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의 삼라만상에 대해서 '이래야 하느니라'며 숟가락 얹기를 즐기는 본지이지만, 하나 모자란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여성향 서브컬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현남일(깨쓰통) 기자가 서브컬처 전문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지만, 지금 디스이즈게임 편집국에 여성향 게임 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기자는 없습니다. (잘 쓰는 분 있으면 bodo@thisisgame.com으로 메일 좀...) 세상 모든 취미를 남성향/여성향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여성향 서브컬처는 분명 이 게임 업계의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흐름입니다.
그 흐름을 짚기 위해 특별 기고를 준비했습니다. 만 8세부터 '덕질'을 시작한 쿠키플레이스의 남선우 대표에게 '여성 오타쿠는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주제로 기고를 요청했습니다. 지난해 연작 인터뷰로 인연을 맺은 남 대표는 흔쾌히 수락했고, 오늘(18일) 기쁜 마음으로 그 내용을 공개합니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말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여성향 서브컬처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 기고= 남선우 쿠키플레이스 대표, 편집= 김재석 기자

쿠키플레이스 남선우 대표
# 나의 짧은 덕질 역사
내가 처음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된 나이는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어리다. 나는 운이 좋아서 투니버스의 황금기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것만 보고 끝내지 않고, 추가 정보를 찾아 나가기 시작한 건 10살(만 8세) 정도였던 것 같다. 온라인게임을 처음 한 나이는 8살(만 6세), 유료 모바일게임을 처음 해 본 건 11살(만 9세),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12살(만 10세), 모바일 미연시와 방탈출 게임을 처음 접한 건 13살(만 11세)이었다.
이때 닌텐도 DS도 마지막 어린이날 선물로 받았다. 그 후 보컬로이드를 처음 알게 된 건 14살(만 12세), 특정 아이돌의 팬을 자처하며 모든 활동을 챙겨 본 건 15살(만 13세). 그리고 현재 이 기고문을 쓰고 있는 나는 어느덧 서른(만 28세)이다.
오늘의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며, 평생을 바친 온라인게임은 쉬는 한이 있어도 그만두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모바일게임을 이것저것 ‘찍먹’하다가 마음에 드는 것에 정착하기도 하며, 긴 세월 동안 꽤 많은 글을 썼다. 집에는 여전히 닌텐도 스위치가 있고, 지금 이 기고문도 보컬로이드 노래를 들으며 쓰고 있으며, 핑크블러드로서 예약한 SM엔터테인먼트 30주년 기념 굿즈 배송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나를 ‘서브컬처 향유자’이자 ‘오타쿠’로 분류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남선우 대표는 투니버스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나 이후 '퀴니'로 자리를 옮겼다. 퀴니에서는 '투니버스에서는 해주지 않는' 애니메이션을 자주 방영했다. 학부모에게는 분당 이용료 400원에 달하는 ARS 퀴즈쇼로 악명 높았다.
요즘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모바일게임은 <명조: 워더링 웨이브>(이하 ‘명조’)다. 시작한 계기는 단순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바꾸면 성능 확인을 위해 고사양 게임을 한 번씩 다운받아 보는 습관이 있다. 이번 고려 대상은 모두 서브컬처 오픈월드 게임이었는데, 긴 고민 끝에 <명조>를 선택했다.
<명조>가 가진 강점은 분명하다. 많은 게이머들은 수려한 그래픽, 고퀄리티의 배경, 화려하고 독특한 전투 액션 등을 <명조>의 재미로 꼽을 것이다. 나 역시 모든 요소를 인정한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방랑자(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비롯해 모든 남성 캐릭터(남캐)의 디자인과 설정에 신중함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서브컬처 게임은 여성 캐릭터(여캐)의 외형 디자인에 더 집중한다. 공급량도 디자인 완성도도 여캐 쪽이 훨씬 우세하다. 남캐를 추가하려 해도, 수요층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애초에 여캐를 선호하는 게이머층이 많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남캐의 매력을 어떤 방향으로 구축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조> 역시 여캐가 더 많다. 전형적인 ‘남성향’ 게임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적은 수의 남캐를 추가할 때도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주요 수요층인 여성 게이머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를 신경 쓰면서도, 동시에 남성 게이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조정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많은 동종 게임들이 감을 잡지 못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영역이기도 하다. <명조>가 이 부분에 신중을 기울인다는 점이 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명조>는 지금도 재미있게 플레이하고 있다. 게임에 애정을 가지게 되니 최애 캐릭터도 생겼다. 금희. 캐릭터 디자인도 예쁘고, 성우의 연기도 감명 깊었으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감으로 구성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금희를 가장 좋아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서사였다. 스토리를 조금만 더 빨리 깼다면 억지로라도 복각한 금희를 뽑았을 텐데, 단 며칠 차이로 복각이 끝나버려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때 깨달았다. 나는 적어도 금희의 두 번째 복각이 올 때까지 이 게임을 계속할 거라는 사실을.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고, 시간과 공을 들이게 되는 계기는 이렇게나 사소하다.

<명조> 최애 캐릭터 금희
<명조>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 각종 공략과 팁, 추천 조합, 과금 효율 등을 알아봐야 했다. 요즘 깨달은 것은 ‘공식 카페’라는 개념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공식은 주로 네이버 라운지를 활용하고, 게임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비공식적인 공간에 흩어져 있다. 주요 정보는 유튜브의 다양한 게임 채널에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게이머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하나만 꼽기는 어렵다. 각종 여초·남초 커뮤니티도 있고, X(트위터)와 같은 SNS도 있다.
나 같은 여성 게이머는 결국 X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커뮤니티에도 갈 수 있지만, 특성상 교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X에서는 게임 자체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양한 2차 창작이 게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큼, 혹은 그보다 더 활발히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X는 단순히 같은 게임을 하는 유저를 찾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같은 성향의 향유자를 만나는 곳에 가깝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덕분에 게임에 대한 흥미가 식어도 2차 창작을 통해 원동력을 유지할 수도 있다. 때로는 그 관계성 자체로 인해 게임을 계속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방식은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성 오타쿠는 함께 덕질할 향유자를 찾고, 관계성을 형성하며, 장르와 2차 창작, 그리고 이와 무관한 이야기까지 나누면서 공동체를 구축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우리’가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문화가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 MMORRPG의 길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길드에 들면 소속감이 생겨 게임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같이 즐길거리도 더 늘어나며, 게임이 지루해질 때도 길드원들과의 관계 덕분에 재미를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이렇듯 여성 오타쿠는 유사한 성향의 향유자들이 모여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에,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되기 쉽다. 이 공동체가 발전하면 ‘팬덤’이 되는 것이다.

여성 오타쿠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X의 트렌드를 살펴보는 게 좋다. X의 사람들은 <파이널판타지 14> 이야기를 나눌 친구를 찾고, 갑작스레 내린 폭설을 말하고, 카카오에서 분사한 다음의 티스토리가 이글루스처럼 사라질 것을 염려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점이 있다. 모든 여성 공동체가 팬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목적이 단순히 즐기기 위한 교류라면, 팬덤으로 발전할 필요가 없다. 팬덤이 되기 위해서는 ‘응원’과 ‘지지’가 필수 요소이며, 이 조건이 충족되면 여성 오타쿠는 아낌없는 지원을 보낸다. 그 방식은 금전적인 투자일 수도, 행동력일 수도 있다. 물론 팬덤의 결집력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다양한 문화산업과 사회적 흐름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은 이제 여성이 빠르게 결집하는 성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결집하는지, 무엇에 결집하는지는 여전히 가늠하기 어려워 한다. 여성 공동체는 무조건 팬덤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이러한 팬덤은 무조건적 지지를 한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모든 공동체가 팬덤이 되지도 않거니와, 여성 오타쿠들 사이에 ‘유명한 탈덕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오늘날 여성 오타쿠는 압도적인 지지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강한 결집력으로 어떤 문화를 거부하거나 불매할 수도 있다. 가장 큰 오해는 여성의 결집하는 성향만을 보고, 여성을 하나로 묶어 동일한 욕망과 선호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여성은 그 자체로도 매우 방대한 분류다. 따라서 모든 여성이 하나의 취향으로 결집한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특정한 방식으로만 결집한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반적인 경향성이 존재할 뿐이며, 여성의 욕망과 선호는 그 자체로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 인지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캐를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남캐를 선호하는 지를 여캐처럼 공식화 하기는 어렵다. 그러기엔 너무나 다양한 욕망과 선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캐를 좋아하는 사람 중 다수가 여성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성이 남캐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남캐만큼 여캐를 좋아하는 여성들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남캐보다 더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여캐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성들만의 또 다른 보편적 기준이 존재할 수 있다.
BL을 소비하는 사람 중 다수가 여성인 것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BL만을 소비하는 것은 아니며, 로맨스·로맨스 판타지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여성의 욕망과 선호를 단 하나의 단어 혹은 문장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관점이며, 이러한 태도를 버려야만 한다.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게 쉽게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여성 ‘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탐구하고, 여성의 결집을 끌어내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
결국, 여성을 하나의 부류로 묶어 정리하려는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여성과 그들의 ‘덕질’을 이해하는 초석이 마련될 것이다.

"여성을 하나의 부류로 묶어 정리하려는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여성과 그들의 ‘덕질’을 이해하는 초석이 마련될 것". 사진은 쿠키플레이스 사무실.
현재 나와 우리 팀원들이 운영하는 커미션 중개 플랫폼 크레페는 92%의 유저가 여성이다. 크레페는 창작 그 소비를 즐기고 지원하는 성향을 가진 서브컬처 향유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역할을 지속하고자 한다.
나 또한 수많은 여성 오타쿠 중 한 명으로서, 서비스를 운영하며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서로 다른 욕망과 선호를 지니고 있는지를 실감하는 순간이 많다. 유저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 것과 소비하는 콘텐츠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렇기에 여성 오타쿠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그 경향을 파악하는 일은 단순히 여성의 덕질을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덕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결국 서브컬처의 다채로움 또한 확장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발견될 것이라고 믿는다. 현재 ‘서브컬처’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영역은 아직도 너무 협소하다. 하지만 앞으로 이 단어는 점점 더 보편적으로 사용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 의미가 특정한 구역에 한정된 상태로 굳어지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다양한 방식의 서브컬처 향유가 이해될수록, 서브컬처라는 개념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라도 여성 오타쿠가 가진 다양성이 함께 논의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나 역시 이러한 다양성을 기록하고, 그 흐름을 파악하는 과정에 있다. 언젠가는 이 모든 논의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날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