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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게임부터 마비, 어센던트원까지. 25년 경력자가 말하는 게임 라이터에 대한 오해·진실·미래

에 유통된 기사입니다.
김승현(다미롱) 2019-03-20 11:54:01

<마비노기>는 대학생이었던 저에게 큰 충격을 줬던 게임입니다. 당시 다른 온라인게임에서 보기 힘들었던 깊이 있는 스토리, 무엇보다도 흔히 보기 힘든 '뒷맛이 씁쓸한' 스토리로 밝은 이야기를 주로 접했던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죠. (같은 이유에서 마비노기 영웅전도 참 좋아했습니다)

 

근래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온라인게임은 아이러니하게도 MOBA <어센던트 원>이었습니다. 예. 스토리는 아직 뒷배경에 불과한 게임이죠. 그런데 몇몇 캐릭터들의 뒷배경이 마음을 움직이더군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잃거나 자기 때문에 그것이 망가지거나, 추구하는 것에 배반당한 이들이 상처를 안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이요. 이제 제가 실패에 더 공감하기 쉬운 나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마비노기>와 <어센던트 원>의 이야기를 같은 사람이 작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사심을 안고 무작정 인터뷰를 갔습니다. 그가 게임 라이터(보통 스토리 작가, 시나리오 작가라고 표현)로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거든요. 사심으로 시작한 인터뷰였지만,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고 알찼습니다. 그가 참여한 게임을 즐긴 사람에게나, 게임 라이터라는 업을 꿈꾸는 이들 모두에게요. 넥슨 데브켓 스튜디오 '이원' 님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개발자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는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라 사진은 따로 싣지 않습니다

 

간단 정리

 

- 게임 라이터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대신, 남이 듣고 싶은 얘기, 하지 못하는 얘기를 쓰는 사람

-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전통적인 의미의 이야기보다, 유저들이 체험할 순간 순간의 내러티브를 더 중시한다

- 게임 라이터는 시나리오 외에도 굉장히 많은, 다양한 일을 한다.

- 게임은 공동의 작업물이며, 때로는 타인의 로망을 존중해야 할 때도 있다

- 게임의 미래를 알 순 없지만 인터렉티브 문법의 발전, 유저에게 반응하는 AI에 대해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스이즈게임: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센던트 원> 작가 분이 옛날 <마비노기> 이야기를 쓰셨을 것이라곤 생각 못했네요. 언제부터 스토리 작가 일을 하셨나요?

 

이원: 이왕이면 게임 라이터라는 표현을 써주실 수 있을까요? 보통 많이 쓰는 스토리 작가라는 표현은 이 일을 많이 오해하게 하더라고요. (웃음)

 

이 일은 94년 나온 <불기둥 크레센츠>라는 패키지게임으로 시작했어요. 이후 <가이스터즈>, <마비노기>의 챕터 1(G1~G3 여신강림 파트), 지금은 폐기된 <마비노기 2> 팀에서도 게임 라이터 일을 했네요. 지금은 <어센던트 원> 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원 작가의 데뷔작 <불기둥 크레센츠>

 

 

<불기둥 크레센츠>나 <마비노기> 챕터 1 모두 당시 보기 힘든 씁쓸한 스토리로 화제였죠.

 

그것 때문에 <불기둥 크레센츠> 때 많이 싸웠죠. 반대하는 사람들은 '게임은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건데 이야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쩌냐'라고 했고, 제는 '내가 작가다. 배 째!'라고 하며 강행했고요. (웃음) 패키지게임은 일단 이야기가 나와야 뭐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막무가내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 때와 요즘 게임 라이터가 가장 많이 다른 게 이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불기둥 크레센츠>가 나오고 나니 후회되더라고요. 더 잘될 수 있는 게임이었는데, 제 어두운 이야기 때문에 빛을 못 본 것 같아서요. 근데 김동건(*) 본부장은 반대로 생각했나 봐요. 그런 이야기 덕에 게임이 더 오래 기억되었다고. 

 

그래서 <마비노기>도 함께 하게 됐죠. 그 때 켈트 신화를 많이 공부했는데, 온라인 게임 만들며 그렇게 스토리에 공들일 시간을 주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죠. 아무리 <마비노기>가 온라인게임과 패키지게임의 결합을 콘셉트로 잡았다고 해도요. <마비노기> 만들 때는 서로 잘 알고, 생각도 성숙했기 때문에 밝음과 어두움이 적절히 섞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젠 (제) 아이들이 볼까 무서워 어두운 글은 많이 못 쓸 것 같네요. (웃음)

 

※ 김동건: 불기둥 크레센츠의 제작팀장. 이후 데브켓을 만들어 초기 <마비노기> 개발을 이끌었고, 현재 넥슨 데브켓스튜디오의 본부장으로 있다. '나크'라는 닉네임으로도 유명하다.


 

<마비노기>는 메인 스토리뿐만 아니라, NPC들도 개성 있고 저마다 사연 있어 많은 2차 창작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NPC들이 인기를 얻는 것은 저희도 미쳐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어요. 생각 이상으로 많은 분들이 NPC들의 과거를 궁금해 하고, 또 그들을 재해석하는 걸 즐기시더라고요.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2차 창작 콘텐츠 올리는 게시판을 만들었는데, 이게 시발점이 돼 2차 창작이 크게 활성화됐죠. 

 

일부 캐릭터는 2차 창작 덕에(?) 새로운 성격을 가지기도 했고요. 퍼거스가 대표적이죠. 원래는 실력 있고 인자한 대장장이로 설계했는데 언제부턴가 유저들 사이에선 허당·파괴신으로…. (웃음) 그래서 나중엔 그런 성격의 대사도 추가했죠. 이런 게 게임 라이터의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내 의도만으로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고, 유저들이나 환경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게요. 

 

 

낮은 수리 확률 때문에 유저들에게 애증의 대상이 된 '퍼거스'. <마비노기>는 물론, 한국 온라인게임 NPC 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가 아닐까…?​



어두운 얘기 많이 못 쓰시겠다 말했지만, <어센던트 원>도 (MOBA라 스토리가 겉에 드러나진 않지만) 캐릭터들의 백스토리에서 그리스 비극 느낌을 잘 살리 셨던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비극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더 정진해야겠네요. 저희가 목표한 것은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하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이야기였거든요. <어센던트 원>의 캐릭터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싸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류의 진보'라는 목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거든요. 비극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앞으로 제가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새드엔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캐릭터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이에 반하는 모순적인 상황·갈등이 인상적이었단 의미였습니다. (웃음) 예를 들어 조직의 명령만을 우선했던 '포세이돈'은 제우스를 만나 개인에 대한 존중을 깨닫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를 막고 있는 것은 과거 자신처럼 '대의' 만을 추구하는 제우스죠. 

 

다행이네요. <어센던트 원>의 이야기를 구성하며 가장 신경 쓴 것은 어느 한 쪽이 '악당'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어요. 그것보다 모두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만, 양보할 수 없는 가치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죠. 때문에 캐릭터들의 백스토리를 만들 때도 비록 가상의 세계를 그릴지라도, 그들의 동기와 욕망만은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구성했습니다. 

 

그래서 각색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제우스는 신화 그대로 구현하면 '난봉꾼' 같은 캐릭터가 되는데, 인류 존망이 걸린 싸움에서 이런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분위기가 확 깨지겠죠. <어센던트 원>의 세계는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를 SF 분위기에 맞게 현실적으로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본래 그리스 신화는 각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돼 있는데, <어센던트 원>은 그걸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녹였더라고요. 연대기 정리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많이 놀랐습니다.

 

팀에 처음 합류했을 땐 막연히 '인상적인 것 몇 개 재해석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저희 디렉터가 그리는 그림은 더 크더라고요. 모든 사건이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이야기가 되길 원했으니까요. 덕분에 그리스 신화 공부는 원 없이 했죠. (웃음)

 

사람들이 그리스 신화를 정리된 연대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이야기는 각 에피소드들을 쭉 늘어 놓으면 모순이 많아요. 예를 들어 아르고 호 원정 이야기를 보면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데, 헤라클래스가 활동했을 때보다 300년 전 사람도 여기에 있어요. 아마 헤라클레스가 워낙 인기 있으니 후대 사람들이 끼워 넣은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각 에피소드를 다 비교하면 모순이 많죠.

 

그래서 디렉터에게 이것 다 정리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얘기했는데, 군말 없이 오케이 하더라고요. 개발 리소스를 고려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결정 내리기 결코 쉽지 않은데, 저와 이 일의 중요성을 믿어줬죠. 덕분에 캐릭터들의 백스토리도 잘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이렇게 원전을 정리한 덕에 개발할 때 다른 콘셉트 잡기도 편했죠.

 

"항성간 이민선 볼리션 호의 함장 포세이돈. 그는 유체물리학을 전공한 기술사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고, 지구통합정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고위 장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이 변화한 것은 제우스를 만나면서부터. 제우스는 포세이돈이 내린 자침 명령에 맞서 글리제 식민지의 난민들을 구했고, 크로노스의 음모를 제압해 상급 어센던트로 각성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포세이돈은 제우스를 통해 자기 삶의 선택이 구성원에 대한 존중 없이 조직에 대한 맹목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스러웠던 과거는 이제 제우스의 모습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 포세이돈의 배경 스토리 中 -

 

 

# <어센던트 원>으로 보는 게임 라이터에 대한 착각과 실체

 

그런데 흔히 쓰는 게임 시나리오·스토리 작가라는 말보다, 게임 라이터라는 표현을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시나리오·스토리 작가라고 하면 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접근하거든요. 물론 그런 일도 하긴 하지만, 게임 라이터라는 일 전체를 보면 그 비중이 결코 크지 않아요. 만약 '나는 내 이야기로 게임을 만들어야지'라고 마음 먹고 이 일을 시작하려는 분들은 처음에 많이 당황하고 실망도 하세요.

 

패키지게임을 만든다면 스토리 작가가 주는 의미와 비슷한 일을 주로 하니 큰 상관 없습니다. 패키지게임의 이야기는 만화나 영화, 소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다르죠. 패키지게임이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내러티브, 아니 그 이상의 어떤 '경험'을 주는데 더 집중합니다.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서비스·개발 중인 '라이브 서비스 게임' 대다수는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게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유저에게 주고 싶은 경험을 설계한 다음에 거기에 맞는 이야기나 연출을 고민하는 방식으로 개발돼요. 전반적인 이야기보단, 순간 순간의 연출과 경험, 내러티브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죠. 또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스토리 요소를 줄이고 다른 콘텐츠를 강화하는 경우도 많고요. 

 

작가로서 자존심 강한 사람이 이런 일 하려면 많이 힘들겠죠. 그 자신도, 함께 일할 사람도, 그 게임을 즐길 유저도요. 

 

 

 

이야기를 만드는 기반 자체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네요. 같은 사례는 아니지만, 일하는 입장에선 시청자 반응 보며 쪽대본 쓰는 드라마 작가 같은 느낌이겠어요.

 

더 심할 수도 있죠. 드라마 작가는 그래도 자신의 글을 베이스로 하고 쪽대본을 쓰겠지만, 게임 라이터는 때론 필요한 틀에 맞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또 게임 라이터는 (팀마다 하는 일은 다르겠지만) 시나리오 작업 외에도 굉장히 많은 일을 해요. 예를 들어 저는 <어센던트 원>을 개발하며 원전(그리스 신화)이나 게임에 쓰일 SF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 팀원들에게 공유하거나, 개발 의도나 목표 등을 문서화하고 공유하는 일을 했죠. 얼마 전엔 성우 분들이 캐릭터 대사 녹음하는 자리에 가 연기 톤을 조언하기도 했어요. (물론 보이스 디렉팅은 전문가 분이 하셨습니다)

 

작가로서의 일, 연기 조언 같은 감독을 연상시키는 일, 팀원들의 주파수를 하나로 맞추는 일, 팀의 목소리를 문서화하는 일 등등. 제 경우만 봐도 게임 라이터가 굉장히 다양한 성격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의미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하려면 꼭 필요한 일들이긴 한데, 작가라는 '이미지'를 기대한 사람에겐 남이 만든 콘텐츠에 포장지 (?)만 씌운다 생각할 수도 있을 거에요.

 

 

확실히 '시나리오 작가'라는 이미지를 기대한 사람들은 많이 당황하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게임 라이터라는 표현을 더 선호해요. 스토리 작가나 시나리오 작가는 그 일만 한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게임 라이터는 게임에 대한 모든 것을 쓴다는 느낌이니까요.

 

일의 이런 성격 때문에 처음엔 당황도 많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일에 적응할 수만 있다면 작가로선 느낄 수 없는 강렬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일은 보통 자신과의 싸움이잖아요. 작가가 만드는 이야기는 대부분 자신의 머리를 짜내 만든 결과물이니까요. 

 

그런데 게임 라이터는 작가와 달리 공동의 결과물을 만드는 직업이에요. 게임 라이터, 기획자, 아티스트 등의 아이디어가 하나로 녹아, 라이터 혼자서는 만들지 못했을 빼어난 결과물이 나올 때가 많아요. 그 기쁨은 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죠.

 

 

 

혹시 <어센던트 원>을 개발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얼마 전 나온 '아킬레우스'라는 캐릭터가 게임 라이터의 업무 스타일과 보람을 잘 보여줄 것 같네요. 아니, 누군가와 '함께' 게임을 만드는 이들의 업무 스타일과 보람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네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킬레우스는 창과 방패를 사용하는 인물이에요. 특히 아킬레우스의 방패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신화 상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죠. 그래서 저는 이런 자료를 조사해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기획자와 아티스트와 함께 아킬레우스를 창과 방패를 쓰는 전통적인(?) 그리스 영웅 같은 느낌으로 만들자고 협의했어요. 

 

그런데 아티스트가 중간에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아킬레우스를 창과 방패 대신 <스타크래프트>의 광전사처럼 '손목 칼'을 쓰는 캐릭터로 디자인했더라고요. 방패는 팔 보호대와 일체형이 돼 있었고요. 

 

 

얘기했던 것과 다른 게 나와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저나 스킬 기획자나 기존에 합의한 아킬레우스 상에 맞춰 백스토리와 스킬을 디자인했으니까요. 그런데 아티스트 분이 작업한 것도 멋있는 거에요. 게임을 만들 땐 설정에 맞춰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와 기획자가 보기에 새 모습도 좋아, 새 디자인에 맞게 저희 둘이 다시 작업했죠.

 

저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 싸우고 나서 기존 스타일이 불리하다 생각해 보다 기동성을 살린 무장으로 바꿨다고 백스토리를 짰고, 스킬 기획자 분은 아킬레우스의 전승 중 기동성, 그리고 트로이 전쟁 말기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에 메달아 끌고 다닌데서 모티브를 따 스킬을 다시 디자인했어요. 그 결과, 지금의 빠르고 강력한 아킬레우스가 완성됐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싸우지 말고 타협해라'가 아니에요.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 것 같다면 뚝심 있게 추진해야죠.

 

하지만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로망을 가지고 있고, (그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면) 남의 로망을 존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사례처럼 누구의 생각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모르는 상황에선 더더욱요. 만약 서로 목소리만 높였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합이 무너져 결과물의 질도 장담 못했겠죠. 하지만 '잘' 싸우거나 '잘' 협의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틀리지 않았다면'이라는 기준이 너무 모호한 것 같은데요. 누구나 로망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이걸 냉정히 판단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기준이라면 '나는 누구를 위해 이것을 만드느냐'가 아닐까요? 역설적인 얘기지만, 저는 게임라이터가 자신이 쓰고 싶은 글로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업 게임은 기본적으로 유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아이디어가 선택됐을 때, 다양한 스태프들의 경험과 기술이 녹아 하나의 작품이 된다는 말과 같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게임 라이터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 남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남들이 하고 싶은데 못하는 이야기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야기를 쓰는 입장에서, 자기가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보람이란 정말 각별하죠. 하지만 그것만 너무 신경쓰다가 협업의 의미나 게임의 완성, 유저들의 반향을 작게 보진 않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퍼거스 같은 캐릭터는 나올 수 없겠죠. 

 

 

지금 게임 라이터로서 하는 일이 아쉽진 않으세요? 시장 트렌드로 인해 예전보다 작가로서의 비중이 많이 줄었잖아요.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글을 쓰는 재미는 게임 라이터 말고도 느낄 수 있는 직업이 많아요. 소설가, 드라마 작가를 하면 더 잘 느끼겠죠. 

 

예전만큼 밖에서 저희가 잘 보이진 않겠지만(웃음), 게임 라이터에겐 게임 라이터만의 글과 일, 재미, 보람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론 게임에서 이야기의 비중이 줄었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해요. 그런데 이건 트렌드나 개발 리소스, 플렛폼적인 특성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 가볍게 말하긴 힘들 것 같아요.

 

또 지금의 게임에 '정말' 스토리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전통적인 의미의 이야기는 패키지게임에 비해 줄었을지 몰라도, 순간 순간 유저가 느낄 수 있는 '인상적인 체험'의 강도와 빈도, 이걸 이끌어 내는 방법론은 과거에 비해 계속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의 이야기도 결국 유저에게 인상적인 경험을 주기 위함이잖아요. 방식은 달려졌을지 몰라도, 게임 라이터의 가치와 지향점은 여전하다고 생각해요.

 

 

 

# 인터렉션 문법의 발전부터 집단 창작까지. 게임 라이터의 미래

 

그렇다면 앞으로 게임의 스토리, 내러티브는 어떻게 발전할까요? 지금까지는 전통적인 방식을 많이 빌렸는데, 미래엔 많이 달라질까요?

 

게임만의 표현법과 장치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이 되겠죠. 글은 말 그대로 이야기 전개로 사람들을 자극하고, 드라마나 영화는 여기에 더해 시청각적인 자극으로 사람을 움직이죠. 그렇다면 게임은 뭘까요? 전 이게 '인터렉티브'라고 생각해요.

 

<에이스 컴뱃 어설트 호라이즌> 해보셨나요? 게임 중 힘든 미션을 끝마친 주인공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다른 캐릭터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장면이 있어요. 이 장면의 목적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죠. 고생한 유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그런데 개발진은 여기서 그냥 다른 캐릭터들의 박수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유저에게 직접 버튼을 눌러 주먹을 들어 올리게 하고 그걸 본 캐릭터들이 박수를 보내게 해요.

 

유저의 조작에 캐릭터가 반응하는 것은, 유저가 그 캐릭터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첫 걸음입니다. 개발진은 앞서 말한 장면에서 유저를 이입시켜, 유저에게 박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체험'시키죠. 게임이 다른 콘텐츠에 비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체험'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론 이런 인터렉션 장치가 더 고도화되고, '체험' 자체에 대한 탐구가 더 깊어지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안고 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연출된 이야기보다, 유저가 실제로 체험하는 이야기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으니까요. 다만 이게 게임 스토리, 내러티브의 미래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희가 더 발전시켜야 할 '현재'겠죠.

 

<에이스 컴뱃 어썰트 호라이즌>의 엔딩 중 한 장면. 누군가에겐 그냥 버튼을 눌러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지만, '체험'한 사람에겐 영웅이 된 자신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장면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VR이나 AR과 같은 새로운 기술, 혹은 플랫폼이 스토리·내러티브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GDC에서 제시 셸(*)이 이런 얘기를 했죠. "영화는 처음엔 이야기고 뭐고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기차 움직이는 거나 사람 걷는 것만 보여주는 미디어였다. 하지만 유성 영화가 등장하며 비로소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가 시작됐다"라고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면 콘텐츠도 자연히 변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새로운 기술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겠죠. 어쩌면 이런 전환점은 이미 지나갔지만, 우리가 그걸 효과적으로 활용할 문법을 찾지 못해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인터렉티브'의 다음을 탐구한다면 이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인터렉션이 개발자가 의도한 틀 안에서만 일어난다면, 만약 AI 기술이 발달해 유저의 말이나 감정, 행동 등을 컴퓨터가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결과 값을 보여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보다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이런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게임 라이터는 이걸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 제시 셸: 셸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개발자, 카네기 멜론 대학의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센터 교수, 책 'The Art of Game Design'의 저자

 

 

마치 TRPG(*) 같은 이야기네요. 그런데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는 말은 곧 이를 만들 때 필요한 자원도 커진다는 의미 아닌가요?

 

그렇죠. 그게 인력이 됐건 개발비가 됐건 지금보다 더 커질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스토리와 네러티브 딴에서 혁신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패키지 게임이나 온라인 게임과 같은 분류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문법은 새로운 장르(혹은 플랫폼)에 담기고, 기존의 장르들은 혁신에 영향을 받는 정도겠죠.

 

※ TRPG(Table-talk Role Playing Game): 컴퓨터 RPG의 원조격인 놀이. 프로그래밍된 시나리오가 아니라, 마스터 역할을 한 유저와 플레이어들이 대화를 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놀이. AI가 하는 각종 판정과 계산은 주사위와 룰북의 규칙, 필기구가 대신한다. 유저들이 대화로 게임을 진행하기 때문에 (서로 합의만 한다면) 자유롭게 이야기를 진행하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기술의 발달은 게임 플레이 경험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게 게임 라이터들에겐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이 일도 집단 창작 체계로 가지 않을까요? 사실 이건 드라마나 일부 만화 등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일이 고도화되고 확장될수록 사람 1명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지니까요. 때문에 앞으로는 게임 라이터에게 글 쓰는 역량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언가를 만드는 역량 또한 중요해질 것 같아요. 지금보다 훨씬 더 말이죠.

 

 

약 25년 간 게임 라이터로 일하셨습니다. 이 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노하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20년 넘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특별한 노하우가 있어서라기 보단, 일을 하며 많은 보람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어떤 정서적인 경험을 주는 보람, 선택된 아이디어에 나와 팀원들의 고민이 덧붙여져 게임이 완성되는 보람, 내가 만든 것이 유저들의 해석 덕에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보는 보람 같은 거요. 

 

작가라는 이름 때문에 이 일을 꿈꾸신 분이라면 처음 일을 시작하고 많이 당황 하실거에요. 하는 일이 많이 다르니까요. 만약 이 일을 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게임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지만, 이야기만을 위한 매체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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