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잘 만든 게임을 보면 “꼭 영화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일까?
24일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 강연한 엔씨소프트 김호식 과장은 “영화는 사람을 다룬 이야기”라고 말했다. 사랑, 우정, 분노, 취업 등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동물, 외계인을 소재로 삼고 있어도 결국은 사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말하기 위해 발전한 여러 스토리텔링 기법이 정제된 것이 영화 시나리오다. 김호식 과장은 <블레이드 & 소울>(이하 블소)에서 영화 시나리오 작법을 그대로 게임에 녹여내며 영화의 경험을 게임 속에서 살리려 했다고 밝혔다. /디스이즈게임 남혁우 기자
<블소>의 ‘리드 라이터’를 맡고 있는 엔씨소프트 김호식 과장.
■ 작은 이벤트도 영화 3장 이론에 맞춰 플롯 구성
<블소>의 플롯은 조셉 캠밸이 만든 ‘영웅의 12단계’에 맞춰서 구성했다.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 외에 세부적인 지역 이야기까지 모두 12단계에 맞춰서 구성했다. <블소>의 튜토리얼이자 오프닝에 해당하는 ‘무일봉’을 예로 들면, 주인공은 아침에 일어나 사부, 동문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가 사부인 홍석근에게 문파의 비급을 받으며 모험의 소명을 받는다.
하지만 비급을 배우는 것은 잠시 미뤄둔 채 사형들에게 먼저 기본적인 기술을 배우고 동굴에서 홍문파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통과의례를 마치고 나면 적대자인 진서연이 등장하고 무일봉이라는 게임의 무대는 마족의 소굴로 바뀐다.
주인공은 사형과 사부님이 모두 사망하는 시련을 겪지만 선녀에 의해 구원받아 대나무 마을에 도착한다. 이후 도천풍에 의해 구조돼 기력을 회복하고 진서연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삼게 된다.
<블소>는 영웅의 12단계를 발전시켜 모든 영화에 맞게 정제된 ‘3장 이론’을 사용한다. 1장에서는 주인공과 등장인물이 소개되고, 이내 위험에 빠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가 세워진다. 2장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3장은 클라이맥스에서 목표를 이루거나 또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서 결말을 내게 된다.
플롯은 그래프로 표현되는데 경험과 감정의 흐름을 따르는 그래프는 1장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해 2장 마지막에 최고조를 이루고 절정이 해결되는 3장에서는 다시 그래프가 내려온다. 그런데 현대 영화는 초반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임팩트 있는 사건이 등장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대표적이다.
<블소>의 모든 이야기는 3장 이론에 따라 제작됐으며 게임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스토리인 진서연에 대한 복수 역시 하나의 거대한 3장 이론에 따라 만들어졌다. 즉 제룡림에서 대사막까지가 1장, 수월평원이 2장, 그리고 백청산맥이 3장이 되는 것이다.
<블소> 개발진은 유저의 행동에 따라 지역의 모습이 바뀌는 위상 시스템을 통해 몰입감을 높였다. 처음엔 비 오는 대나무 마을이지만 충각단이 습격하면서 불타는 마을로 달라지고 분위기 자체가 긴박하게 바뀐다. 또한 모든 일이 해결된 이후에는 다시 평화로운 대나무 마을을 보여주며 나(유저)로 인해 이 세상이 바뀌었다는 느낌과 몰입감을 제공한다.
■ 전형적이더라도 공감 가는 캐릭터가 중요
<블소>의 캐릭터 역시 조셉 켐밸이 구축한 7가지 원형을 토대로 개발했다. 영웅은 플레이어가 되고 스승은 화중사형 등 플레이어의 멘토가 되는 캐릭터다. 관문수호자는 일종의 허들로 길목을 지키는 중간 보스이며 전령관은 유저를 모험으로 이끄는 존재다.
변신자재자는 유저를 도와주기도 하고 곤란에 빠트리기도 하며 갈팡질팡하는 캐릭터이며 그림자는 진서연 등 순수한 악이다. 마지막으로 장난꾸러기는 개그요소 등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캐릭터로 이뤄져 있다.
많은 유명 영화들은 대부분 전형성을 띠고 있다. 젊은 남자 주인공이고, 부모가 없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키워졌으며, 스승은 늙고 수염을 기르고 있고, 어느 날 절대적인 아이템을 얻어 절대 악을 물리치기 위해 떠나는 식이다. <블소>의 역시 이러한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김호식 과장은 “뻔하다는 것이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친숙하고 전달이 쉬운 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블소>는 전형적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과거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영화라면 과거의 이야기가 없더라도 배우가 그동안 살아오며 쌓아온 연륜과 깊이가 자연스럽게 연기에 묻어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는 그런 표현이 어렵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저는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왜 영린촌이 적군의 지배를 받게 됐는지, 당시 진서연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등의 숨겨진 내용을 직접 플레이하며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30년 전 어떤 일로 귀도시가 탁기에 오염된 것인지, 당시 홍석근 사부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고 진서연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체험할 수 있다.
김 과장은 “과거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무조건 주인공을 과거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용맥이나 주인공의 능력을 통해 과거의 인물에 빙의할 수 있는 등 게임의 설정과 맞물려 스토리에 개연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소>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스토리의 중심에서 거론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서브 스토리에만 등장하는 캐릭터도 있다. 이렇게 한 번만 등장하고 끝날 수 있는 캐릭터도 지속적인 노출을 통해 유저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예를 들어 막난자는 스승을 계속 바꾸는 인물로 서브 미션에만 등장한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주인공의 눈에 계속 밟히도록 배치했다. 덕분에 서브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김 과장은 “사람의 매력은 서서히 발견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블소>에서는 클로즈업으로 친밀감을 강조하고, 음성으로 생동감을 표현하고, 인물의 매력을 뽐낼 수 있는 컷신 등으로 매력을 차츰 보여주면서 캐릭터의 입체감을 살려 유저가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
■ “모든 이야기에서 남는 것은 캐릭터다”
김 과장은 “모든 이야기에서 남는 것은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스타워즈>나 <반지의제왕>의 스토리를 물어보면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금방 대답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보다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소위 ‘막장’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보는 이유는 캐릭터가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이 됐다면 구조는 부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과장은 <블소>에서 잘 만들어진 캐릭터의 예로 화중사형을 들었다. 2차 CBT 때까지만 해도 화중사형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유저들이 연계기와 합격기를 어려워한다는 사업팀의 의견이 있어서 무일봉에서 누군가 가르쳐줄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당시에는 홍문파의 동문이기도 한 도천풍이 대나무 마을에서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화중사형에게 시키는 것이 어떨까라는 의견을 냈다.
화중사형도 무일봉에서 죽는 설정이었는데 마침 연출 장면에는 사망한 화중사형이 없었다. 그래서 게시판에서도 화중사형이 죽지 않은 것이냐고 추측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사실은 화중사형의 외모가 아동을 연상시켜서 당시에 15세 이용가로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죽는 장면을 뺐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화중사형은 무일봉에서 죽지 않은 것으로 설정을 바꿔 사제인 주인공에게 무공을 알려주고 장렬하게 희생하는 결말로 바뀌었다.
김 과장은 “이를 통해 화중사형은 스승부터 장난꾸러기까지 캐릭터의 7가지 원형을 모두 소화하고 존재감 없는 캐릭터에서 희생하는 영웅으로 변신하게 됐다. 또한 당시에 유저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게임 스토리를 통해 이런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고무되기도 하고 많을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 환영과 이벤트로 내적갈등 표현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갈등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극에서 몰입감을 주고 긴장감을 주는 요소가 바로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갈등은 외적 갈등과 내적 갈등으로 나뉜다. 외적 갈등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이를 방해하는 적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반적인 게임의 방향과 같다. <블소>도 진서연에게 복수하기 위해 방해꾼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이야기의 기본 골자다.
내적 갈등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면의 고민을 이야기한다. 흔히 좋은 스토리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에서는 내적 갈등이 해결되면서 동시에 외적 갈등까지 해결된다. 대표적인 예가 <매트릭스>로, 자신이 구세주인지 확신을 못 가지던 네오가 확신을 얻게 되면서 지금까지 이길 수 없었던 스미스 요원을 쓰러트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내적 갈등이 많이 쓰이는 기법이지만 게임에서는 사용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에 캐릭터가 내적 갈등으로 유저의 조종에 안 따른다면 게임 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소>는 다른 방식으로 내적 갈등을 표현했다. 한 번 들이마시면 환영이 보이게 되는 ‘환영초’를 통해 그동안 주인공의 머릿속에 있던 홍문파를 배신한 사형의 모습이 환영으로 등장하고 이를 쓰러트리게 된다.
주인공이 자신과 자신의 문파를 욕하는 유가촌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벤트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부와 홍문파 동문을 죽인 진서연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이것이 사부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내적 갈등을 겪게 된다.
마지막으로 김 과장은 “모바일게임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MMORPG의 위기가 오고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대중에게 게임을 알릴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한다. 다만 게임이 단순히 시간 때우기 용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콘텐츠로 발전하길 바란다”며 발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