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콜성 혼란에 끙끙대던 기자를 구해준 것은 “원래 그런 맛이야”라는 옆자리 선배의 설명이었다. 대한민국에 냉면이란 함흥냉면뿐인 줄 알았던 충청도 ‘촌놈’에게 평냉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평냉 특유의 심심한 맛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아마도 무의식중 기대했던 새콤달콤한 맛과는 격차가 워낙 컸기 때문일 것이다.
신작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의 감상을 설명하기 위해 서문을 길게 적어 봤다. 크래프톤에서 분사한 플라이웨이게임즈 스튜디오 첫 작품 <트리니티 서바이버즈>는, 삼인조 팀을 구성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내용의 ‘뱀파이어 서바이버 라이크’(이하 뱀서류) 게임이다.
게임의 첫인상은 일반적 뱀서류와 사뭇 다르다. 물 흐르듯 즐길 수 있는 여타 뱀서류와 비교해 더 타이트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반면 빌드 만들기의 재미는 옅어 보인다. ‘기대했던 맛’이 아니란 이유로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플레이해 보면, 이 게임이 가진 고유의 맛이 진하게 전해져온다. 어떻게 다른 게임인지, 무엇을 기대하면 좋을지 알아보자.
인디 히트작 <뱀파이어 서바이버>로 시작된 이른바 ‘뱀서류’ 트렌드는, 몇 가지 공통의 문법이 확립되면서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상황이다.
뱀서류는 자동 발사되는 무기로 무리 지은 적을 막아 살아남는 기본 메커니즘을 공유한다. 그 외에도 ▲‘경험치 보석’을 모아 레벨업 하는 성장 시스템 ▲레벨업 때마다 새 무기나 업그레이드를 고르는 로그라이크 요소 ▲랜덤 아이템 드롭 ▲중간 보스 및 최종 보스 등 공통적 요소가 많다.
장르의 최대 매력 포인트는 짧은 시간 내에 강력한 빌드를 완성해내는 만족감, 그리고 그 빌드를 이용해 적을 분쇄할 때 오는 쾌감이다. 이것은 모두 <디아블로>로 대표되는 ARPG 장르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두 장르의 결정적 차이는 투입되는 시간 및 노력에 있다.
ARPG는 빌드 연구, 아이템 수집, 보스/던전 공략 등 모든 활동에 시간이 많이 든다. 반면 뱀서류는 이 과정을 30여 분 이내로 압축해 즐길 수 있다. 간결한 게임 템포에 맞춰 컨트롤 역시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방향키만으로 조작 가능하거나, 여기에 버튼 한두 개가 추가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단순한 컨트롤’은 양날의 검일 수 있다. 접근성을 높이기에는 좋지만, 게임에 질리는 원인이 될 수 있어서다. 그런데 뱀서류 흥행작은 정반대로 강한 ‘중독성’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그 비결은 육성 쪽에 있다. 뱀서라이크는 습득한 아이템(혹은 파워업)의 효과가 바로 드러나는 구조여서 육성 쾌감이 크다. 한편 육성 과정은 라운드마다 무작위성을 띠기 때문에, 한 번 아쉽게 죽더라도 ‘잭팟’을 노리는 심정으로 다음 판에 바로 돌입하게 된다. (실제로 <뱀파이버 서바이버>의 아버지 루카 갈란테는 카지노 업계 프로그래머 출신으로, 당시 습득한 아이디어를 게임에 적용했다고 말한 적 있다)
컨트롤 최소화는 '뱀서류'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로 여겨진다. 가만히 있어도 상관 없는 구간도 꽤 많다. (출처: 폰클)
한편 <트리티니 서바이버즈>에서 빌드 완성 쾌감은 ‘처음에는’ 잘 와닿지 않는다. 이것은 캐릭터를 3명이나 활용하는 게임 콘셉트와 관련이 있다.
우선 게임의 기초 플레이 방식을 보자. 유저는 캐릭터를 셋 고르고 그중 하나를 ‘리더’로 설정해 라운드에 돌입한다. 해당 캐릭터는 ‘리더 스킬’로 불리는 고유의 액티브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캐릭터 마다 리더 스킬은 두 가지가 있고, 전투 시작 전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라운드가 시작되고 나면 전투 도중엔 리더 스킬을 교체할 수 없다.
캐릭터들은 리더 스킬 외에도 ‘기본 공격’ 등 총 5개 스킬 풀(pool)을 가지고 있다. 다른 뱀서류 게임처럼 ‘기본 공격’ 스킬은 라운드 시작부터 장착 상태고, 나머지는 레벨업을 통해 추가로 최대 2개씩 해금한다.
한 번에 세 개씩 선택지가 나오는 건 다른 뱀서류와 같지만 한 번에 여러 레벨의 선택을 몰아서 할 수 있다.
레벨업 마다 주어지는 선택지는 3개로, 대다수의 동종 게임과 같다. 그러나 이때 등장할 수 있는 옵션의 종류가 더 많다. 각 캐릭터는 라운드 안에서 최대 3개 스킬을 장착할 수 있고, 스킬 업그레이드 선택지 또한 다양하기 때문이다. 스킬마다 범위 확장, 공격 속도 증가, 피해 증가, 쿨타임 증가, 효과 변경 등 여러 옵션이 존재한다.
이에 따른 또 하나의 차별성은 매우 빠른 레벨업 속도다. 특히 게임 초반에는 잠시만 정신을 놓고 있어도 4~5레벨이 쌓이는 일이 빈번하다. 다른 뱀서류 게임들은 레벨업 순간에 게임이 일시 정지되고 선택지가 뜨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에서는 탭을 눌러 직접 레벨업 창을 연 뒤, 이렇게 누적된 레벨업을 한 번에 처리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레벨업을 빠르게 설정한 이유는 한 라운드가 짧고 육성 대상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리더스킬 포함 최대 10개 공격 스킬과 3명의 캐릭터를 10~15분가량의 짧은 플레이타임 동안 유의미하게 성장시키려면 잦은 레벨업이 필수였을 듯하다.
캐릭터당 스킬이 많아 그만큼 선택해야 할 것도 많다.
이처럼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의 육성은 짧은 시간에 다양한 선택지가 쏟아지는 방식인 탓에, 유저 스스로 업그레이드를 잔뜩 선택하면서도 빌드의 전체 윤곽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초반에는 다른 뱀서류에 비해 육성의 중요성이나 재미가 별로 크지 않은 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인상을 한층 더 심화하는 것은, 다른 뱀서류에 비해 크게 강조되어 있는 액션 요소다.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의 강한 액션성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시스템 중 하나는 전투 UI다. 게임상 거의 모든 적은 다가오는 데서 끝나지 않고 별도의 공격 액션을 취하거나 원거리에서 투사체를 날리는데, 이때 범위를 알려주는 인디케이터 UI가 출력된다.
인디케이터는 유저에게 ‘회피 기회’를 주기 위한 요소로서, 뱀서류보다는 MMORPG, ARPG, 3D 액션 등 ‘피하고 때리는 액션’이 중요한 게임 장르에서 더 애용되는 것이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의 게임플레이는 ‘대시 회피’로 활로를 찾으면서 리더 스킬과 스킬 타게팅을 이용해 적을 섬멸하는, 액션 게임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른바 '잡몹'도 대부분 공격 전에 인디케이터가 나온다.
스페이스바로 사용하는 ‘대시 회피’는 최대 스택 횟수가 2회로 정해져 있으며 쿨타임이 지나면 한 스택씩 충전된다. 사용하면 일정 거리를 무적 상태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캐릭터 특성 등 여러 조건에 따라 3회 이상 스택되기도 하며, ‘대시 후 이동속도 증가’나 ‘대시 거리 증가’ 등 관련 업그레이드 역시 다수 존재한다.
‘리더 스킬’은 우클릭으로 사용하며, 단발성 스킬과 길게 눌러 사용하는 ‘모아쏘기’ 스킬으로 나뉜다. 모아쏘기의 경우 총 3단계로 나뉘며, 더 오래 모을수록 위력이 커진다.
‘타게팅’은 마우스로 이뤄지며 역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직사 무기들은 마우스의 지시 방향으로 발사되며, 곡사 무기들의 경우 마우스 커서 위치상에 떨어지는 방식이다.
랜덤하게 습득하는 ‘사용형 아이템’도 액션을 보조한다. ‘시프트’키로 발동하며, 적을 직접 공격하는 유형, 아군을 보호·보조하는 유형 등이 있다. 적을 한 점에 모으는 등의 유틸형 아이템도 존재한다.
이 정도의 공격 밀도는 사실 널널한 편에 속한다.
다른 뱀서류에서는 적들이 접근하는 형태나 규모를 주로 신경 쓰면 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에서는 모두가 각기 다른 공격 행동을 취한다. 특히 강한 적일수록 지면을 많이 뒤덮는 공격을 가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반응해 정확히 피하는 컨트롤이 중요하다.
회피뿐만 아니라 공격 역시 정교함이 요구되는 편이다. 다른 뱀서류처럼 ‘가만히 있어도’ 전방위를 철통 방어해주는 빌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특정 지역과 방향에 강력한 공격을 주기적으로 가하는 방식의 스킬이 월등히 많기 때문.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선 적에 유효한 타격을 줘 병력을 계속 줄여나가야 하며, 그러려면 정확한 타게팅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트리니티 서바이버즈>는 취할 수 있는, 그리고 취해야 하는 공격·방어 행동이 다른 뱀서류에 비해 촘촘하고 급박한 게임이다. 결과적으로 동일 장르 안에서는 능동성이 월등히 강조된다.
잘 피하는 것이 첫 번째다.
이처럼 차별화된 포지셔닝을 가지고 있지만, 게임을 더 플레이하다 보면 <트리니티 서바이버즈> 또한 결국 다른 뱀서류와 유사한 ‘빌드 완성’의 재미를 가진 타이틀이란 것이 점점 명확해진다. 다만 고유한 게임성에 맞게 변주되어 있을 뿐이다.
<트리니티 서바이버즈>의 육성은 앞서 이야기한 능동적 액션의 맥락 안에서 보았을 때 비로소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한 성능 뿐만 아니라 원하는 플레이스타일까지 고려해 빌드를 짜맞추는 재미가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전방으로 발사되는 강력한 리더스킬에 포커스를 맞춰 빌드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는 이동 속도 및 대시 업그레이드와 리더 스킬 업그레이드에 집중해 볼 수 있다. 높은 기동력으로 적을 따돌리며 버티다가, ‘한 방’으로 몰려 있던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다.
‘아티팩트’는 이런 빌드 연구의 재미에 추가로 기여하는 요소다. 플레이를 반복하면 조금씩 해금할 수 있는 일종의 ‘공용 업그레이드’ 콘텐츠로, 팀 구성과 관계없이 모든 라운드에서 등장할 수 있다.
리더 스킬은 빌드의 핵심이 될 때가 많다.
상술한 빌드의 경우 ‘이동속도 증가 보너스만큼 공격력 증가’, ‘대시 후 이동속도 증가’ 등 보너스를 제공하는 아티팩트와 조합하면 더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반대로, 라운드에서 습득한 아티팩트를 중심으로 빌드를 맞춰나가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빌드 완성 재미를 극대화하는 마지막 요소는 ‘전설 성장’이다. 전설 성장은 중간 보스격 몬스터를 잡았을 때 드롭되는 파워업으로, 보유 스킬의 비헤이비어(작동 방식)를 변화시키면서 이전과 다른 전략을 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아르기스’의 ‘회전 칼날’은, 원래 적들을 히트하며 날아가 사라지는 스킬이지만, 전설 성장을 통해 캐릭터에게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스킬 공격력이 두 배로 늘어나는 동시에 캐릭터의 근거리 방어가 강화되는 셈이다. ‘회전 칼날’ 스킬 육성에 집중하고 이를 보조해 줄 다른 스킬 및 아티팩트와 조합하면 강력한 빌드 위력을 맛볼 수 있다.
아티팩트는 육성 요소이기도 하다.
<트리니티 서바이버즈>는 다른 ‘뱀서류’와는 상반되는 매력에 집중한 게임이다. 컨트롤 최소화를 포기하고 다이나믹한 액션에 승부를 걸었다.
‘익숙한 맛’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독자적 퓨전 장르 게임으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반대로 얘기하면 뱀서류 특유의 미니멀한 플레이를 즐기고 싶은 유저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게임일 수 있다.
<뱀파이어 서바이버>를 재미있게 플레이하면서도 늘 라운드 끝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는 게 힘들었던(그러다 실제로 잠들기도 했던) 기자에게는 안성맞춤의 경험이었다. 장르 내에서는 상당히 일탈적인 포지셔닝이지만, 분명히 존재할 수요층을 찾아낸 감각은 탁월하다. 진정한 의미의 틈새 전략인 셈이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간혹 든다. 아군 캐릭터 공격을 화들짝 놀라 피하기도 한다.
다만 개선이 필요한 사항들은 남아 있다. 가장 시급해 보이는 것은 시인성 강화다. 주인공들과 적들이 난사한 공격이 화면을 온통 뒤덮는데, 그중 위험한 것과 안전한 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트리니티 서바이버즈>는 코옵 메커니즘을 강조하는 게임이지만, 실제 체험은 어려운 상황이다. 매칭 풀이 아직 작기 때문이다. 수 시간에 걸쳐 특정 스테이지를 돌파한 뒤에만 코옵 콘텐츠 입장이 가능해지는 시스템이 매칭을 더욱 악화시켰다. 제작진은 게임 시작부터 코옵 도전이 가능하도록 업데이트를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