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게임업계에 있어서 호흡이 매우 가쁜 한 해입니다. 그중에서도 게임산업진흥법 전부 개정안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상헌, 조승래 의원에 이어서 유동수 의원까지 각자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이번 전부개정은 15년 만에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법을 하나 고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올해는 3개의 개정안이 올라올 정도면 뭔가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 봐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1년에 한 번 일어나도 놀랄만한 사건들이 게임계에 몇 달 새 연속으로 벌어지는 요즘입니다. 2021년 1월 <페이트 그랜드 오더> 사태, 트럭시위, 게임산업협회 전부개정안 의견서, <메이플스토리> 확률 논란, (다시) 트럭시위, 넥슨 이정헌 대표의 사과까지...
이런 일련의 사건을 타깃 해서 발의된 법안이 바로 3월 5일 민주당 유동수 의원이 발의한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확률형 아이템을 ‘타깃’ 삼은 법안 발의는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 의원 법안에 대한 반응은 이전보다 조금 더 뜨거운 편입니다.
'올 것이 왔다'는 반응도 나옵니다. 이유가 뭘까요?
유 의원이 발표한 법안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갑자기 개정안이 나온 만큼 법안의 내용이나 적용 범위, 해석 등 논의의 여지가 많지만, 최근 상황에서 유저들이 이를 '사이다 법안'으로 느낄 만큼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게임업계에 큰 파장 혹은 변화를 주게 됩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요.
그리고 이 법안의 핵심은 역시 '확률'에 대한 내용입니다.
1. 확률형 아이템의 정확한 구성확률 혹은 기댓값 공개를 법에 명시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공지는 그간 업계의 자율규제에 의존했던 영역입니다. 2018년부터 자율규제 주체인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GSOK)에 따르면 확률 공지의 ‘이행율’은 매우 높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유저들은 기업과의 정보불균형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게임사들이 ‘진짜 중요한 확률’은 공개 않고 ‘구색만 맞춘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규제 강령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불이행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구속력도 없다는 점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유 의원 측도 법안을 발표하며 ‘게임사들이 자율규제 테두리 안에서 확률정보를 공개 요구에 응하면서, 일방적으로 원하는 만큼만 정보를 공개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확률 공개를 법에 명시하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당장 몇 개월 앞서 발의된 이상헌 의원 전부개정안에서 ‘확률형 아이템’의 새로운 정의에 다음 두 가지를 포함한 것 또한 게임사들에 더 많은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맥락입니다.
▲ 직·간접적으로 게임이용자가 유상으로 구매하는 게임아이템 중 구체적 종류, 효과 및 성능 등이 우연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
▲ 유상으로 구매한 게임아이템과 무상으로 구매한 게임아이템을 결합하는 경우도 포함하며, 무상으로 구매한 게임아이템 간 결합은 제외.
현행 자율규제 강령에서는 ‘유저가 유료 구매한 아이템 내용물이 무작위로 결정되는 경우’에만 확률공지를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비 성능만 올려주는 경우는 확률 공개 의무가 없습니다. 게임업계에서 무작위, 랜덤이라고 표현하는 설명이 유저 기만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무작위나 랜덤의 의미가 등가의 확률로 구분되어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제로는 그 선택의 확률도 다 다른 상황에서 뽑기형 확률 아이템만 공개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유 의원의 일부개정안에서 ‘확률형 아이템’이 어떻게 정의될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존보다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규정해 ‘회피’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이 예상됩니다. 그래야만 유 의원의 말대로 ‘유저가 진짜 원하는 정보’를 누락 없이 공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컴플리트 가챠’ 유형 상품 판매 금지
‘컴플리트 가챠’는 ‘이중가챠’라고 불리기도 하는 확률형 수익모델입니다. 개발사가 마련한 구성표 안의 모든 항목을 하나하나 뽑아 전체 구성을 ‘완성’(컴플리트)해 특정 아이템을 얻는 시스템입니다. 예를 들어 알파벳 A부터 L까지 12개 글자를 전부 모으면 Z라는 아이템이 나오는 식입니다.
언뜻 보기에 또 하나의 확률형 아이템 모델에 불과해 보이지만, 유독 ‘과도한 결제유도 시스템’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각 항목을 '모두' 얻어야 하는 구조상 완성에 드는 비용이 크고 ▲항목별 획득 확률이 고지되지 않아 소비자가 막연한 생각으로 가챠를 시작할 수 있으며 ▲ 가챠를 ‘완성’하지 않으면 투입한 금액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는 탓에, 과금을 계속하게 되는 강력한 심리적 유인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점은 유의원의 개정안에는 컴플리트 가챠에 대해 ‘확률 공지’가 아닌 ‘판매 금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임법 개정에서 특정 ‘뽑기 모델’의 전면 금지가 주장된 것은 처음입니다. 그 근거로서 유 의원 측은 ‘지나친 사행성 조장’을 들었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국내에서도 원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컴플리트 가챠'를 '경품류 제공에 관한 불공정거래행위 유형 및 기준 지정고시'를 통해 제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2016년 규제완화와 함께 사라졌는데요. 유 의원은 이번에 문화체육관광위 법안을 내놓았지만 원래는 정무위원회 소속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정무위 소관이죠.
'컴플리트 가챠 금지'는 단일 상품 형태에 대한 제재이지만, 컴플리트 가챠 시스템을 운영하는 국내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숫자는 상당히 많아 이대로 법안이 통과하면 파장이 예상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특정 확률형 상품의 ‘가부’를 법률로 규정하는 첫 사례라는 사실은 의미가 큽니다.
3. 게임사가 자사 이득을 위해 확률을 조작하거나 잘못된 확률을 제시했을 경우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의 3배 이내의 과징금 부여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 국가 법률에서 시작된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민사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행한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피해에 상응하는 금액의 몇배 이상을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피해액의 3배에 달하는 벌금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의 목적은 피해자 구제가 아니라 가해자 규제입니다. 가해자가 똑같은 행위를 다시 하지 못하도록 막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에서 동일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하는데 궁극적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재판부가 ‘사회적 정의에 어긋난 극단적이고 강력한 범죄’로 판단할 경우에 드물게 적용 되고 있습니다.
국내도 이를 참고해 여러 분야에서 손해액 3배 이내 징벌적 배상규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2020년 9월에는 법무부가 피해액 5배 이내 징벌적 손해배상제 전면 확대 법안을 골자로 한 상법 일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현재 법제처 심사를 거치는 중입니다.
유 의원 법안의 ‘얻은 이익 3배 이내 과징금’ 항목 역시 게임사의 '고의적인 가해 행위'를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말입니다. 잃을 것이 얻을 것보다 많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현저히 적어집니다.
한편 ‘잘못된 확률 제시’ 또한 과징금 부여 대상인데, 이 경우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에 고의성이 없을 경우를 상정한 대책도 예고됐습니다. 단순 기술적 오류로 인해 확률정보가 실제와 불일치하는 사례에 대해서는 별도 예외규정을 담아 과잉 규제를 막겠다고 유 의원 측은 밝혔습니다.
1. '컴플리트 가챠'와 자율규제 강화안
먼저 관심을 끄는 건 '자율규제'의 현 주체인 GSOK의 대응입니다. 실제로 GSOK은 3월 4일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 강화안' 준비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게임산업협회가 전부개정안에 '의견서'를 내놓았던 것처럼 입법 움직임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21년 벽두부터 업계에 터진 각종 사건으로 '자율규제 무용론'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만약 GSOK가 강화안을 통해 자율규제 유용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규제 입법 쪽으로 더욱 힘이 실리게 됩니다. 와중에 유 의원 법안은 '컴플리트 가챠'를 구체적으로 호명했습니다. 그간 업계가 여러 방어논리를 구사해 온 확률공개 이슈와 달리 새로운 논쟁거리입니다. 과연 자율규제 강화안이 이를 어떻게 담을지 관건입니다.
새 법안은 '컴플리트 가챠'를 다른 확률형 BM과 달리 '전면 금지'가 필요한, 유해한 모델로 바라보고 있는데요. 강화안에서 컴플리트 가챠의 '과도한 사행성'을 자체적으로 경감시킬 전용 규정을 별도로 마련할지 주목됩니다.
※ '자율규제 강화'로 '게임법 강화'에 대응한다고?
이론적으로, 자율규제 제도가 완벽히 기능한다면 게임법을 강화할 필요가 크게 줄어듭니다.
자율규제 제도의 핵심 취지는 짧게 정리하면 ‘업계가 알아서 잘 규제할 테니 법까지 만들어 규제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설명만 들었을 때는 오해하기 쉽지만, 원론적으로 '규제를 받지 않고 맘대로 하기 위한' 편법은 아닙니다.
게임산업 등 환경변화가 급격한 분야에서 규제와 진흥 사이의 균형잡기는 해묵은 담론입니다. 법은 한번 만들어지면 쉽게 바뀌기 힘들고, 개정에 시간이 걸립니다. 법규의 개선 속도가 업계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특히 규제가 덜한 해외 업계와의 경쟁에서 더욱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신기술 산업'에서는 규제 완화 요구가 끊이지 않습니다.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는 게임산업이라는 첨단분야의 통제를 민간의 유연한 대처에 맡겨야 한다는 전통적 논리에 따라 등장했고, 현재까지 유지됐습니다. 그런데 ‘알아서 잘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향한 정부의 의구심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면 어떨까요? 바로 현재 업계가 처한 상황입니다.
비단 최근 일만은 아닙니다. 이상헌 의원의 전부개정안은 지난해 2월 문체부가 제시한 게임법 전면개정 초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행 게임법과 자율규제만으로 업계 현안을 모두 헤아리기 힘들다는 인식을 행정부와 국회는 이미 공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른 게임업체들도 '넥슨이 했는데 너희는 왜 아무것도 안 하는가'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메이플스토리>가 시작한 '체질개선'의 화두가 업계에 번져 규제 강화에 '미리 대비하는' 트렌드로 자연스럽게 이어질까요? 사실,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게 있다면 게임판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다는 사실입니다. 게이머들의 집단적 목소리는 이제 업계에서든 정치권에서든 예전과 같은 무게로 대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일례로 <메이플스토리> 유저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총대' 유저들의 의견은 이상헌 의원실을 통해 넥슨에 전달되었죠.
현재 업계가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여러 법안의 뒤에는 유권자의 표심, 더 구체적으로는 게이머들의 '총의'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