저라면 상관없지만 그랬다가는 일평생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떠돌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무역이 기반이 되는 게임에서 무역을 뺀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다만 모든 농사에는 공간이 필요하다. 양을 기르든 나무를 심든, 어린 왕자 복장을 하고 장미꽃과 인사를 나누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자식농사에 매진하든 모두 공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런데 널린 게 공간이잖아?’

 

맞는 말이다. 퀘스트 몬스터가 나오는 공간을 제외하면 땅덩어리 하나는 끝내주게 넓은 이 게임에서 빈 공간을 찾기란 자식 성적표 받아 든 어머니 얼굴에서 실핏줄 찾아내기보다도 쉽다.

 

어디를 가나 황량하다. 땅값 참 쌀 것 같은 동네도 많다.

 

문제는 서리범. 나무 혹은 묘목이나 가축이 자라날 때를 기다려 하이에나처럼 갈취하는 이들에게 필드에 널린 각종 재료들은 말 그대로 길바닥에 떨어진 지갑에 불과하다.

 

날틀을 타고 아무리 날아가 나무를 심어도 돌아오는 것은 범죄의 흔적을 알려주는 발자국뿐. 게다가 이 썩어빠진(농담이 아니라 동대륙 왕궁은 진짜 썩었다.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알 수 있다) 나라의 법률은 가해자 처벌에만 급급해서 피해자 보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밤새 심어둔 나무들이 빨간 발자국으로 바뀌는 마★법.

 

함무라비법전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도 실천한다면 금전적 손실은 몰라도 감정적 손실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다만, 지금의 <아키에이지>에서는 발자국을 신고하고 누군가 힘을 모아 그를 처단해주기를 바라는 게 고작. 이래서야 <드래곤볼>에서 손오공만 믿고 젖 먹던 기운까지 날려 원기옥에 힘을 보태는 지구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왜 그 자주 나오는 대사 있잖나. 이름조차 모르는 엑스트라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누군가 도와줘하는 그 장면 말이다. 물론 우리의 극사실적인 <아키에이지>에서는 주인공을 도와줄 영웅 따위는 없다는 게 ‘함 to the 정’.

 

그래서 택하는 방법이 바로 공용농장(혹은 공용수목원)이다. 모두가 사이 좋게 작물과 가축을 기르는 공용농장은 최대 5개의 재료를 심을(?) 수 있고 24시간 동안 모든 서리범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 아직 자신의 논밭이 없는 가난한 유저에게는 그야말로 이중 문에 ‘세○’이라도 달아놓은 듯한 든든한 존재.

 

오손도손. 도손오손.

 

그런데. 문제는 서버가 열린 지 사흘째 되던 날 벌어졌다.

 

공용농장과 공용수목원이 가....

 

여느 때처럼 찾은 공용농장에는 닭과 보리가 가득했다. 가득했다. 진짜 가득했다. 가득해도 너무 가득했다. 농장을 가득 메운 보리는 최면이라도 걸 듯 하늘하늘 움직이고 농장이 출근길 2호선 지하철이라도 되는 듯 빼곡하게 들어선 닭들의 시간차 웨이브는 멀쩡한 사람도 조류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야말로 갈색은 닭, 녹색은 보리인 상황! 사실 그 와중에 사랑고백 축제에 쓸 장미와 라벤다를 모아 달라는 꽃 파는 처녀의 비위(…)가 더 대단해 보였다는 사실은 여담으로 묻어 두자.

 

 

NPC 뒤로 화면 가득 날뛰는 닭들의 모습이 보인다. 스크린샷은 그나마 낫다. 실제로는 펄떡펄떡 번갈아 뛰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공용수목원의 상황은 더했다. 입구부터 녹색 그 자체를 보여주는 수목원은 아마존 밀림을 압축프로그램으로 세 번 정도 돌린듯한 빼곡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새로 나무를 심기는커녕 내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심어 놓은 나무라도 찾아 보기 위해 스크린샷 촬영모드까지 들어갔지만 허사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울창한 밀림 속에서 내 보잘것없는 다섯 그루의 서어나무는 그야말로 모래사장의 바늘, 아니 밀림 속 묘목 찾기 수준이었다. 게다가 나무 찾기에 심취한 나머지금세 나가는 길까지 잃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분 동안 나선형 계단만 따라가야 하는 탑덕후들의 성지. 탑의 도시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3D 멀미까지 찾아오는 게 아닌가!

 

이 정도면 바다 깊은 곳의 운석을 채취해 만든다는 윤분위는 사실 공용수목원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용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솔직히 몬스터만 적당히 배치해도 던전보다 10배는 실감날 듯한 위용을 자랑한다.

 

여긴 어딘가? 난 누군가? 그 전에 내 캐릭터는 어디 부근에 있는 건가?

 

역시 공짜를 지나치게 믿는 게 아니었다. 공용농장과 공용수목원을 사용할 수 없다면 답은 두 가지. 미뤄둔 생활 퀘스트를 해결해 개인용 허수아비 농장을 받거나 서리범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야외방치플레이(…)를 노리는 것. 아무래도 기자의 직분상 민간 유저(?)와의 마찰을 꺼리게 되는 만큼 일단 생활 퀘스트에 도전했다.

 

우물에서 물을 뜨고, 콩을 심고, 캐고, 감자를 심고, 캐고, 병아리도 심고, 캐고, 뭔가 동사가 이상한 것 같지만 아무튼 또 심고, 캐고. 철 주괴를 뚝딱뚝딱, 석재도 뚝딱뚝딱, 옷감은 스르륵스르륵, 가죽은 더럽게 안 나온다. 아오. 중간중간 요리도 보글보글.

 

언제 끝나나요? 이거? 심지어 중간에 시간 오래 걸린다고 신기루섬 구경도 다녀오란다. 그걸 시키는 NPC가 친절한 건지, 그깟 허수아비 하나 얻겠다고 이걸 다하고 있는 주인공이 친절한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현실보다도 부지런하게생활전선에 뛰어들 때쯤 극심한 태클을 거는 존재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병아리다. 아래는 <아키에이지>의 툴팁에 나오는 병아리 설명이다.

 

가축

병아리

2시간 52분 동안 성장하는 병아리를 풀어 놓습니다. 가축 상인에게서 구입할 수 있으며, 온대 기후에서는 더 빠르게 자랍니다. 상점 판매가 4은.

 

 

 

 

여기서 주목할 건 성장시간 2시간 52분이다. 2시간 52. 길다면 긴 시간이고 그 사이에 다른 일을 하고 오라고 NPC가 추천까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심은 지(?) 3시간이 넘은 내 병아리는 계속 크는 중. 혹시나 해서 농장에서 기다려 봐도 남은 5분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잠깐의 서버 점검 후… 어라? 병아리의 재배 시간이 다시 2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잠깐의 서버 점검 후… 어라? 시간이 다시 2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잠깐의 서버 점검 후… 어라? 시간이 다시 2시간으로 늘어났….

 

장난하냐? 이게 무슨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병아리도 아니고. 어째서 내 병아리만 2시간 30분마다 기가 막히게 뻗어주는 서버와 맞물려서 영생을 누리고 있는가? 게다가 깨알같이 보호시간은 줄어든다. 이러다가는 노인 노계(老鷄) 공경차원에서 잡아먹지도 못할 기세다.

 

너란 병아리.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병아리. 영생을 살 것만 같은 그런 병아리. 보호시간이 10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5분을 더 자라야 하는 병아리.

 

다급한 마음에 문의하는 글을 남길까 고민했지만 서버가 뻗을 때마다 우리 닭이 젊어지고 있어요라는 말을 도저히 논리에 맞게 풀어낸 자신이 없어서 포기. 다행히 이번 생애(?)에서는 정상적인 닭으로 자라났다. 고맙다. 병아리. 이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기껏 닭을 기르고 나니 나타난 새로운 도전자 생가죽은 익히 알고 있을 듯하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사슴 잡아 생가죽 3장 모을 시간에 사슴 잡아 나온 아이템을 팔아서 더 큰 돈을 만졌다는 건 비밀….

 

Anyway,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얻은 농장에! 꿈에 그리던 나무를 길러 봤더니!

 

…….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그렇구나. 우리 농장에서는 나에게 정말 꼭 필요한 나무는 달랑그루 밖에 심을 수 없었구나. 심지어 덩치 큰 서어나무 같은 건 심지도 못하는구나. 하하하. 하하하. <아키에이지>의 나무는 정말 크고 아름답구나. 하하하. 하하하.

 

왜 판타지를 찾아 나선 게임에서 이런 현실을 맛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상위 1%에 속하는 부유층 도련님들이 보면 이런 가난에 허덕이는 삶조차우와~ 이런 가난한 삶이 있다니! 어메이징~’하는 판타지로 보일 수도 있을?

 

현재 필자의 기분을 표현한 스크린샷 ①

 


현재 필자의 기분을 표현한 스크린샷 ② ‘어서와. 좌절은 처음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허수아비 농장은 그냥 적당한 작물이나 바나나 나무, 가축 같은 작은 애들을 기를 때나 쓰는 거고, 커다란 나무는 이후 얻게 되는 호박농장부터 심어야 했다. 하지만 당장 나무가 급해 농장 퀘스트를 진행한 필자에게그루의 나무는 깊은 좌절을 안겨줬고 결국 돌이켜 보면 최악으로 남을 선택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야외방치플레이 야외농사. 서리범으로부터 농작물을 지켜내기 위한 힘겨운 노력.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그 위에 치솟는 자, 그 위에서 우주를 유영하는 자, 그 위에그만하자. 아무튼 별별 인간이 다 모인 ‘서바이벌 서리’의 세계가 다음 회에 이어진다.

 


 

 

다음 회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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