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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뉴스

[김두일의 정글만리] 5장 - 심야난투

모험왕 2015-06-12 15: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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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일의 정글만리] 5장 - 심야난투

무작정 미지의 땅 쓰촨으로 건너간 지 약 반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 가족의 중국생활은 비교적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한국을 떠나는 순간의 막연한 불안함과 도착 초기에 힘들었던 순간들을 잘 넘기고 나니 중국은 의외로 살만한 곳이었다.

 

중국요리 중 으뜸이라는 쓰촨음식은 한국사람인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고, 외국인을 처음 맞이하는 지역 사람들의 인심은 넉넉했다. 학생들은 내 강의를 좋아했고, 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큰 딸 유정이는 현지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면서 놀라울 정도의 중국어 습득능력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엄마의 동네 재래시장 장보기를 도와줄 정도로 모든 것이 순탄했다. 

 

유정이는 학교에서 연예인급 대우를 받으며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시장에 가도 동네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한국인이야~’라면서 쑥덕거리는 등 어디를 가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반면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도리어 초조해졌다. 난 게임을 만들러 온 것이지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머나먼 쓰촨까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아... 멈추어 다오~~

 

내가 학교측 왕총장과 약속한 내용은 ‘게임 만드는 방법의 강의’를 해주는 대신 학교와 재단측에서는 내가 쓰촨 청두에 개발사를 설립할 수 있는 재정적, 인원적 지원을 해준다는 것이었는데 그 약속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처음 2~3개월은 중국 생활의 적응을 위해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게 5개월을 넘어 6개월째가 되니 나는 인내심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왕총장은 나와의 면담을 교묘하게 피해 다녔다. 학교의 재단은 광동의 어떤 건설회사인데 원래 그만그만한 규모의 회사였다가 2000년대 초중반 중국 건설경기의 활성화와 더불어 급성장한 곳이었다. 개교 2년차의 예체능학교를 표방하는 이 학교도 사실 부지(땅)만 넓었지 실제 완공되어 사용되는 건물은 몇 동 되지 않았다. 다만 건설회사를 재단으로 둔 학교답게 온 사방에 각종 공사를 하고 있었다. 

 

중국의 건설공사는 주로 농민공(인부)들이 그 건설현장에서 먹고(심지어 밥도 해 먹는다) 자고 생활하면서 일을 한다. 그 공사가 끝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식이다. 이를테면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들인 셈인데 그 농민공들 중에도 결혼해서 부인도 있고 4~5살짜리 애들도 있었는데 공기도 안 좋고, 위험한 건설현장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에 난 매우 놀랐다. 

 

시골에서 돈을 벌기위해 도시로 찾아온 사람들을 '농민공'이라 말한다.

현재 추산으로는 중국 전체에 약 2억 7천만 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인생이니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천진난만하게 위험한 현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도시가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서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란 대부분의 농민공들은 이렇듯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가난을 대물림 해야 했으며 그 숫자가 적지 않다는 것도 심각해 보였다.

 

가령 어떤 지방 산속의 새로운 길을 내고, 터널을 뚫는데 중장비를 동원하면 한 달 정도면 끝날 공사를 중장비 지원 없이 오직 노동력만을 동원해서 1년 이상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 이유가 그들의 생계를 유지해 주기 위한 지방정부의 고육지책인 셈이다. 

 

무협세계에도 등장하는 녹림(산적들의 모임)이라는 문파는 사실은 가난한 소작농들이 지주나 관리들에게 땅도 빼앗기고, 생계가 곤란해지니 농민이 초적(산적)으로 돌변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인데 현대판 중국 농민공들도 특별한 거처가 없고 언제든 폭도나 강도로 돌변할 수 있기에 중국정부에서는 그들에게 꾸준한 일거리를 줘야만 했다. 그래서 기계가 할 수 있는 일도 사람에게 맡기는 식인 것이다.

 

영화 <군도>를 보면 이해가 빠를 듯...

 

어렵게 왕총장과 면담을 했다. 요지는 ‘재단의 돈줄인 건설회사가 너무 사업을 크게 벌여 자금회수가 늦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진행하는 각종 건설분양이 완료가 되면 자금의 여유가 생길 것이고 그때 게임 회사설립 지원을 해 줄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어쩐지 미덥지는 않았으나 나에게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확신만 있다면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릴 수 있지만 그 확신이 날이 갈수록 무디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학교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학교내 각종 공사의 대금지불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재단의 재정상황이 심각하고, 이 모든 일의 책임자인 왕총장이 당분간 학교를 못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특히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건설 현장의 농민공들에게 무려 몇 개월분 인건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학교측 관계자들도 ‘너는 외국인이니 특히 해꼬지 당하지 않도록 밤길 조심해서 다녀라’라는 귀뜸을 해 주기도 했다. 어느 늦은 밤이었다. 난 간만에 삘 받아 야근을 하다가 밤 늦은 시간에서야 퇴근을 했다. 학교가 있는 충조우라는 동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중국소도시라 밤 10시만 넘으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전혀 없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적막이 흐른다. 

 

그런 길을 난 혼자서 걸어서 퇴근하는 상황이었다. 하필 학교에서 지원해준 전용차량이 정비에 맡겨져서 나는 학교에서 택시를 잡을 도로까지 먼 거리를 걸어 나가야만 했다. 어쩐지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10차선의 넓은 도로에 차가 한대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워킹데드>의 한 장면 같았다.

 


 

별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며 택시를 찾고 있는데 조그만 승합차(봉고차) 한대가 멀리서 천천히 다가왔다. 창문이 살짝 내려가면서 어떤 비열한 얼굴의 중국인의 모습이 보였고 나에게 무슨 말을 걸어 오는 것이었다. 헤이처(나라시 자동차) 영업인가 싶어서 ‘뿌야오(필요없다)’를 외치며 손을 휘휘 내젓는데 갑자기 승합차문이 휙 열렸다. 놀랍게도 그 작은 차량 안에는 시커먼 남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적색경보가 울렸다. 

 

‘강도들인가?’ 혹은 ‘학교의 임금을 받지 못한 농민공들이 외국인 교수인 나를 납치하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나오려는 최초 내게 말을 걸었던 비열한 인상의 중국인에게 혼신의 힘을 다한 주먹을 날리고 차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죽도록 뛰기 시작했다.

 

‘잡히면 난 x되는 거야. 장기가 다 털릴지도 몰라 ㄷㄷ’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일부러 10차선 도로 한 가운데 중앙선을 따라서 뛰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불행하게도 단 한대의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뛰는 와중에도 뒤를 힐끗 돌아보니 무려 8명의 납치범들도 열심히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맨 앞에는 나의 죽을 힘을 다한 일격에 제대로 얼굴을 맞아 코피까지 질질 흘리는 중국인의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그 와중의 분노의 눈빛마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보였고, 그게 더 무서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거리가 좁혀지는 거지? 내가 달리기를 못하는 건가? 아님 저 납치범들이 빠른 건가?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한가한 생각을 하면서 뛰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하필 내 등에는 무거운 인라인 스케이트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난 충조우시의 유일한 인라인스케이터였는데 그날 따라 그걸 신지 않고 등에 메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내 필사의 의지에 비해 그 무게는 내 뜀박질을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만들었던 것이고 그래서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깨닫기가 무섭게 등에 메고 있던 인라인을 풀고 있었는데 그때 납치범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덤벼 들었다. 나에게 최초 일격을 당했던 그 비열한 인상의 중국인이 이번에도 선두에서 달려오고 있었는데 냅다 인라인스케이트를 던졌다. 최초 일격에 이어 두번째 인라인까지 정통으로 얼굴에 맞아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 자빠졌다. 순간 나머지 납치범들이 덤벼 들었다. 덤벼라 개XX들아~.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필사적으로 그리고 용감하게 맞서서 싸웠다. 쓰촨 사람들로 추정되는 그 납치범들은 모두 덩치가 작은 편이고 난 덩치가 큰 편이다. 거기에 죽을 각오까지 더 하니 내가 가진 능력 이상의 괴력(?)이 발휘되었다. 원펀치, 두번째 발차기에 이은 세번째 메치기 그리고 폭풍 같은 물어뜯기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초식을 발휘하면서 난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다. 

 

아, 하지만 중과부족이었다. 3명 아니 4명만 같아도 어떻게 승부를 도모해 볼 텐데 저쪽은 무려 8인조 납치범이었다. 보통 운전하는 놈은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데 저 납치범들은 의리도 강한지 차 안에 있던 모든 애들이 다 이 심야난투극에 가담했다.

 

수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저쪽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나를 제압했다. 팔을 꺾고, 다리를 잡고, 머리를 누르고 이윽고 나는 10차선 대로에 사지를 완벽하게 제압 당한 채 개구리처럼 쭉 뻗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은 비명이었다. 

 

‘이 개새x들아.. 제발.. 살려줘.. @@#@%^&*$$$$%’ 

 

눈물 콧물 핏물이 동시에 다 쏟아졌다. <구룡쟁패 2>는 시작도 못하고 이렇게 나는 머나먼 타지에서 납치를 당하고, 이렇게 내 짧은 인생은 끝나는구나. 그 순간 시집 온 이후 고생만하던 불쌍한 아내와 딸의 얼굴이 마치 영화 속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눈물과 비명의 마지막 반항을 하고 있던 나에게 최초 강력한 일격을 당한 비열한 인상의 납치범 두목이 무언가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서 내 눈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당연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그가 내민 수첩은 신분증인데 중국어로 적혀 있지만 유일하게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중국어 ‘公安(공안)’이라는 단어와 그 옆에 영어로 ‘Police’라는 단어가 보였다. 웅?? 납치범이 아닌 경찰이었구나. 근데 경찰이 왜 나를 납치하려는 걸까? 엥? 순간 무언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이들은 그 지역 공안 즉 경찰이었다. 

 

최근 임금체불 등의 상황에 직면해 있는 건설현장 농민공들이 강도로 돌변해서 어떤 사고를 칠까봐 주변을 감시하던 경찰들인데 야심한 밤 인라인 스케이트 가방(그게 멀리서 본 저들 눈에는 가방안의 흉기로 보였다고 했다)을 메고 비니모자(빵모자)를 쓰고 츄리닝을 입고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보여 심문을 시도했던 것인데 묻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경찰에게 선빵을 날리고 도주를 하니 당연히 흉악무도한 범죄자로 인식해서 추격한 것이다.

 

곰 같은 범죄자 놈이 극심한 저항을 하니 저들도 피해를 적지 않게 입었고 그래서 악착같이 우르르 쫓아와서 끝내 범인검거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외국인이고, 그것도 그 동네에 유명한 한국인 게임개발자 출신의 교수였던 것이다. 그 순간의 공포-처절함-분노-황당-안도감 등의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저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행히 내 가방 안에는 여권이 들어있었고 난 곧 신분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웃기는 상황이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택시가 없어 그들의 승합차를 얻어 타고 무사히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옷은 찢겨지고 팔은 골절되고 얼굴을 포함해서 온몸이 깨지고 피를 질질 흘리면서 온 것에 아내는 혼비백산했지만 난 진심 웃으면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나를 때린 그들에게 ‘짜이찌엔(굿바이)’이라는 인사마저 할 정도로 말이다. 내가 맞닥뜨린 녀석들이 납치범이 아닌 경찰이라는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 

 

그리고 이후 밤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

 

후일담이지만 나에게 최초의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과 두번째 인라인스케이트로 연타까지 당해 가장 큰 부상을 입었던 중국인이 그 팀의 리더이자 경찰반장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나이도 동갑이었다. 

 

당시에는 비열해 보이던 인상이 그 다음에 보니 선량한 인상으로 바뀌어 보이는 것이었다. 역시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로구나. 상황에 따라 얼굴인상마저 다르게 보이다니… 

 

본의 아니게 처절한 심야난투를 거친 우리는 그 이후 가끔 동네에서 양꼬치에 칭따오를 마시면서 우의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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