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이후로의 20년 동안 업계의 진화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그 결과 게임계 지형은 몰라볼 만큼 뒤바뀌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MMORPG, PC방, RTS와 같은 산업 트렌드는 오늘날 각자 현저히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가 시장을 휩쓰는가 하면, 뒤늦게 부활해 유저들을 사로잡은 트렌드도 있다.
디스이즈게임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지난 20년을 주름잡았던 주요 게이밍 트렌드를 살펴봤다. 2000년대 MMORPG 장르의 폭발적 성장부터, 스팀의 PC 시장 제패, 모바일 게이밍으로 확산한 소액결제 BM, 게이머 고령화를 드러내는 레트로 게이밍의 유행까지 다이내믹했던 여러 변화상을 알아보자.
2000년대는 MMORPG의 시대였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 <울티마 온라인> 등, 이 바닥(?)의 상징적 게임들이 이미 1990년대 선을 보인 바 있으며, 이들 작품의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업계가 2000년대에도 후발 주자들을 앞다퉈 내놓으면서 MMORPG 장르는 더 비대해졌다.
특히 2004년 말(국내는 2005년 초) 이뤄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출시는 MMORPG를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분수령으로 여겨진다. 월간 활성 이용자 1,400만 명을 기록하는 등 이전까지의 선배 게임들이 세워놓은 기록을 다수 갈아치우면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현재까지도 가장 거대한 MMORPG로 꼽힌다. 지금의 블리자드를 있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MMORPG 트렌드는 이후로도 상당 기간 이어졌고 지금까지 일부 지속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싱글플레이 게임 대비 압도적인 수익성이 있다. 1회 판매로 그치는 싱글플레이 게임과 달리 유저들을 지속적으로 게임에 묶어두는 MMORPG는 계속되는 추가 매출을 올리기에 훨씬 유리한 구조다.
그러나 잘 알려진바 MMORPG의 인기는 지속 하향 중이다. ‘신예’가 자주 등장하던 이전과 달리 기존 인기작 일부가 고정적 시장 파이를 나눠 갖는 모양새가 됐다. 여기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는 유저 성향 변화다. 실시간으로 타인과 어울려 협력 혹은 반목하는 ‘온라인 라이프’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 투자가 필요하다. 바빠진 상당수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현재의 중론이다.
MMORPG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그룹 게이밍’의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대체재가 많아진 점도 원인으로 꼽을 만하다. 매력적인 PvE, PvP 경험을 선사하는 멀티플레이 게임이 시중에 즐비한 상황에서 MMORPG를 고집할 이유가 현저히 줄었다. 또한 특정 MMORPG 내에서 형성되고는 하던 ‘게임 소모임’도 디스코드 등 게임 외 환경에서 형성되고 활동하는 경향이 월등히 짙어졌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국내 정식 서비스 발표 당시 현장
생성형 AI 이전에 전 세계인의 일상을 가장 광범위하게 뒤흔든 기술적 도약은 단연 스마트폰의 발명이다. 2007년 첫 아이폰 모델의 등장과 함께 도래한 스마트폰 시대는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으며, 게임계도 예외가 아녔다.
콘솔, PC에 비해 월등히 심플하고 제한적인 스마트폰의 조작 체계는 한때 모바일 게이밍의 한계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업계가 콘솔/PC와는 겹치지 않는 장르로 새 고객층을 공략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됐다. 실제로 <앵그리 버드>, <템플런>, <캔디 크러시> 등 간단한 조작의 ‘캐주얼’ 장르가 스마트폰 등장 초기부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모바일 게임은 다른 플랫폼 대비 가장 빠르고 거대하게 성장했고, 이내 콘솔과 PC를 합친 것보다 큰 시장이 됐다. 2024년 기준 글로벌 모바일 시장 규모는 약 1,005억 달러(약 145조 원)로 추산된다. 전체 게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셈인데, 통계에 따르면 대략 2019년부터 이어지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2025년부터 2029년까지 연간 5.5%~10%의 성장률을 보이리란 관측까지 나온다.
모바일 게임이 다른 게이밍 플랫폼과 규모 격차를 큰 폭으로 벌리게 된 배경에는 압도적인 보급률이 있다. 세계 스마트폰 보유자는 전체 인구의 60~70%로 추정되며, 이 비율은 매해 성장한다. 콘솔이나 PC가 주로 경제 선진국 중에서도 고소득층/마니아층 위주로 구매되는 것과 달리, 스마트폰은 저가 모델, 중고 상품을 통해 훨씬 폭넓게 보급되어 왔다.
그 결과 스마트폰을 메인 게임 기기로 사용하는 인구 비중이 커졌는데, 이에 비롯한 주목할 현상 중 하나가 모바일 게임의 장르 다변화다. 배틀로얄 장르의 유행이 대표적인데, PC/콘솔보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많은 중국에서 <배틀그라운드> 유사 게임과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이 대히트를 기록했던 바 있다.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복잡한 조작 체계의 ‘코어 게임’은 모바일 게임에서 흥하기 힘들다는 기존 인식을 뒤엎는 결과였다. 이후로 PC/콘솔 게임, 특히 인기 높은 PvP 게임을 모바일 환경에서 즐기고 싶어 하는 소비자 수요가 부각됐다. 이에 글로벌 대형 게임사들은 자사 히트작들을 하나둘 모바일 환경에 맞춰 톤다운한 ‘미드코어’ 게임으로 이식해 큰 수익을 올리는 중이다.
미드코어 트렌드가 비단 이식작에서만 유행한 것은 아니다. 캐릭터 수집/교감을 중점으로 전략적 자동 플레이 메카닉을 고도화한 ‘서브컬처’ 장르나, PC/콘솔에서도 즐길 수 있는 ‘크로스플랫폼’ 모바일 게임 상당수도 이 분류에 속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수익을 올리는 수집형 어드벤처 타이틀 <원신>도 그 예시로 들 만하다.
캐주얼 트렌드도 다양하게 진화한 점에 주목할 만하다. 특히 2017년부터는 캐주얼보다 유저의 개입을 더 극단적으로 줄인 ‘하이퍼 캐주얼’ 장르가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었다. 현재는 ‘방치형’ 장르가 하이퍼캐주얼의 말예로 활약하고 있으나, 수익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이렇듯 게임 산업의 당당한 선두로 등극한 모바일 플랫폼이지만, 시장 왜곡의 우려가 최근 커지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성적 개발노력보다는 거액의 퍼포먼스 마케팅으로 매출을 확보하는 사례가 일반화되면서, 작고 기지 넘치는 개발사들의 입지가 빠르게 줄었기 때문. 게임 핵심 콘텐츠와 거리가 먼 내용을 전면에 내세우는 유저 기만적 광고의 성행도 유사한 맥락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악명 높은 <라스트 워> 광고
소액결제(microtransaction)는 2000년대 등장, 2010년대부터 전성기를 누린 이래 지금까지 시장 내 가장 지배적인 사업 모델로 자리하고 있다. 게임 패키지보다는 게임 속 ‘작은’ 콘텐츠 판매를 주요 수입원 삼는 이 모델은, 넥슨의 <메이플 스토리> 등 일부 MMORPG 게임에서 처음 주도적으로 연구됐다.
주로 동아시아 문화였던 소액결제가 글로벌 씬에서 주요 모델로 부상한 것은 모바일 프리투플레이(F2P) 게임의 유행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게임 상품을 구매하는 관행에 익숙지 않던 모바일 유저 상당수가, F2P 게임 내 소액결제 상품에는 열린 태도를 보였고, 이것이 업계의 스탠더드로 자리 잡으면서 타 플랫폼에도 확산했다는 것.
모바일 외 시장에서 초기에 가장 인상적 성공을 거둔 F2P 게임은 2010년 출시된 <리그 오브 레전드>다. 낮은 요구사양과 무료 게임플레이에 힘입어 빠르게 전 세계에 배포된 <리그 오브 레전드>는, 캐릭터 및 스킨 등 인게임 상품 판매만으로 유수의 글로벌 게임을 뛰어넘는 실적을 올렸다. 이는 곧 전 세계 대형 게임사들의 금과옥조가 됐다.
이후 <포트나이트>, <에이펙스 레전드> 와 같이 기업 실적을 견인하는 수준의 F2P 게임들이 다수 등장했다. <팀 포트리스 2>, <배틀그라운드> 등 본래 유료였던 작품들이 F2P 전환 후 대대적인 수익성 개선을 맛보기도 했다.
F2P 게임들만이 소액결제 모델의 수혜자는 아니다.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작/판매해 매출을 올리는 이른바 ‘라이브 서비스’ 게임 전반은(게임 패키지 유료 판매 여부와 상관없이) 대부분 소액결제 시스템을 주된 수익 창출 수단으로 삼는다.

돈 잘 버는 대표적 F2P <포트나이트>
소액결제의 한 형태인 F2W 트렌드와 이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시각차 역시 유의하여 살펴볼 만한 지점이다. 동양권 최대 게임 소비 시장인 한중일 3국에서는 과금량에 비례하여 인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이른바 F2W 게임이 오래전 자리를 잡았다.
반면 서구 시장에서는 게임의 근본 가치인 ‘공정’과 ‘재미’를 해치는 개념으로 보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때문에 서양권 소액결제 상품은 대부분 인게임 성능을 좌우하기보다는 캐릭터 외양을 바꾸는 코스메틱 상품에 편중되어 있다.
F2W를 기피하는 기조는 흥미롭게도 국내 시장에도 유입되어 점점 성행하는 추세다. ‘소액’ 결제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과도한 결제를 유도해 온 국산 F2W 게임들에 대한 유저들의 피로가 누적된 결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적정 수준의 과금 모델을 지닌 F2W MMORPG와 모바일 게임들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편, 동서양 게이머 모두 소액결제 상품의 ‘무작위성’에는 공통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으며, 실제로 국내외 매출 최상위 게임 상당수의 주요 BM은 확률 기반 아이템이다. 다만 일부 유럽 국가를 선두로 미성년자 확률형 아이템 구매 금지, 심지어는 완전 금지 입법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변화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18년 당시 해외 확률형 아이템 규제 이슈 타임라인
2010년대부터 온라인 방송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게임플레이 실황을 중계하는 ‘게임 방송’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대도서관’, ‘우왁굳’ 등 1세대 게임 방송인들이 아프리카TV(現 SOOP) 플랫폼에서 활동하며 트렌드의 시작을 알렸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 역시 국내 게임방송 문화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미국의 트위치가 유행을 선도했으며, 이는 유튜브, 페이스북, 빌리빌리, 도유 등 후발주자들이 게임 방송 사업 혹은 라이브 스트리밍 사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게임 방송과 게임 산업은 긍정 혹은 부정 중 어느 한쪽으로 규정하기 힘든 관계를 맺고 있다. 현시점 전 세계 게임사들에 게임 방송은 가장 먼저 고려되는 마케팅 수단이다. 매체 광고나 옥외 광고 등 전통적 채널과 비교했을 때 타깃 청중에게 마케팅 캠페인이 도달할 확률이 월등히 높아서다.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는 단적인 예시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를 통해 발표된 통계를 들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1년 동안 일주일에 게임방송을 거의 매일 (6일~7일) 시청하는 열혈 시청자 비율은 전체 게이머 중 20%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년간 한 번 이상이라도 시청한 비율은 72.9%인 반면, 한 번도 시청하지 않은 비율은 27.1%였다.

국내 게임방송 이용 추세를 조사한 2023 게임백서 내용 중
게임 방송은 스팀, PS, Xbox 등 디지털 게임 상점 내 광고와 비교해서도 작품의 디테일과 소비자(스트리머) 반응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장점이 있다. 더 나아가 어떤 타이틀이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자주 노출되어 ‘대세감’을 형성한다면 네트워크 효과(특정 재화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해당 재화를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의 규모에 영향을 받는 효과)도 누릴 수 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게임 소비를 외려 저해한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이는 특히 스토리 중심의 게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방송을 통해 스토리를 끝까지 확인한 유저들의 경우 해당 게임을 직접 구매해 플레이해 볼 유인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이 때문에 일부 개발사들은 방송인들에게 일정 분량 이하의 스토리만 노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달 학술지 ‘엔터테인먼트 컴퓨팅’에는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논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인디애나대학교, 경북대학교, 고려대학교 공동 연구진은 트위치에서 방송되는 만 개 이상 게임을 조사한 결과, 게임 방송이 게임 판매에 긍정적 효과를 미치지만, 스토리 게임에서는 그 효과가 반감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베리드 스타즈>에 등장하는 스트리밍 제한 경고
밸브의 ‘스팀’은 원래 밸브 게임들의 통합적 관리를 위해 탄생했던 편의성 프로그램이었다. 그랬던 스팀이 디지털 게임 판매/배포를 겸하는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ESD) 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은 2005년부터다.
고속 인터넷망이 보편화되던 시기에 맞물려 도입된 이 정책은 밸브와 스팀, 더 나아가 게임 산업 전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변곡점이 됐다. 단순 유통 혁명을 넘어선 산업 내 다양성의 진일보로 평가되는데, 이전까지 중간사업자를 통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했던 게임 유통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함으로써 중소규모 개발사들이 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발판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스팀이 보여준 ESD 사업의 잠재력과 확장성을 이내 파악한 EA 등 여타 대기업들은 자사 게임 중심의 ESD를 각자 런칭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스팀의 유의미한 경쟁자가 되지 못한 채 하나둘 역사 속으로 스러져갔다. 스팀의 독보적인 친유저 정책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 다른 플랫폼들의 패인으로 꼽힌다.
스팀을 지금의 입지에 올려놓은 가장 대표적 초기 전략은 ‘스팀 세일’이다. 밸브는 2004년 처음 세일 행사를 도입했는데, 유통 마진이 존재하지 않는 ESD로서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말 그대로 파격적 할인 폭을 선보이면서 게이머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물론 가격 정책만이 스팀의 무기였던 것은 아니다. 서비스 시작부터 현재까지 스팀은 가장 다양하고 강력한 커뮤니티 기능, 모딩 지원, 편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유저들을 스팀 플랫폼에 묶어두는 주요 수단이 되고 있다.

기능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는 스팀. 그림은 '게임 숨기기' 기능
뛰어난 내장 DRM(디지털 권리 관리) 기능과 자동 업데이트/패치 기능은 이전까지 게임 산업의 큰 골칫거리였던 불법복제 문제를 고사시키는 효과도 낳았다. 복잡한 과정과 바이러스 감염 위험 등을 감내해야 하는 불법 복제 게임과 달리, 원클릭으로 모든 수고를 덜 수 있는 스팀 플랫폼의 편의성은 정품 구매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그 결과 게임 불법복제는 대부분 근절된 상태다.
이렇듯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현재 스팀은 명실상부 PC 게이밍의 일인자로 등극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10년 전인 2015년 한 해 2,500개 출시되었던 스팀 게임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 2024년 들어서는 19,000여 개를 기록했다. 이는 2023년에 대비해서도 32% 늘어난 수치다.
스팀을 향한 비판도 없지 않다. 대표적으로 에픽스토어의 팀 스위니 CEO는 스팀의 30% 판매수수료가 착취적이라고 비판하며, 여타 게임 플랫폼 수준으로 수수료가 인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밸브가 스팀의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혐의도 종종 제기되며, 실제로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기도 하다.
밸브에 직접 책임을 묻기는 힘들지만, 스팀의 ‘얼리액세스’ 제도 시행 이후 생겨난 폐단도 존재한다. ‘얼리액세스’는 아직 개발 중인 게임을 미리 판매하는 제도다. 개발자금 조달이나 유저 피드백이 필요한 개발사에 큰 도움이 되지만, 얼리액세스 단계에서 개발을 포기하는 사례가 발생해 물의를 빚어 왔다. 이로 인한 유저 피해를 막기 위해 밸브는 최근 1년 이상 유기된 게임일 경우 해당 사실을 스토어에서 경고하는 시스템을 새롭게 추가하기도 했다.

이제 유기된 얼리액세스 게임에는 경고가 출력된다.
2005년 ‘게임 개발의 대중화’를 선언한 유니티 엔진 등 비교적 진입장벽 낮은 개발툴들이 등장하고, 앞서 언급된 스팀 플랫폼이 인디 게임 배포의 메카 역할을 맡으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인디 게임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면서 ‘레트로’ 트렌드도 여기 보조를 맞추게 된다.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이뤘던 8비트/16비트 고전 게임들은 시각적 재현 난도가 비교적 낮은 반면 여기에 애정을 품은 유저의 모수가 충분하다. 이에 당대의 그래픽 기술인 ‘픽셀 아트’를 빌려와 만든 작품이 다수 출시했다.
대표적으로 2008년 작 <브레이드>, 2010년 작 <슈퍼 미트 보이> 등을 이 시기 대표 인기 픽셀 게임으로 꼽을 수 있다. 그다음 10년 동안에도 추세는 이어져 <핫라인 마이애미>(2012), <삽질 기사>(2014), <언더테일>(2015) 등 작품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지나면서 픽셀 게임은 레트로 게임 씬의 한 지류가 아닌 본류에 등극한 것으로 볼만하다. <언더테일>(2015), <스타듀밸리>(2016), <데드 셀>(2018), <카타나 제로>(2019) 등 시대의 한 획을 그은 픽셀 게임들이 이후 다수 등장했다.

대표적 픽셀아트 게임 <스타듀 밸리>
그런가 하면 기존하는 특정 게임의 그래픽/시스템을 일신해 재출시하는 리마스터/리메이크가 또 하나의 ‘레트로’ 트렌드로 자리한 바 있다. <파이널판타지>, <바이오하자드>, <데드 스페이스>, <다크소울>, <매스 이펙트>, <완다와 거상> 등 장르를 규정했거나 발전시킨 유수의 작품들에 새로운 손길이 가해졌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PS1으로 대표되는 초창기 3D 게임의 분위기와 비주얼을 재현해 만든 ‘레트로 3D’ 스타일의 게임들도 이와 같은 ‘레트로’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유명 공포 개발자 ‘칠라스 아트’의 여러 게임들이나, 호러 생존 <시그날리스>, 이른바 ‘부머 슈터’로 불리는 <울트라킬> 등 슈팅 게임들도 여기 속한다.
비주얼과 콘텐츠 양쪽에서 레트로 트렌드가 성행하는 가장 뚜렷한 원인으로는 게이머들의 ‘고령화’가 꼽힌다. 게이머들의 연령은 여지없이 상승하고 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게이머의 평균 나이는 만 34세에 달한다. 게임 산업의 1차 부흥기였던 1980~1990년대, 슈퍼닌텐도나 PS1 등으로 게임을 접했던 아동·청소년들이 이제는 부모 세대가 되어 게임의 주요 소비자층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콘솔/PC 패키지 게임을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는 최근 업계 안팎의 분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코로나 이후 3년여 동안, <발더스 게이트 3>, <검은 신화: 오공>, <메타포: 리판타지오>, <킹덤 컴 딜리버런스 2>, <스플릿 픽션> 등 좋은 성적의 패키지 게임이 연이어 나오면서 패키지 게임 트렌드가 활기를 띠었다. 부분적으로는 <콘코드> 사례로 대표되는-그러나 기실 수년 전부터 이어져 온-대작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대대적 실패 누적이 가져다준 반사이익으로 읽히기도 한다.
국내 업계와 정권도 트렌드에 주목하는 듯하다. 최근 몇 년 새 , <스텔라 블레이드> 등 국산 패키지 게임들이 글로벌 코어 게이머들의 엄격한 잣대에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흥행했다. <인조이>, <더 퍼스트 버서커 카잔>, <붉은 사막> 등 여타 국산 콘솔/PC 패키지 기대작들도 올해 출격을 대기 중이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 일변도였던 우리 대기업들의 지난 습관을 돌아볼 때, 이것은 충분히 기념비적 변화다. 시장 트렌드에 대한 반응이 조금 굼뜨기 마련인 각급 기관의 지원사업에서조차 올해는 한결같이 ‘PC/콘솔 패키지 게임’이 핵심 사안으로 언급된다. 정황상 패키지 게임이 ‘부활’해 새롭게 트렌드가 되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정말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자주 간과되는 사실 중 하나는 부활이 사망을 반드시 전제한다는 것이다. 패키지 게임이 ‘부활’하려면, 이전에 사망선고가 이뤄졌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지표를 살펴봐도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출격을 앞둔 <더 퍼스트 버서커 카잔>
그렇다면 PC/콘솔 게임의 부침과 최근 강세를 향한 국내외 일각의 호들갑(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은 어디에 기인할까? 글로벌 업계에서 시총 최상위를 다투는 일부 기업의 10년 안쪽을 돌아보면, 정답의 윤곽이 얼마간 드러난다.
이들의 포트폴리오를 펼쳐보면 앞서의 해석이 얼추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소니, EA, 넥슨, 워너브라더스, 유비 등 유수의 공룡 게임사들은 지난 5~10년 새 라이브 서비스로 방향타를 틀었다가, 암초에 거세게 부딪힌 뒤 항로를 재평가 중이다. 그러니 이들 사례만 추려서 살펴보자면 ‘라이브 서비스 쇠락 후 패키지 게임에 힘이 쏠린다’는 분석도 엉뚱하지만은 않은 것이 된다.
다만 이는 뭇 게이머들의 체감과는 다르다. 패키지 게임의 부진, 혹은 그 부활은 트리플A 시장 중에도 어느 일부에 국한된 추세다. 적어도 소비자 입장에서 패키지 게임은 지난 20년간 한 번도 그 물줄기가 중단된 적 없는 게이밍 트렌드다. 심지어 코로나 여파로 ‘대작 가뭄’이 이어졌던 몇 년 사이에조차 작고 영특한 게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고고히 빛났다.
같은 맥락에서, ‘라이브 게임’이 끝물에 다다랐다는 주장 역시 어폐를 지적할 만하다. 2024년부터 올해까지 업계에는 <헬다이버즈 2>, <마블 라이벌스>, <패스 오브 엑자일 2>, <몬스터 헌터 와일즈>와 같은 걸출한 타이틀이 선보여 각자 사랑받았다. 출시 이후의 유저 추이에서는 각자 차이가 크지만 모두 서비스를 이어갈 만큼의 팬덤은 유지 중이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선도 기업’ 몇몇의 사업적 결정이 시장 전반 흐름을 좌우한다는 종래적 시각을 내려놨을 때야 업계의 현재를 바로 읽을 수 있다. 극장에 걸리는 두 자릿수 작품들로 그해 전 세계 영화 관객의 담론이 압축되던 시절은 오래전 끝났다. 한 해 2만 개 신작이 쏟아지는 게임 업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찬사 일색인 <몬스터 헌터 와일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