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가 기존의 기술과 대비하여 지니는 혁신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게임 산업이 주목하고 있는 생성형 AI의 장점 중 하나는 콘텐츠를 무한히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 게임 속 NPC들은 개발자가 사전에 입력해 둔 텍스트로만 유저와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LLM을 이용해 유저의 모든 질문에 시시각각 다른 대답을 내놓는 인게임 NPC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LLM 기술이 게임에 온전히 녹아들기에는 아직 발목을 잡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질문한 내용과 상관없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내놓는 ‘할루시네이션’ 문제가 대표적인데요. 이것은 원천기술 수준에서 해결이 아직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AI 게임 개발자들은 이 현상을 인게임에 활용하거나 우회하는 방안을 다양하게 모색 중입니다.
2024년 1월 출시한 웹게임 <인피니트 크래프트>은 생성형 AI의 무한함과 불완전함을 모두 콘텐츠로 녹여낸 주목할 만한 사례입니다. 영어만 지원하는 탓에 국내 주목도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해외에서는 수만 명 단위 동시 접속자를 확보했던 이 게임을 뒤늦게 살펴봤습니다.
개발자 ‘닐 아가왈’(Neal Agarwal)은 여러 종류의 웹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홈페이지(neal.fun)를 2017년부터 운영하면서 유명해진 인물인데요. <인피니트 크래프트> 역시 해당 사이트에 수록된 타이틀 중 하나입니다.
게임의 메커니즘은 매우 간단해서 UI 역시 단촐한 구성입니다. 단어 아이콘들을 배치하고 조합할 수 있는 게임플레이 영역, 그리고 보유 단어 리스트가 나열되는 사이드바 영역이 게임 화면의 전부입니다.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우측 사이드바 영역에 플라톤이 주장했던 세계 구성의 4원소, 물(water), 불(fire), 바람(wind), 땅(earth)이 기본적으로 주어집니다.
단어 아이콘을 한 번 클릭하거나 드래그해서 게임플레이 영역에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원하는 단어를 다른 단어 위에 중첩하면, 두 단어가 합성돼 새로운 단어가 탄생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러 단어를 새롭게 획득하는 것이 게임의 내용의 전부입니다.
조합 결과는 재료가 된 요소들의 상식적 관계를 직관적으로 반영할 때가 많습니다. 가령 ‘물’과 ‘불’을 섞으면 ‘증기’가 나오고, ‘흙’과 ‘물’을 섞으면 ‘식물’이 나오는 식입니다. 물리적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관념적 연관성도 반영하는데, 예를 들어 ‘결혼’과 ‘파괴’를 섞으면 ‘이혼’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매우 새로운 아이디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원전이 되는 게임들이 따로 있습니다. 2010년 나란히 출시한 <두들 갓>, <리틀 알케미> 등인데요, 특히 <리틀 알케미>의 경우 기본 UI가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단어 조합법까지 그대로라는 점에서 <인피니트 크래프트>의 직접적 레퍼런스가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원소로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다만 <두들 갓>, <리틀 알케미>와 달리 생성형 AI를 활용한 <인피니트 크래프트>는 단어 조합식이 무한하게 생성될 수 있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후술하겠지만 이를 통해 <인피니트 크래프트>는 앞선 두 게임과는 사뭇 다른 게임성을 갖춘 작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외신들에 따르면, <인피니트 크래프트>에는 메타(구 페이스북)의 텍스트 생성 알고리즘 Llama2(라마2)가 활용됩니다. 다른 대형언어모델과 마찬가지로 Llama2 역시 다양한 사물은 물론 역사, 명소, 시, 인물 등을 다루는 무수한 유형의 텍스트를 학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덕분에 게임에서도 온갖 단어들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개발자가 밝힌 작동 원리는 대강 이렇습니다. 게임에는 기본적으로 단어 조합식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유저가 두 단어의 합성을 시도하면, 게임은 해당 조합이 데이터베이스에 이미 등재되어 있는지 체크한 뒤, 그리고 이미 저장된 내용이 맞다면 여기에 따라 결과물을 출력합니다.
흥미로운 일은 아직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조합이 시도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이때 게임은 해당 조합을 Llama2에 쿼리로 입력, 새로운 단어를 유저에게 제시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조합식은 다시 게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됩니다.
만약 다른 유저가 이후에 똑같은 조합을 시도한다면, 게임은 Llama2를 통하지 않고 저장된 값을 바로 출력합니다. 이것은 Llama2에게 중복된 요청이 입력되는 현상을 줄이고(매번 이용료가 발생합니다), 모든 유저에게 동일한 게임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결론적으로 <인피니트 크래프트>는 유저들의 자발적 참여와 Llama2를 통해 (이론상) 무한히 확장되는 데이터베이스를 지닌 게임이 되었습니다. 다만 개발자는 모욕적 단어들은 생성되지 않도록 별도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고 밝혔는데, 이것 때문인지 일부 단어들의 경우 조합이 아예 거부되는 현상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메타의 Llama2가 사용됐다.
<인피니트 크래프트>의 선배 게임인 <두들 갓>의 게임플레이 목표는 스테이지별로 제시되는 특정 조합 결과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리틀 알케미>의 목표는 게임에 존재하는 모든 조합법을 밝히는 것인데요.
그런 반면 <인피니트 크래프트>는 자체적인 게임 목표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저들은 생성형 AI를 통해 구현된 게임의 무한한 확장성, 그리고 간헐적 고장(?)을 콘텐츠로서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바위와 던지기를 합치면 물수제비가 된다
<인피니트 크래프트>의 대표적 플레이 방법 중 하나는, 도출해 내기 어려울 것 같은 아주 구체적 단어를 정해서 직접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유튜브 등에서 게임플레이 영상을 찾아보면 유저들이 오랜 시도 끝에 <다크 소울>,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 제목은 물론 국가명, 식품 브랜드, 유명 스트리머 예명 등을 자유롭게 만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인기를 끄는 플레이 방식은(아무래도 ‘할루시네이션’ 현상과 관련 있어 보이는) 매우 엉뚱한 조합 결과를 찾아 다른 유저들에게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자 역시도 플레이 도중에 몇 번 맞닥뜨렸던 현상입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면 사이버러브크래프트(Cyberlovecraft), 키클롭스인간(Werecyclops) 문어인간(Werectopus), 뱀파이어 벌(Vampire Bee), 펭귄 파리지옥(Penguin Flytrap) 등이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 하나씩 검색해 봤지만, 아예 없는 단어거나 사용 사례가 지극히 제한된 것들뿐이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무한하게 단어를 조합해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인피니트 크래프트>의 게임플레이 경험이 즐거움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종종 전혀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엉뚱한 결과를 내놓는 생성형 AI의 특성이 그대로 게임플레이의 몰입감을 해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합 결과가 너무 뜻밖이어서 당황스러운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앞서 언급됐던 ‘문어인간(Werectopus)에 ‘꽃가루’(Pollen)을 조합하면 ‘벌’(Bee)나오는 등의 상황이 그것인데요. 당연히 꽃가루와 벌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응답이 지나치게 무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혹시 문어인간과 벌의 연관성에 관해 잘 아시는 분이 있다면 제보 바랍니다).
게임의 기본 플레이 방식이 유저의 상식과 직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무작위성은 생각보다 플레이 동기를 많이 저해하는 문제입니다. 가령 기자는 ‘로봇’과 ‘습지’(marsh)를 조합해 예상치 못하게도 아이언맨(Iron Man)을 생성해 냈는데, 원래 찾으려던 단어 중 하나였지만 성취감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하는 게임 디자인에 생성형 AI를 접목해 전혀 새로운 즐거움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인피니트 크래프트>는 AI 게임 개발자들이 참고할 좋은 선례를 제시해 준 듯합니다. <두들 갓>과 <리틀 알케미>도 좋은 게임이지만, 어쨌든 크툴루 좀비(Cthulhu Zombie)나 로봇미라(Robotmummy)를 생성하는 재미는 발견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크툴루 좀비는 또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