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에 있거나, 게이머라면 이 시(詩)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중독
틈만 나면 게임한다고
중독이라 하지만
난, 학교 갔다 와서 할 뿐
난, 학원 갔다 와서 할 뿐
난, 밥 먹고 할 뿐
난, 똥 싸고 할 뿐
학교도안가학원도안가밥도안먹어똥도안싸
틈도 없이 하는 게 중독이지
틈도 없이 잔소리하는
엄마가 중독이지
이 시가 초등학생이 쓴 것을 알고 있다면, 어이쿠… 아래 기사를 꼭꼭 읽어 보세요.
초등학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 '중독', 사실은...
‘초등학생이 쓴 시’로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으려고 이 기사를 썼습니다. 당시 시를 쓴 이와 닿기 위해 마우스와 전화기를 열심히 눌렀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기사가 나가고 20일 정도 지난 7월 초 마침내 선이 닿았습니다. <중독>을 쓴 강기화 시인(아래 사진)과 통화가 성사됐습니다. 드디어, 비로소, 기필코, 기어이 물어볼 수 있게 됐습니다.
디스이즈게임: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떤 계기로 <중독>이라는 시를 쓰셨나요?
강기화: 우리 큰 아이 덕분이죠.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인데,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거예요. 남자 아이다 보니까, 컴퓨터 게임도 좋아했죠. 다른 엄마들에 비해 공부 잔소리도 적게 하고, 사교육도 시키지 않았어요. 대신 피아노나 태권도, 수영 같은 예체능은 좀 시켰죠.
노래를 잘 불러서 기타를 치면 무척 어울릴 것 같아서 기타를 배워보면 좋지 않겠냐고 물었죠. 피아노를 잘 치니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기타는 배우기는 싫었나 봐요. 큰 아이가 ‘내가 알아서 할게요’ 같은 뉘앙스로 이야기했죠. 그때 이런 이야기도 했어요. “엄마도 다른 엄마들이랑 똑같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하지만, 이런저런 예체능 배우라고 하는 것은 똑같다.”
큰 아이가 제가 모르고 있던 제 무의식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아 뜨끔했어요. 영어, 수학 잘 하기를 바라는 엄마들처럼 공부는 안 시키지만, 다른 식으로 우리 아이에게 엄마의 욕심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요.
그때 <중독>의 시상이 떠올랐어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는 엄마들의 마음이 중독 아닐까 싶었던 거죠.
<중독>을 초등학생이 쓴 시라는 잘못된 기사가 나왔죠. 오보를 접하셨을 때 어떠셨어요?
사실 <중독>은 2015년 이미 지면으로 발표된 시에요. ‘동시마중’이라는 격월간 동시 잡지 9・10월호에 실렸었죠. 당시에도 페이스북 등 인터넷에 많이 돌아 다녔고요. 엄마들로부터 ‘이것 보면서 반성 많이 한다’, ‘뜨끔뜨끔하다’ 같은 반응들이 많이 나왔죠.
그리고 잠잠해졌는데, 갑자기 최근에 초등학생이 만든 시화의 사진이 돌면서 또 이슈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인터넷을 자주 하지 않아서 다른 동시 작가 분이 카카오톡으로 기사를 보여줘서 알게 됐죠. 바로잡으려고 해주셔서 고마워요.
(편집자 주) <중독>은 강기화 시인의 첫 동시집 ‘놀기 좋은 날’에 실린 시입니다. 2010년 등단한 강기화 시인은 부산에 거주하며 동시 창작 활동을 하고 있죠. 요즘은 '감만창의문화촌에서 동시랑 놀고 있다'고 하네요.
‘놀기 좋은 날’은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돼 그해 11월 산지니가 출판했습니다. 80년대 부산대 앞 사회과학서점의 이름을 딴 출판사 산지니(대표: 강수걸)는 부산 지역 출판사로 무척 유명한 곳이죠. 혹시, 하고 책장을 살펴보니 지스타를 대비해 샀던 <부산을 맛보다>에도 ‘가장 높이 날고 오래 버티는 매'(산지니의 뜻)가 새겨져 있더군요.
‘초등학생이 쓴 시'라고 잘못 알려진 것 때문에 상처받거나 서운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런 것 없어요. 오히려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겼죠. 어떤 동시 작가 분이 인터넷에 뜬 사진을 보고 “요즘 아이들이 어른보다 잘 쓴다”고 했는데, 다른 작가 분이 “그것은 강기화 작가 것이다”고 정정해주는 일 같은 것 말이죠.
제가 썼다는 게 알려지고 나서 시 청탁도 들어오고 그래요.
출판사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화를 쓴 서교초등학교 학생에게 시집과 엽서를 보냈다는데...
그때 쓰셨던 기사를 보니 ‘도서관에서 우연히 보고 시화를 그렸다'는 대목이 있는데, 책을 직접 산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책을 보낼 텐데, 사인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엽서를 써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책을 홍보해줬고(웃음), 또 요즘 아이들이 동시를 잘 안 읽는데, 제 시를 마음에 들어하며 좋아해준 것도 그렇고요. 고마운 마음과 함께 ‘여름 방학 맞이해서 재밌고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엽서에 담았어요.
게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기계를 별로 안 좋아해요. 저 대신 아들이 좋아하면 되죠. (웃음)
게임에 대한 거부감은 별로 없어요. 남동생도 게임을 좋아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해서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다 했죠. 그 덕분인지 지금은 사무기기랑 컴퓨터 사업을 하고 있어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아들도 게임을 좋아하는데 스스로 콘트롤 잘 하는 편이고요.
<중독>이라는 시에 나와있는 것처럼 부모님 세대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데...
룰(규칙)을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LOL>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가 끄라고 하는데 왜 안 꺼” 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LOL>은 그럴 수 있는 게임이 아니잖아요. 게임 나름의 규칙을 알고 보니까,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아들도 나름 그에 맞게 콘트롤하려고 하고요. 부모님들이 게임의 룰을 모르면서 이야기하니까 말이 안 통하는 거죠.
부모님들도 사실 카톡 많이 하고, 드라마 많이 보시잖아요. 밤새 <도깨비> 두세 번씩 보시기도 하고. 그렇다고 “왜 카톡 많이 하세요”, “드라마 많이 보지 마세요” 같은 이야기를 듣지는 않으시잖아요.
어렸을 때 TV를 ‘바보 상자’라고 했던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게임이 있었고, 게임 하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상상력도 기르고 그러잖아요. 요즘 놀 공간도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게 놀이터라고 봐요. 게임 자체를 긍정/부정 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편집자 주) 강기화 시인의 답변을 듣고, 도영임 카이스트 교수의 SDF(서울디지털포럼) 2015 강연이 떠올랐습니다. 가족 내 소통의 강화를 위해 부모를 위한 게임 리터러시 교육이 절실합니다. 게임과 교육에 정통한 전문가가 참여해 기성 세대를 위한 게임 리터러시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어주기를 희망합니다.
아드님이 게임을 많이 안 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웃음)
아휴, 우리 아이도 많이 해요. 요즘 기말고사 기간인데, 집에 오자마자 바로 게임 한다고 해요. 오늘 시험 쳐서 힘들었으니까 해야 된다고. (웃음)
시집을 보니 정수, 솜이, 민재 같은 아이들 이름이 나오던데...
정수가 우리 아들 캐릭터에요. 솜이는 정수 여자친구고요. 민재는 정수 친구인데 사고뭉치지요. 아들 덕분에 소재를 많이 얻었어요. 특히 사춘기 소재를 많이 줬죠.
나비를 삼켰어
“네가 좋아.”
정수 입에서 튀어나온 나비
내 귓속으로 팔랑 날아들었어
귓속을 맴돌다 혀끝에 앉은 나비
정수가 나 좋아한대
정수가 나 좋아한대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해
꿀꺽 삼켜 버렸어
가슴 한가운데 걸린 나비
정수랑 눈 마주칠 때마다
날개가 콩당콩당
게임 업계에 있는 사람 중에 <중독>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게임 업계에 있는 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 없으신지요?
음. 게임을 단순한 상품으로만 여기지 말고, 철학을 가지고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탈출구가 없는 아이들은 업계에 있는 분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게임을 통해 많은 것을 하거든요. 친구 관계도 그렇고, 세상에 대한 생각이나 상상력, 창의력 같은 것도 그렇고요.
게임이 앞으로 확장되면 확장되지 축소되지는 않을 텐데, 아이들의 삶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마치며) 게임 업계에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강기화 시인의 마지막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어른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보내는 힘찬 응원'이라고 하더군요. ‘놀기 좋은 날'을 읽으며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맑아지는 느낌도 들었고요. 가슴 속에 아이를 품고 있는 모든 어른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