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12일, 그날은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 주었다.
우리 가족은 전날 쓰촨 북부의 구채구라는 곳에 여행을 다녀왔기에 그 날은 월요일임에도 미리 휴가신청을 해 놓은 덕분에 쉴 수 있었다. 큰 아이는 학교를 갔다. 나와 아내, 태어난 지 반 년 정도 지난 둘째 유민이는 집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버스를 탈 때의 흔들리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웅? 깜빡 잠이 들었었나?’ 하는 순간 이번에는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의 좀 더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만 느꼈던 것이 아닌지, ‘여보, 집이 이상해!’ 하면서 아내가 거실에 있는 나에게 다가오는데 그 순간 비현실적으로 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오래된 낡은 아파트이긴 했지만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흔들리면서 거실에 있는 책장과 DVD장이 넘어오는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일시적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감정은 분노와 공포였다.
자료출처: YTN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성수대교의 추락을 미디어를 통해 경험했던 세대로서 ‘이 중국놈들이 집도 부실공사로 지었구나’가 우선 든 격렬한 분노의 감정이었다면, ‘여기 있으면 죽겠다’는 두번째 공포의 감정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남자인 내가 영화 <인셉션>에 나온 것과 같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못하고 절반쯤 코마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여자이자 엄마인 아내의 판단은 나보다 빨랐고 대응은 단호했다. ‘여보, 여기 있으면 우리 죽어! 어서 나가야해!’ 라고 외친 후 군말없이 아기를 안고 앞장서서 뛰어나간 것이다. 우린 3층에 살았는데 어찌나 급했던지 그냥 계단을 통해 맨발로 뛰어 내려갔다.
거리에는 우리와 동일한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이미 우르르 몰려 나와 있었다. 내가 예상한 부실공사로 인한 아파트붕괴 사고가 아니었다. 이미 도시는 전쟁터처럼 폐허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도로는 망가졌고 작은 건물들은 넘어갔거나 혹은 넘어가려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먼지가 뿌옇게 하늘을 뒤덮었고 다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지옥인가? 아니면 전쟁이라도 난 것인가?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혼란에 휩싸였다.
2008년 5월12일, 중국 쓰촨에 진도 7.8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공식 사망자만 6만 9,000명이 넘었다. 1만 8,000명 실종, 20만 채 가옥의 붕괴, 그리고 9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할 정도로 초대형 지진이었다. 사실은 정부가 발표한 것보다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고, 많은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전언이었다. 그리고 매우 불행스럽게도 그 자연재해가 주는 고통의 현장 속에 우리 가족은 있었다.
아비규환의 재해 속에서 가장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단지 자연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재확인했다고나 할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학교에 있는 첫째 딸 유정이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에게 집 앞 도로에서 꼼짝하지 말라고 하고 큰 딸을 찾으러 정신없이 학교로 달려갔다.
학생들은 여진이 주는 건물붕괴를 피하기 위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고 학교 입구에는 나와 같이 자신의 아이들을 찾으러 온 부모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놀랍고 고맙게도 유정이의 담임선생님이자 우리의 쓰촨생활의 최고 은인인 씨에민 라오스가 이번에도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 혼란한 와중에도 유정이를 꼭 자기 옆에 붙잡아 두고 있다가 나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한 표정으로 인계해 준 것이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유정이에게 물어보니 학교가 흔들리고 천장에 형광등 같은 것이 떨어졌고 놀란 아이들은 있지만 크게 다친 아이들은 없다고 한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비교적 새로 지어진 학교라 건물이 튼튼했나 보다. 아니면 운이 좋았던가…
다시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더러 군인들과 공안들이 와서 추가 여진이 멈출 때 까지 집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통제를 했다. 건물의 2차 붕괴의 위험이 대단히 높은 상황이라고 했다.
졸지에 이재민이 된 사람들은 학교운동장, 공원 등 주변에 건물이 없고 시야가 트인 곳에 가서 여진이 멈추고 안전이 담보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한다. 설상가상으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얇은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안과 군인들이 그야말로 비만 피할 수 있도록 군용 막사를 치는데 우리 가족들도 꼼짝없이 그곳에 수용되어야 할 처지였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 특히 태어난지 6개월 밖에 안 된 아기 유민이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앞이 캄캄하고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여기서 또 한번 천운이 따랐다. 옆집 사는 이웃 중국인이 ‘너희는 외국인인데 어떻게 아기까지 데리고 임시 수용소에서 있을 수 있겠냐? 나는 이곳 충조우시 외곽에서 작은 공장을 하는데 일단 그쪽으로 피난을 함께 가자. 거기는 주변이 허허벌판이라 안전하고 지붕도 있어 최소한 비를 피할 순 있으니…’라고 너무 고마운 제안을 준 것이다. 1년 넘게 살면서 단 한번의 교류도 없던 생면부지의 이웃이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우리 가족에게 이렇듯 은혜를 베푸니, 다른 중국인들에게라도 훗날 이 은혜는 갚아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다.
엑센트급 작은 소형차에 그 집 식구 셋에 우리 식구 넷까지 총 7명이 탑승하고, 여기에 피난도구(옷가지, 비상식량 등)까지 잔뜩 싣고, 지진의 여파로 망가진 도로를 헤쳐가며 피난길에 올랐다. 네 시간 가까운 길을 불편하고 험난하게 가야 했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남겨진 사람들, 그래서 비를 맞으며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노숙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어디론가 탈출할 곳이 있는 우리들은 그야말로 행운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 네 시간 후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한적한 교외의 공장이었다. 건축자재를 거의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생산하는 작은 공장이었고 이웃주민이 호언장담한대로 땅이 꺼져서 추락하지 않는 한 지진의 추가피해를 입을 일은 거의 없어 보이는 안전지대였다. 인부들 10여 명과 그들의 가족들이 함께 숙식을 하면서 일하고 생활하고 있는 곳이었다.
TV, 라디오 등을 통해 비로소 현재의 상황을 어느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쓰촨 북부 티베트 장족자치구인 원촨이라는 곳이 지진의 진원지였고, 그 주변 50km 이내가 초토화되면서 다수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원자바오 총리가 바로 사고지역으로 왔고 인민해방군(중국군대)이 구조작업에 동원되었다는 뉴스도 이어졌다. 뉴스로 보는 원촨과 베이촨이라는 지역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그 뉴스를 보면서 내가 첫 번째로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은 지진의 진원지 원촨과 우리 가족이 거주하는 충조우시가 불과 58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상자가 50km 이내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불과 8km 차이로 생사가 갈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 또한 하늘의 뜻이었던 것일까?
두 번째는 좀 더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반전에 가까웠다. 하필 우리 가족이 전날 구채구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여행사의 실수로 아기의 비행기표 예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었다.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인지한 여행사가 제시한 두 가지 무상 보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①호텔에서 1박 하고 다음날 돌아가기
②고급형 이층 침대버스를 타고 1박 2일 동안 쓰촨 북부의 장족(티벳인)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그들은 보기드문 기회라면서 2번 옵션을 선택하기를 권유했고 나 또한 솔깃했었다.
만약 내가 1번 옵션을 택했다면 지진의 근원지 원촨에 좀 더 가까운 구채구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가 혹은 직접 사상을 입지 않았어도 한동안 구채구에 갖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고 이후 3개월간 구채구는 거의 폐쇄됐다. 식수와 식량도 부족한 곳에서 여행객 모두가 갖혀 있었다.)
그보다 끔찍한 것은 2번 옵션, 즉 여행사에서 제공해 준 버스여행을 택했을 경우인데 여행 스케줄상 지진이 발생한 바로 시간에 우리 가족이 탄 관광버스는 지진의 진원지를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 가족의 사망확률은 100%일 뿐만 아니라 신원확인도 제대로 안 되고 시체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즉 가족 모두가 영원한 실종자로 남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니, 지진으로 인한 실종자라는 것이 밝혀지기나 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단지 집에가서 편히 쉬고 싶어 몇 시간 공항에서 기다려 비행기를 타는 불편함을 감수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이 순간의 단순한 판단으로 우리 가족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생사는 여일하나 운명은 하늘이 결정짓는가 보다.
최악의 위기는 면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추가 여진이 몇 시간 단위로 발생했고 멀쩡한 땅이 흔들리는 기분을 반복적으로 느껴야 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우리는 피난처에서 공포와 초조감으로 가득한 밤을 맞이해야 했다.
악몽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