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은 때때로 나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일 때문에 바뀌기도 한다.
인디 개발팀 티팟스튜디오는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연구실에서 그래픽과 디자인을 배우던 박민지 대표, 현경렬 CTO가 만든 개발사다. 팀의 이름인 '티팟'도 그래픽을 배울 때 가장 처음 다루는 오브젝트인 찻주전자에서 따왔다. 둘은 게임을 즐겨 했고, 또 자신들이 재미있게 하던 게임을 만들고 싶어 컴퓨터공학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회사를 세우고 만드는 것은 그들이 즐겨 하던 것이 아니다. 우울증 같은 사람들의 심리적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게임,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는 게임 등 그들이 학생 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기능성 게임을 만들고 있다.
박민지 대표와 현경렬 CTO가 이런 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2011년 시행된 '강제적 셧다운제'였다.
# 셧다운제가 바꾼 두 대학생의 인생
짐승뇌 논란부터 게임 중독 이슈, 셧다운제까지. 게이머들에게 2000년대는 마치 광기의 시대와 같았다. 사방이 게임의 적이었고, 허황된 비판도 수시로 튀어 나왔다. 많은 게이머들이 세상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이런 허황된 이야기가 정책에 반영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2011년 시행된 '강제적 셧다운제'는 두 사람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청소년들을 자게 하기 위해 게임 서비스를 제한하라는 정책이 진짜 통과되고 시행됐으니까.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2013년에는 게임을 중독 물질로 분류해 관리하자는 법안까지 탄생했다. 그것이 졸업을 앞둔 티팟스튜디오 식구들에겐 충격이었다.
"일부 우려에 대해 공감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법과 법안까지 태어나는 것을 보니 너무 충격이더라고요. 게임이 사회에 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게 예술적인 측면이 됐든, 기능적인 측면이 됐든 간에요"
그렇게 의기투합한 대학생들이 모여 '티팟스튜디오'라는 게임사를 만들었다. 그들이 평소 즐기던 게임을 만드는 대신, 누군가를 치료하거나 게임을 통해 무언가를 얻는 기능성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박민지 대표의 말을 빌리면 '사회에 울림을 주는 게임'이 그들의 목표였다.
# 개발에 뛰어든 대학생들, 심리 상담사들과 게임을 만들다
물론 힐링 게임, 기능성 게임은 게이머였던 사람들이 결심했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티팟스튜디오가 만들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평소 즐기고 경험했던 게임과 문법부터 구조, 발상까지 전부 다른 세상이었다. 특히 치료용 게임 같은 경우, 게임에 쓰이는 그래픽, 음악 하나하나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하면서 만들어야 했다.
티팟스튜디오는 이 때문에 심리상담소나 정신과 교수, 중소기업청, 현직 교사 등의 전문가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작품인 <타이니 폰드>는 심리상담소 사람들과 같이 함께 만들었다. <타이니 폰드>는 심리 상담을 할 때, 상담 전 마음을 편히 가라 앉히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개발에 참여한 상담사들은 <타이니 폰드>를 게임이 일반적인 작품과 달리 남을 이기거나 공격하는 게임이 아니라 누군가를 도와주고 구할 수 있는 주제가 되길 희망했다. 게임의 그래픽도 흔히 쓰이는 날카롭고 선명한 화풍보단 따뜻한 동화풍의 그래픽을 원했다. 음악 또한 다른 게임에서 쓰이는 것처럼 템포를 끌어 올리는 BGM 대신, 마치 명상할 때 듣는 음악처럼 차분한 음악을 원했다.
<타이니 폰드>를 주로 즐길 유저들이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고려해 나온 의견이다. 게이머였던 티팟스튜디오 사람들은 처음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관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폭풍우에 휘말려 떠내려간 친구들을 구하는 게임 <타이니 폰드>가 탄생했다. 티팟스튜디오 사람들은 심리 상담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상담 전 <타이니 폰드>를 하며 굳은 표정을 풀고 웃는 모습을 보게 됐다. 처음엔 막연하기만 했던 티팟스튜디오의 꿈은 그렇게 굳어졌다.
티팟스튜디오는 <타이니 폰드> 이후, 교사나 상담사, 동화작가 같은 전문가들과 함께 거센 바람에 휩쓸려 간 동물 친구들을 구하는 힐링 게임 <이스트 윈드>, 어린이들에게 경제 감각과 사업에 대해 알려주는 교육용 게임 <우리는 어린디 CEO>, VR 공간에서 '해리포터' 시리즈같은 마법을 부리는 방탈출 게임 <포가튼 챔버스> 등을 만들었다.
# 여전히 부정적인 게임 인식 "더 열심히 게임 만들어야죠"
어느덧 시간이 지나, 티팟스튜디오는 5년차 개발팀이 됐다. 어엿한 중견 개발사가 됐지만, 티팟스튜디오 사람들은 여전히 고민이 많다. 천성 게이머인 그들에게 힐링·기능성 게임을 만들 때 기능과 재미 중 어떤 것에 더 무게를 둬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숙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히 그들을 괴롭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교사 같이 게임과 자주 부딪히는 사람들의 인식은 많이 나아졌지만, 사회 전반적인 인식은 여전하기만 하다. 특히 지난해 말 불거진 WHO의 게임 장애 질병 코드 등록 이슈는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말 많이 속상했죠. 나름 5년 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더 열심히 게임을 만들어야죠. 언젠가 사회에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게임을 만들면 뭐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디스 워 오브 마인> 같이 재미와 메시지를 겸비한 작품으로요."
최근 티팟스튜디오의 관심사는 VR이다. 순수 게임쪽에선 한풀 꺾인 VR 열풍이지만, 교육이나 치료, 기능성 관련해선 얘기가 다르다. 순수 게임쪽에선 높은 진입 장벽이나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게임 문법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다른 영역에선 VR 자체의 높은 몰입감과 현실 재현 덕에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다.
티팟스튜디오 또한 VR의 높은 몰입감이 더 효과적인 기능성 게임은 물론, 나아가 유저들에게 개발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들이 최근 VR 방탈출 게임인 <포가튼 챔버스>를 만든 이유도 VR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VR의 가장 큰 강점은 내가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느낌을 주는거죠. 이 덕에 의외로 나이 많으신 분들도 VR 게임에는 잘 적응하세요. 저희 꿈은 VR의 이런 전달력을 활용해 더 효과 좋은 힐링·기능성 게임을, 더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게임으로 무언가 나아질 수 있다면,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