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 1. 일단 어떻게 플레이하는 건지 알려주자
개발 초기 단계의 <드래곤 퀘스트>는 게임을 시작하면 성과 마을 근처의 초원에서 모험이 시작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엔 대부분의 RPG가 이랬죠.
하지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진행해 보니 아이들의 행동은 어른과 많이 달랐습니다. "근처에 성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겠지" 했더니, 전혀 엉뚱한 곳으로 방황하다가 금방 길을 잃고 조작법도 몰라서 슬라임에게 쓰러지기 일쑤였죠. 액션, 퍼즐 등 간단한 게임에 익숙했던 아이들은 난생 처음 보는 RPG를 어려워했습니다.
"우선 아이들에게 RPG를 플레이하는 법부터 알려줘야겠구나."
그래서 개발 후반부, 새로운 요소가 추가됩니다. 바로 프롤로그를 겸한 '튜토리얼'이었죠. 지금은 오히려 없으면 이상한 것이 튜토리얼인데, 당시엔 그런 개념이 없던 때였거든요.
게임이 시작되면 출구가 잠긴 방에 갇혀 있고, 곧바로 임금님이 게임 진행의 힌트를 줍니다. 아이템을 '집는다'. 사람과 '대화한다'. '문'을 연다. '계단'을 내려간다. 주변의 병사들은 스토리 설명을 해주면서, 동시에 커맨드를 하나씩 써보도록 유도합니다.
"보물상자를 모두 열었다면 그 안에 열쇠가 들어있을 거야."
"열쇠는 한번 쓰면 사라지지만, 그 열쇠로 문을 열면..."
"너의 여행이 시작될 거야."
● 고민 2. 아이들이 게임 오버로 모험을 끝내선 안 된다
튜토리얼에서 조작법을 알려줬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드넓은 필드를 마음껏 모험할 수 있다는 건, 바꿔 말하면 언제 어디서든 길을 잃고 미아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였죠.
1. 길을 잃는다.
2. '회복할 수 있는 마을'로 돌아가지 못한다.
3. 회복하지 못하고 몬스터한테 쓰러진다.
4. GAME OVER
마을도 못 가고 필드에서 죽어 게임이 끝난다면. 심지어 그게 방대한 모험을 다루는 RPG라면 과연 그 게임에서 꾹꾹 참고 엔딩까지 갈 수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선택한 방법.
"일단 죽더라도 게임 오버는 뜨지 않게 하자."
"대신 임금님 앞에서 부활시켜, 길을 잃고 죽어도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하자."
그렇게 임금님을 활용한 시스템이 생겼습니다. 여행 중 죽더라도 부활하는 재시작 지점. 황야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의 미아보호소. 게임 오버가 없다는 건 획기적이었죠.
● 고민 3. 아이들이 길을 헤매선 안 된다
사망해도 돌아올 재시작 지점은 준비됐지만, 엔딩까지 게임을 '진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이전까지의 RPG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건 바로 드넓은 필드에서 힌트도 없이 며칠씩 방황하며 다음으로 진행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방법을 못 찾으면 아주 지루하고, 짜증 났죠. 게다가 그때는 이게 RPG를 즐기는 법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답답한 진행 방식을, 과연 아이들이 '즐길' 수 있을까?"
그 고민에서 나온 결정은, 이전까지 유행하던 RPG의 문법을 근본부터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답을 찾아 해매는 모험이 아닌, 주변에서 끊임없이 힌트를 주며 진행할 길을 제시하는 방식.
기존의 RPG가 지도도 표지판도 없이 무한정 방황하는 '배낭여행'이었다면, 나이 어린 패미컴 유저에 맞춘 드래곤 퀘스트는 친절한 가이드를 따라가며 즐기는 '패키지여행'.
기존 RPG 특유의 긴 플레이 타임을 포기하는 것이 게임의 수명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선택은 코어 게이머가 아닌 사람의 진입 장벽을 낮춰주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드래곤 퀘스트의 성적. 1편 판매량 150만 부. 시리즈 누적 판매량 6,600만 부. 자타공인 일본의 국민 RPG.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도 당연해진 튜토리얼/길 안내/부활이라는 RPG 요소를 처음 써내려간 게임.
그 성공은 하나부터 열까지 유저의 눈높이에 맞춘 고민과, 기존 방식을 깨는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