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은 왜 재미있는 걸까?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슈팅게임 프랜차이즈 '콜 오브 듀티', 그중에서도 음모론을 소재로 한 <블랙 옵스: 콜드 워>(2020, 이하 콜드 워)의 개발진은 "진실인 것 같으면서도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음모론이 재미있다고 대답했다. <콜드 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음모론이 사실이라면?'을 주제로 게임을 만들었다. 정신착란과 피해망상을 겪는 주인공은 1968년 베트남전과 1981년 냉전 상황을 오가는 요원이 되어 모종의 음모를 파헤친다.
이 세계관에서는 스파이 페르세우스가 미국의 핵무기 기밀을 빼냈고,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미국 CIA는 페르세우스를 막기 위해 동베를린에 잠입하고, 소련 비밀기지를 박살 낸다. 주인공 코드네임 '벨'은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리더 애들러의 작전은 곧잘 실패하고, 주인공은 점점 더 강력한 착란에 빠진다. <콜드 워>는 시리즈 캠페인 중 특이하게 멀티 엔딩을 채택, 벨이 소련에 투항하여 CIA와 미국에 복수한다는 이야기 줄기도 있다. 과도한 음모론에 대한 경고일까?
아무튼 <콜드 워> 제작진은 4~5년 동안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의 문서를 참고해 새로운 음모론의 퍼즐을 맞췄다. <콜드 워>의 시나리오와 미션은 상당수가 실제 진행되었던 '작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의 최정예 CIA 요원이 사실 체포되어 세뇌당한 소련의 첩보 요원이었다거나, 소련이 파리와 런던에 중성자 핵폭탄을 발사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음모'를 다시 '조각모음'한 것이 <콜드 워>인 것이다.
음모론은 언제나 재미있는 게임 소재가 된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템플 기사단은 성전 기사단을 모티브로 한 비밀결사로 이들이 현대 다국적 기업으로 살아남아 전 세계를 조종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게임에 나오는 "진실이란 없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암살단의 신조는 플레이어가 시대를 오가며 수행하는 온갖 미션을 정당화하는 명령이 된다. 템플 기사단이 앱스테르고라는 기업으로 변모하여 지구를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기 때문에 그간의 진실은 각색된 것이고, 플레이어는 당장 이들의 음모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콘텐츠에서 음모론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렇게 믿고 싶은 '만약'의 날개를 멀리 펼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기자도 어릴 때 그랬다.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고, 한국이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독도를 탈환한 뒤, '통일한국'의 국군이 일본 혼슈에 상륙해 전쟁에서 승리, 도쿄 황궁에 '통일 한국기'를 게양했다는 부류의 '이군깽'(이세계 군대 깽판물) 소설을 즐겨 읽었다.
음모론은 최고의 콘텐츠 소재이지만, 현실에서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정치학자 마이클 바쿤은 음모론을 대중매체에서 "비주류 청중"(Fringe Audiences)이 얼마나 많아지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문화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음모론적 세계관"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음모론 연구의 권위자인 바쿤은 음모론이 "증거보다는 믿음의 문제"라면서 이성적 사고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 속 '음모'와 '론'을 떼어서 보자. '음모'는 거대한 존재의 관한 주장을 광범하게 수집한 일종의 내러티브다. 비밀결사 일루미나티가 세계 단일 정부를 구성하려 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은 조작되었다 등의 주장은 '음모'로 이해된다. 이런 수집된 음모들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유대인 등등을 비정상적 존재로 만들기 위한 사색이나 가설 따위가 모인 것이다. 음모'론'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므로 가짜뉴스라고 해서 모두 음모론이 되지 않는다. "래퍼 닥터 드레가 이희호 여사와 결혼했다" 따위의 가짜뉴스는 (다행히) 음모론까지 가지 못했다. 이러한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거악의 횡포'나 '누군가의 조작'이라고 받아들일 만한 동지를 충분히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희호-닥터 드레' 소동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믿기 어려운 소식이겠지만, 이 가짜뉴스는 실제로 지난 2017년 꽤 널리 퍼졌던 바 있다.
문화적으로 공감을 얻은 가짜뉴스는 음모론으로 완성되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다. 2011년 1월 6일, 부정선거 음모론에 도취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은 총을 들고 나와 미국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이 일로 무려 700명이나 체포됐고,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지만 대안 우파 세력의 딥 스테이트 음모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국은 새 대통령으로 '딥 스테이트 음모론에 맞서 싸우던' 도널드 트럼프를 다시 선출했다. 음모론이 무서운 까닭은,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음모론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옥스포드 대학은 올해의 단어로 '브레인 롯'(Brain Rot)을 선정했다. 가디언은 "온라인 콘텐츠의 과도한 소비로 인해, 사람의 정신적 상태가 악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기자 같은 범부가 쇼츠 삼매경에 빠지는 것은 기자 개인의 삶에나 악영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이 뽑은 선출권력이 "현재의 망국적 국정 마비 상황을 사회 교란으로 인한 행정 사법의 국가 기능 붕괴 상태로 판단하여 계엄령을 발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윤석열 씨는 방금 담화에서 "국민들에게 망국의 위기 상황"이 왔다며 부정선거와 북한의 해킹 공격을 경고했고, "대한민국을 간첩 천국, 마약 소굴, 조폭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 아니"냐고 소리높였다. 어느 누가 간첩 천국, 마약 소굴, 조폭 나라를 동의하겠나. 그럼에도 이번 계엄령 선포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현행법상 비상계엄으로는 국회를 잠글 수도 없다.
음모론의 '브레인 롯' 상태에 빠진 윤 씨는 이번 담화를 통해서 20% 미만의 음모론 신자들에게 집결을 호소한 셈이다. 2021년의 트럼프가 집결을 호소한 뒤에 어떤 일이 생겼던가? 현실에서 음모론이 이렇게 무섭다. 이제 80% 이상의 시민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