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치는 화난 남자’ 밈을 아는가? 길게 설명하기 전에 이미지 한 장 먼저 보고 가자.
‘소리치는 화난 남자’는 2015년 언저리에 서양권 모바일게임 아이콘의 천편일률을 가볍게 비꼬는 말로 유행했다. 지금은 모바일게임 스토어가 소리지르는 남자로 도배되는 현상이 다행히(?) 많이 줄었다.
2018년에는 베데스다의 모바일게임 <폴아웃 쉘터>가 만우절 기념으로 이 대세에 동참, 게임 마스코트 ‘볼트보이’를 하루간 이 표정으로 바꿔버렸던 적도 있다. 업계 사람들도 다 알고 우습게 느끼는 관행이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게임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거기서 거기’인 아이콘을 찍어낸 이유는 뭘까?
2020년 개발자컨퍼런스(GDC)의 한 강연에서 해답이 제시됐다. <캔디크러쉬 사가> 개발사 아트 디렉터가 ‘전세계에 통하는 게임아트 디자인’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이 강연을 통해 ‘소리지르는 화난 남자’의 탄생 배경(?)을 함께 알아보자
* 개발사 ‘킹닷컴’(킹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은 2020년 전세계 2억 4,900만 액티브유저를 기록했다. 킹닷컴 아트 디렉터인 강연자 리아나 맥키스는 자신이 개발하던 범죄 수사 게임 <왓 넥스트, 치프?>(<What Next, Chief?>)를 예시로 들어 ‘좋은 게임아트’의 공식을 설명했다.
맥키스에 따르면 게임의 아트 스타일을 결정하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 ‘작가주의’(Auteur) 방식은 아트 디자이너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아티스트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빠르고, 독창적 아트가 탄생하기 좋은 환경이다. 단점은 아티스트 의존도가 너무 커진다. 아티스트 개인 역량이 뛰어나면 대박, 아니면 쪽박이기 쉽다.
‘직관’(intuition) 방식은 소비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소비자가 무얼 원할지 아티스트가 직관적으로 생각해 작업하는 방식이다. 아티스트 주관이 반영되긴 하지만 결국 소비자 맞춤형이어서 때로 아티스트가 자기 스타일을 포기해야 한다.
마지막 ‘데이터’(Data) 방식은 철저히 숫자와 통계 중심이다. 시장 데이터를 분석해서 소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트를 만든다. 아티스트 개인 스타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맥키스는 게임의 아트 방향성 결정에서 ‘직관’과 ‘데이터’ 방식을 적절히 혼합해야 글로벌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한다.
킹닷컴은 먼저 ‘데이터’를 이용해 게임의 테마(장르, 메커니즘, 분위기 등)를 정한 다음 테마에 맞는 아트 스타일을 아티스트 ‘직관’에 맡겨 결정한다.
테마를 정하려면 먼저 시장 데이터 분석으로 소비자 취향을 파악해야 한다. 대부분 기업은 연령, 성별, 거주지 같은 인구통계 데이터에 의존해 시장을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정확도가 생각만큼 높지 않다. 개인의 게임 취향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경험이나 습관 등 인구통계가 쉽게 포착하지 못하는 변수가 많이 작용한다. 단순히 ‘여성’ 혹은 ‘중년’이라는 통계적 공통분모를 가진다 해서 게임 취향이 같다는 보장은 없다.
킹닷컴은 그래서 막연한 인구통계 지표 대신 ▲플레이 동기 ▲라이프스타일 ▲관심사 등 소비자 콘텐츠 소비습관에 직접 연관된 데이터를 활용한다.
<왓 넥스트, 치프?> 기획 당시 킹닷컴은 자사 게임 플레이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이 ▲경쟁을 싫어하고 도전을 좋아한다는 사실(플레이 동기) ▲게임을 한 번에 아주 조금씩 플레이한다는 사실(라이프스타일)을 알아냈다. 그리고 타겟 시장인 미국의 TV 드라마 시청률 통계에서 범죄물 콘텐츠 인기가 높다는 점(관심사)을 확인하고 게임 테마에 반영했다.
테마를 잘 골라 게임을 만들어놓은들 아무도 다운받지 않으면 소용 없다. 여기서 아트의 ‘톤’(tone·분위기)이 중요해진다. 아트 톤은 소비자가 게임을 선택하는 주요 기준이다. 특히 모바일 시장에서는 많은 유저가 리뷰조차 확인하지 않고 아트만으로 게임을 고른다. 하지만 아트 톤과 실제 게임의 톤이 어긋나면 유저는 실망하고 즉시 떠날 확률이 매우 높다.
이 불일치를 막으려면 우선 아트 스타일 결정 단계에서 부서들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 유저는 게임을 다운받을지 결정하기 앞서 전반적 분위기, 스케일, 잔혹성 등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이들 요소가 아트에 잘 드러나야 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디자인 부서뿐 아니라 기획·개발· 운영팀이 모두 아트 스타일 결정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각 부서가 함께 ‘직관’을 발휘해 결정한 아트 스타일이 실제 소비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데이터’로 검증하는 절차도 필수다. 여기에는 소수 외부인을 테스터로 모아 진행하는 포커스 그룹 테스트(FGT)가 적절하다.
먼저 테스터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은 프로토타입 버전을 플레이하게 하고, 다른 한쪽은 아트만 감상하게 한다. 그 다음 아트 감상 그룹에게 게임의 형식과 분위기를 추측해보라고 요청한다. 추측 내용이 ‘플레이 그룹’의 소감과 잘 맞아 떨어지면 성공이다.
이때 흔한 실수는 FGT를 통해 아트의 ‘정확도’가 아닌 ‘선호도’를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아트가 마음에 드는가’, ‘아트를 보니 게임을 해보고 싶은가’ 따위의 문항은 핵심에 비켜나 있다. 이런 설문 데이터로 아트를 결정하면 ‘예쁘게 핀트가 나간’ 아트 스타일이 탄생하기 쉽다.
그렇다면 직관과 데이터를 이용해 테마와 아트를 일치시키면 만사형통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작품을 만들려면 게임의 ‘테마’와 ‘아트’ 둘 중 하나는 대중에 익숙치 않은 ‘낯선’ 특색을 가지도록 창의력을 개입시킬 필요가 있다.
왜 그럴까? 테마와 아트가 모두 대중에 친숙한 스타일이면 일견 무난하고 좋을 듯하다. 하지만 친숙함은 ‘특색 없음’과 종이 한 장 차이다. 늘 보던 소재를 늘 보던 아트로 풀어낸 작품은 눈에 뜨이지도 않고 손이 가지도 않기 마련이다.
정 반대로 낯선 테마를 낯선 아트로 표현할 때는 장단점이 공존한다. 독창성이 매우 높아 소수 팬에게 컬트적 인기를 누리기에는 좋지만, 대중적 시장에서 성공은 반드시 보장되진 않는다. 여러 인디 게임이 이런 길을 걷고 있다.
익숙한 테마가 낯선 아트를 만나면 보편 소비자에 소구할 잠재력이 커진다. 맥키스는 소니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를 예시로 들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세계적 IP를 독특한 애니메이션 작화로 풀어낸 이 작품은 전세계에서 총 3,384억 원 수익을 올렸다.
낯선 테마와 익숙한 아트의 만남도 흥행 가능성이 높다.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작품을 잘 만드는 대표적 기업은 픽사다. 픽사는 ‘멸망한 지구를 청소하는 인공지능 로봇’이나 ‘10대 소녀의 머릿속’ 같은 독창적 소재를 귀엽고 친숙한 아트 스타일로 그려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뻔하고 재미없는 줄 알면서도 많은 개발사가 ‘소리치는 화난 남자’ 아이콘을 줄줄이 내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맥키스는 공산품같은 이 아이콘들이 “소비자 테스트 결과에선 가장 긍정적 반응을 얻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시장 선호도라는 명징한 데이터에 근거해 내린 의사결정이 ‘특색 없는 아트’라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강연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아트와 게임의 톤을 통일시킬 것. 둘째, 작품을 시장에 소구할 독창성을 반드시 마련할 것. ‘다운로드 유도’ 및 ‘유저 잔류’ 전략에 직결되는 조언이다. ‘소리치는 화난 남자’ 아이콘은 첫째 조건은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두 번째 조건은 고려하지 못했다.
두 조건을 모두 만족하려면 ‘직관’이 주도하고 ‘데이터’가 뒷받침하는 의사결정 방식이 필수적이다. 데이터에 매몰된 아트 디렉팅은 두 가지 모두에 방해가 된다. 맥키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의 목표는 전세계 소비자가 단순히 우리 게임을 다운로드하는 데 그칠 뿐 아니라, 게임에 푹 빠져 수년간 플레이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선 독창적, 창의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데이터를 통해 결정의 합리성을 검증해야 한다. 데이터에만 의존해 중대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