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말, 암의 재발과 전이를 확인한 의사는 그녀에게 항암제를 투여했다. 항암치료 후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광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과가 좀 달랐다.
사흘 뒤 급격히 기력이 빠졌다. 항암제를 견딜 힘이 없었다. 암이 전이된 간은 제 역할을 못했다. 다리에서부터 힘이 확 풀렸다. 침대에 털썩 누웠다. 기독교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바로 병실로 옮겨졌다. 혈액검사와 CT 촬영이 이어졌다. 결과가 나빴다. 기독교 병원에서는 2주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남편은 아들들에게 이 소식을 이튿날 알렸다. 두 아들은 다음날 광주로 내려갔다. 5~6개의 주사액을 꽂고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를 봤다. 복수가 찼고, 몸은 부어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하루하루 기력이 떨어졌다. 내려간 첫날에는 걸어서 화장실은 갈 수 있었다. 이튿날에는 앉을 수만 있었다. 다음날에는 누워만 있었다. 그녀 자신이 가장 힘들고 불안했다.
4년 동안 그녀의 혈액검사를 해왔던 의사는 치료가 어렵다고 봤다. 혈액 속 특정 수치들이 극단적으로 높았다. 주사를 통해 포도당, 항생제, 백혈구, 혈소판, 알부민, 칼륨, 나트륨, 몰핀 등이 주입되고 있었다. 치료가 아니었다. 통증을 완화하고 악화를 늦추는 용도였다.
두 아들은 당장 서울로 가자고 했다. 의사는 반대했다. 이송 중에 운명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응급실에서 버티는 것도 어려울 것이라 했다. 아들들이 내려오기 전, 남편과 의사는 이미 완화병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아들들은 의사와 따로 면담했다. 의사는 눈물을 흘리며 완화병실을 추천했다. 아들들도 울었다.
막내 아들은 말기 암환자를 받아주는 한방병원을 찾기로 했다. 첫째 아들은 완화병실(호스피스)를 알아봤다. 그녀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병원을 찾아왔다. 그녀는 그런 방문을 싫어했다. 거부했다. 두려움을 느낀 탓이었다. 아들들은 병실 바깥에서 사정을 설명했다.
광주에 완화병실의 수가 많지 않았다. 1인실을 찾는 것은 어렵고 슬펐다. 일요일 밤 남편은 그녀에게 '아들들이 서울에서 좋은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병세 악화에 불안해하던 그녀가 한 마디 했다. '살아야지.'
완화병실로 굳혔졌던 남편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녀가 원하는 바는 확실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에 일이 벌어져도 어쩔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 병원에서 자료를 뽑고, 앰뷸러스를 불렀다. 목을 들 수도 없을 정도로 기력이 빠진 환자는 고속도로를 3시간 이상 달렸다. 항암치료를 받아왔던 아산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의 험한 환경 속에서 이틀을 버텼다.
입원실에서 주사액 1~2개만 꽂았다. 항생제와 포도당, 칼륨과 철분, 혈소판 등을 번갈아 맞았다. 하루하루 조금씩 기력이 회복됐다. 목을 들었고, 침대 위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걸음도 떼었다. 12일 만에 산소호흡기도 뗐다. 얼굴과 다리의 부기도 거의 빠졌다.
하지만 불안했다. 복수를 빼 냈는데, 계속 복수가 찼다. 퇴원해도 당분간 복수를 빼내는 튜브와 주머니를 차야 한다는 의사의 이야기에 실망했다.
호주에서 딸이 들어왔다. 독일에서 여동생이 들어왔다. 그녀는 기독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지 17일 만에 병상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