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게이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레거시 미디어가 게임을 일종의 죄악처럼 취급해온 것엔 이미 지겨울 정도로 긴 역사가 있지만, 기자는 최근 한 기사를 보고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과 전혀 상관 없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이 게임에 대한 비난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이들에게 바늘로 찌르고 태우는 저주 인형은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만큼이나 정서적 악영향이 클 것 같다"며 "공공연하게 판매하는 데 제한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짚었다.]
인용한 문장은 연합뉴스의 ['저주인형' 찌르고 태우며 화풀이..."아이들 정서에 악영향"]이라는 제목의 3월 10일 자 기사 마지막 문단이다. 그렇다, 기사의 주제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저주인형'에 대한 것이었다. 짚으로 만든 인형에 못을 박고 부적을 붙여 불태우는 행위를 하며 원한을 가진 상대를 저주하는 가학적 문화가 성행한다는 내용이었다.


기괴한 저주인형 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알겠다. 그런데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게임은 왜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일까. 긴 설명이 필요할까, 이들이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이 저주인형을 바라보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사 하나가 독자들에게 전해지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보통 일선 기자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한 뒤 이를 퇴고하며, 내부의 편집 및 데스킹을 거쳐 출고된다. 그러니 '저주인형' 기사 취재 과정에서 설령 교수가 저런 멘트를 줬다 해도, 기자와 편집부 선에서 부적절한 발언이라 생각했다면 기사에 싣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또한 그것이 취재에 응해준 교수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연합뉴스에서 해당 '저주인형' 기사가 나간 후, 주간조선을 비롯한 타 매체에서도 같은 내용을 인용해 보도했다. 당연하게도 게임에 대한 비난 또한 그대로 담겼다. 아래는 주간조선의 3월 11일 자 기사 마지막 문단이다.
[전문가들은 특정 대상에 대한 분노를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한편, 저주인형과 같은 폭력적인 상품의 무분별한 판매를 제재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바늘로 찌르고 태우는 행위는 폭력적인 게임 못지않게 정서적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어린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큼 판매 제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게임이 스트레스 해소와 인지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본지는 게임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러 연구를 기사로 전해드린 바 있다.
이은희 교수가 저런 말을 한 의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게임이 정서적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게임 업계 또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각 권역별 게임 콘텐츠 이용 등급 분류를 적용해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저주인형'에 대한 비판에서 갑자기 게임을 예시로 드는 것이 적절한지, 인용 및 축약된 보도들에서 '게임' 또한 나쁜 것이라고 읽힐 오해의 소지는 없는지, 분명 반문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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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거시 미디어는 게임 업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서 게임에 대해 비난 일색인 것일까? '저주인형' 기사 외에도 기자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던 콘텐츠가 또 있었다. 3월 7일 Xbox 코리아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거기, 내 자리]라는 제목의 영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일부러 원신 PC라운지에는 꾀죄죄하게 입고 가는 거임. 그리고 PC 게임패스를 켜는데, 켤 때부터 Xbox 로고가 웅장하게 켜지면서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봄. "야, 저거 PC 게임 패스 아니여?! 이런 엄청난 서비스를 저런 거지 같은 차림새를 한 녀석이 한다고?"
옆 사람이 구경하든 말든 신경 안 쓰고 <원신> 말고도 게임패스 속 다양한 게임들 띄워 놓고 담배 하나 피고 오면, 주위 사람들이 자리에 몰려들어서... "(중략)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길래 게임패스 구독하면서도 겸손하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지?" 이렇게 떠드는 것을 "거기, 내 자리" 이렇게 한 마디 슥 해주면 구경꾼들이 "죄, 죄송합니다!!"
그럼 난 카메라로 얼굴을 정신 없이 찍고 있는 여고생을 향해 (얼굴에 홍조가 피어 있음) "사진, 곤란" (하략)]
그렇다, 국내 일부 커뮤니티에서 'PC방에서 ○○하면 멋있게 보이려나'로 분류되며 유행했던 해묵은 밈(meme)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2025년 감성이 아닌 건 둘째 치고, 패러디가 유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쾌하기까지 하다는 게 문제였다.
이 밈의 유래는 일부러 음습하고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해 속칭 '찐따'들을 조롱하는 데 있다. 개별 유저가 커뮤니티에서 주목 받기 위해 콘셉트를 잡고 쓰는 글이라면 개인의 자유겠지만, 해당 영상은 Xbox 코리아 채널에 올라온 공식 영상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Xbox 게임패스 유저를 저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게임패스 구독료를 매번 내는 사람들이 달갑게 봐주기도 어렵다. 또한 영상의 톤 앤 매너가 어중간해서 패러디가 패러디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도 한몫을 했다.


수위가 더 높은 댓글은 굳이 인용하지 않겠지만 "이런 광고가 승인이 난 거임?", "그냥 안 하는 게 더 나을 정도인데 누가 기획했나요? 이게 공식이라니"와 같은 성난 반응이 댓글창에 가득했다.
아무리 커뮤니티 밈을 패러디한 것이라곤 해도, 다른 업계에서 자신들의 콘텐츠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을 저렇게 묘사했다면 크게 뭇매를 맞았을 것이다. 게임과 게이머는 멸시의 대상도 조롱의 대상도 아니라는 점을, 구태여 칼럼으로 써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