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탈> 시리즈를 통해 개발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종종 들어볼 수 있는 이야기다. 2007년 출시한 밸브의 일인칭 퍼즐 게임 <포탈>이 PC/콘솔 게임 산업에 지녀 온 파급력은 그만큼 크고 또 깊다.
재기 넘치는 게임 디자인과 번뜩이는 유머, 서스펜스 넘치는 스토리로 전 세계를 매료시킨 이 시리즈가 한 대학생의 졸업작품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이제 업계의 유명한 전설 중 하나가 됐다. 수년 전, 그 전설의 주인공 ‘지프 바넷’이 한국 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많은 국내 팬이 반가움을 표한 바 있다.
한국어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는 바넷은 지난 3월 한국어 낱말 맞추기 웹게임 <쌍근>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26일에는 일산 킨텍스 플레이엑스포 현장을 찾아 팬 미팅과 특강을 진행했다. 이날 바넷은 ‘불가능한 꿈을 꾸세요’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불가능한 꿈들이 어떻게 실현되어 왔는지 전했다. 그 내용을 간추려봤다.
강연을 앞두고 포즈를 취한 지프 바넷(맨 앞 왼쪽). 이날 강연에는 사전 시청자가 400명 이상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바넷은 강연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챕터로 나누어 전달했다. 먼저 ‘과거’는 게임 개발자와 한국어 능통자의 꿈을 동시에 꿨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다.
그는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던 중, 기분 전환 삼아 여러 게임을 플레이했고, 이때 <팡야>, <라그나로크> 등 한국 게임을 접하며 빠져들었다. 그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산 게임을 했을 때 만족감이 들었다”고 전했다.
한국 게임을 플레이하지만 한국어는 전혀 하지 못하던 당시 그는 첫 번째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국어로 된 게임을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이 꿈은 후술할 <쌍근>을 통해 수십 년 만에 현실이 됐다.
그가 한국어 학습에 대한 구체적 희망을 품게 된 계기는 어느 날 룸메이트들과 함께 시청한 한국 일일 드라마 <사랑은 이런 거야>였다. 이때 여주인공이 ‘<스타크래프트>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본 그는 드라마에 게임이 언급하는 모습에 매료되었고, 한국 일일드라마에 빠졌다 이후 한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한편 졸업 시기에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차원이동 퍼즐 게임 <나바큘라 드롭>을 통해 ‘밸브’에 입사하게 된다. 이 또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는 <포탈>, <레프트 포 데드>, <카운터 스트라이크> 등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 게임들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한편 그는 밸브 입사 후에도 불가능한 꿈을 하나 더 품고 있었는데, 이것은 스스로 보드게임을 디자인해 보는 것이었다. <포탈>을 소재로 실제 제작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너무 재미없게 만들어져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고비를 넘기게 해준 것은 놀랍게도 한국어였다. 해당 시기에 바넷은 자신이 다녔던 디지펜 공과대학의 부산 캠퍼스 교수로부터 하나의 부탁을 받았다. 학생들에게 밸브 본사 견학을 시켜주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한국어가 어눌했던 그였지만, 손수 한국어 답장을 해 학생들에게 실제로 투어를 시켜줄 수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그의 ‘포탈 보드게임’에 관심을 보였고, 바넷은 한국어로 현재의 게임이 재미없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게임을 바꿔놓을 결정적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고, 이를 통해 게임을 바꿔 실제 출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바넷은 “망할 뻔한 게임을 한국어로 설명하다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며 한국어가 보드게임 제작의 꿈을 이루는 도약대가 되었다고 전했다.
개인 사정으로 밸브를 떠나려던 무렵, 그는 스팀 플랫폼 시스템 상에서 한국어와 관련된 중요한 업데이트 3가지를 진행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는 스팀 앱의 한국어 검색 기능을 수정했다. 이전까지 스팀 검색창에는 자음 단위로 제목을 입력했을 경우 아무런 추천 게임이 표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포탈>을 검색하기 위해 ㅍ을 입력해도 자동 추천 창은 공백 상태로 표시됐다. 영어 사용자와는 상이한 경험인 셈이다.
한국 게임을 찾으려 할 때마다 이런 불편을 스스로 겪었던 바넷은 결국 스팀을 개발 중이던 동료를 도와 검색 시스템을 개선했다.
다음은 한국어 욕설 필터링 기능이다. 스팀은 커뮤니티 내 대화에서 욕설을 걸러 주는 기능을 기본 탑재 중인데, 이것이 한국어에는 잘 적용되지 않았다. 필터링 기능을 만드는 직원이 한국어 동사 및 형용사 변형 방법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시청을 계기로 한국어를 공부해 온 바넷은 해당 동료를 도와 한국어 욕설 필터링 기능을 개선했다.
마지막으로 밸브의 VR 역작 <알릭스>에서도 한국 게이머를 위한 개선에 나섰다. 게임은 ‘알아들었다’는 의미의 ‘got it’이 ‘받았습니다’로 번역되는 등 기초적 오류가 많았다. 바넷은 게임 전반의 문맥을 고려해 우리말 대사를 어색하지 않게 고치는 절차를 밟았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스팀의 한국어 검색 추천 기능
한국과 한국어, 한국 게임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이후에는 주변의 의견으로 일주일에 두 번 한국 게임 플레이 영상을 개인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하고 있다. 영상은 200개가 넘었고, 시청자 수도 4,000명 이상이다. 한국어 게임을 플레이하며 가지게 된 인연으로 한국 게임 <세이비어 오브 디 어비스> 등 개발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영어판 번역을 맡기도 했다.
게임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을 소재로도 소통 중이다. 대표적으로 가수 이소라의 열혈 팬이라고 밝힌 그는, 이소라의 노래 25곡을 영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로 된 30분 분량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업로드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재 실현 중인,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불가능한 꿈들을 전했다.
먼저 그는 ‘한국어 게임’을 만들고 싶다던 꿈대로 <쌍근>을 서비스하고 있다. 그가 <쌍근>을 개발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보다 흥미롭다. 그가 재직 중인 캐나다의 ‘스노우드 인 스튜디오’는 전 세계 거래처의 게임을 제작하는 외주제작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친목을 다질 목적으로 거래처와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문제는 스웨덴의 거래처와 일하면서 벌어졌다.
스웨덴과의 시차 때문에 함께 게임을 즐기기가 어려웠던 것. 이 때문에 처음으로 비동기 퍼즐 게임으로 친목을 다지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사용된 것이 조들(Xordle), 피블(Fibble), 워믈(Warmle)등의 단어 맞추기 게임이었다. 이를 플레이해 본 바넷은 한국어로 같은 장르 게임을 만들길 원했고, 이에 <쌍근> 개발을 시작한 것.
그는 게임 룰을 간단히 정해 한국 언어교환 파트너들과 카톡으로 간단히 게임을 진행했고, 이를 조금씩 발전시켜 <쌍근>을 만들었다. 과거스팀 플랫폼에서 검색창 문제를 해결했을 때 쌓아둔 한글 프로그래밍 경험이 도움이 됐다.
지난 3월 런칭 이후, 게임에는 하루 수천 명이 접속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누적 접속자들은 중복을 제외하고 50만 명 이상이다.
이용자들을 위해 그는 발로 뛰는 노력 중이다. 처음부터 단점으로 지적된 인게임 단어 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수동으로 작업 중이다. 실제 국어사전의 단어를 자동으로 게임에 넣는 방법은 피했다. 유명하지 않은 도시, 오래된 역사적 인물의 이름 등 낱말들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용자들이 실제 입력한(그러나 아직 게임에 추가되지 않은) 단어를 일일이 검수한 뒤 게임에 넣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처음 6,000개였던 단어 수는 그렇게 현재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앞으로 그는 계속 유튜브로 한국 인디게임 스트리밍을 진행하면서 특별한 프로젝트도 함께 계속할 예정이다. 예를 들어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러 한국 개발자들을 처음으로 만나 직접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또한 불가능해 보였던 꿈이지만 플레이엑스포 덕분에 실현할 수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인터뷰 영상은 편집을 거쳐 업로드될 예정이다. 또한 게임 <엑스인베이더>의 영어 번역도 완료했는데, 이 게임도 추후 출시된다.
그는 계속해서 불가능한 꿈을 꿔볼 생각이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이소라의 30주년 콘서트를 관람했는데, 이 역시 불가능할 줄 알았지만 실현한 바 있다. 그래서 그의 다음 꿈은 이소라가 (언제 나올지 모를) <포탈> 차기작에서 악역 ‘글라도스’의 목소리를 맡아주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꿈이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바넷은 “많은 한국분들이 저를 사랑해 주시는 것 같아 행복하다. 여러분도 많은 불가능한 꿈을 꾸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