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 방영된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는 잊혔던 ‘국민 예능’의 개념을 오랜만에 우리에게 환기했다. 전 국민이 남녀와 노소,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TV쇼를 입에 담는 현상은 ‘TV 시대’가 시나브로 저물어버린 뒤로 잘 재현되지 않던 모습이다. <흑백요리사>의 트렌드 장악은 그래서 더욱더 눈길이 갔다.
온라인 게임판의 상황도 한동안 비슷했다. 사람 가득한 마을, 물음표로 가득한 월드 채팅창, 새벽에도 이어지는 판매/구매 메시지, 개설하자마자 들어차는 파티 모집 창… 메이저 MMO(대규모 다중접속) 게임을 즐겨봤다면 친숙할 풍경이지만, 요즘의 시장 환경에서는, 그리고 특히 신규 타이틀에서는 잘 연출되지 않던 모습이다.
때문에 <패스 오브 엑자일 2>의 출시 후 추세에 눈길이 간다. 현재 게임 안에서는 앞서 언급된 ‘잘 되는 MMO’의 전형적 광경이 매일 펼쳐진다. 유저들은 활발히 팁을 주고받고, 흥정하고, 사기를 치고, 힘을 합치고, ‘비틱질’을 한다. 전편에 이어 상당히 난해하며 어렵고, 잔인하며, 무엇보다도 ‘실험적’인 타이틀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렇듯 사람이 모여든 이유를 한 번쯤 곱씹어볼 만하다.
천 갈래, 만 갈래로나뉘어 버린 소비자들의 취향, 1년에 만 개씩 쏟아지는 신작, 결정적으로 온라인에서도 ‘단체활동’에 점점 더 부담을 느끼는 게이머 전반의 성향 변화. 유저들의 대규모 참여를 전제하는 MMO들이 이전처럼 각광받지 못하는 이유로 꼽힌다.
한편, 의미 있는 도전, 유저와 캐릭터의 동반 성장, 유저 주도적 게임플레이 메커니즘에 열광하는-이전까지 주로 ‘코어 게이머’라고 불렸던-게이머 집단의 규모는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최근 1~2년간 글로벌 단위에서 일정 기간 이슈를 독식했던 <엘든 링>, <발더스 게이트 3>, <헬다이버스 2> 등 게임의 면면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이들 게임은 4명 이하로 협동하거나, 아예 홀로 플레이할 수 있다. 초보 유저들의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하는 데도 수십, 수백만 단위 동시 접속자를 확보했다.
소규모 혹은 혼자서 즐길 수 있는 데다 ARPG 장르 내에서 보기 드문 ‘도전적 난이도’를 핵심 기획으로 내세운 <패스 오브 엑자일 2>는 따라서 (개발진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현재로서 ‘트렌디한’ 게임으로 바라볼 만하다.
물론 어려운 게임이 매력적인 것은 상응하는 성취감과 만족감이 단계적으로 보상되게끔 성실하게 설계된 경우에 한한다. 이 점에서도 <패스 오브 엑자일 2>는 두 갈래의 노력을 들여 양쪽에서 인정받고 있다.
빠른 패치로 밸런스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한쪽 갈래는 ‘파워 판타지’와 루팅의 희열 등 장르 본연의 매력 구현이다. 1,500개 패시브 스킬과 수백 종의 스킬 및 아이템 간 시너지를 연구하고 실험해 보는 빌드적 다양성은 전편에 이어 독보적이다. 그 시스템적 깊이가 그대로 약점이 되었던 1편의 교훈을 고스란히 고려해 편의성을 대폭 키운 점도 유효했다. 파워 밸런스의 경우 다소 잡음이 일고 있지만, 아직 얼리액세스 단계인 점, 신속하게 유저 의견이 대부분 반영되고 있는 점 등에서 고무적이다.
두 번째로는 콘텐츠 분량과 품질 측면에서도 유저의 만족감과 성취를 위해 평균치를 상회하는 노력을 들였다. 현시점 만날 수 있는 50마리 보스는 외양, AI, 공격패턴이 공략에 있어 모두 개별적인 재미와 성취감을 준다. 개발진이 약속한 정식 출시 시점의 보스는 100마리, 적 유형은 600종이다.
올해 ‘더 게임 어워드’에서 최고의 액션 게임 상을 받은 보스전 중심의 싱글 플레이 타이틀 <검은 신화: 오공>의 보스가 107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패스 오브 엑자일 2> 개발진이 상정한 콘텐츠적 표준이 싱글 게임의 그것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MMORPG가 그 거대한 규모를 채우기 위한 ‘몬스터 재활용’ 전략으로 비판받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눈에 띄는 지점이다.
덕분에 <패스 오브 엑자일 2>는 싱글 플레이 게임으로서도 완벽하게 기능한다. 전편에 이어 다른 유저와의 교류 없이 혼자서 플레이하는 ‘솔로 셀프파운드’ 모드가 따로 존재하기도 한다.
유니크한 보스전만 가지고도 싱글 플레이적 감성이 만족된다.
그러나 <패스 오브 엑자일 2>를 정말 싱글 플레이 게임으로만 즐긴다면 게임의 큰 재미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된다. <패스 오브 엑자일 2>는 익숙한 듯 독보적인 소셜 기능으로 다른 ARPG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재미를 준다.
우선 동일 장르 게임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팀플레이 강화 요소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게임의 비교적 느린 템포와, 여기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느린 ‘아이템 파밍’ 속도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유저라면 특히 파티플레이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파티원 수가 늘어나면 난이도가 비례하여 상승하지만, 아이템 획득 확률도 함께 상승하기 때문이다.
단일 스킬의 강화가 아니라 스킬간 연계를 주축으로 하는 전투 메커니즘 덕분에, 유저간 시너지가 천차만별로 창출되는 점 또한 <패스 오브 엑자일 2> 파티 플레이의 매력이다. 가령 동료가 표식을 남긴 적을 먼저 처치해 주변에 광역 피해를 주는 등의 연계가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패스 오브 엑자일 2> 소셜 시스템의 진정한 백미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만큼 깊이있는 거래 시스템이다. <패스 오브 엑자일 2>의 거래는 인게임에서는 제한되며, 공식 홈페이지가 활용된다. 공식 홈페이지상에서 아이템을 찾아 메시지 보낸 뒤, 인게임에서 만나 1대1 거래를 하는 방식이다.
과도하게 복잡해 보이는 상점 검색 기능에는 이유가 있다.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장점도 있다. <패스 오브 엑자일 2> 거래소는 원하는 아이템을 상세하게 검색할 수 있으며, 이는 게임 특성을 생각할 때 필수적이며 유용하다.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독창적 빌드를 추구하는 게임이기에, 아이템 옵션 하나하나가 빌드에 미치는 영향력이 남다를 수 있다.
따라서 ‘아이템 이름’으로 그 성능을 특정할 수 있는 고유 아이템뿐만 아니라 랜덤하게 드롭되는 희귀 등급 아이템도 그 옵션의 세세한 내용에 따라 누구에게는 상당히 높은 가치를 제공하곤 한다. 또한 각종 ‘기능성 오브’를 통해 아이템을 원하는 대로 개조할 수 있는 시스템 덕에 일반, 혹은 마법 등급 아이템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즉, 나에게는 큰 쓸모가 없어 보였던 아이템이 다른 유저에게 유용한 빌드 돌파구가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특유의 빌드 시스템이 평범해보이는 아이템에도 가치를 부여하며, 이것이 장터 시스템과 융합하며 '득템' 체감을 배가시키는 구조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불편하지만 강력한 거래소 검색 시스템이다.
언제 처박아뒀는지 모를 아이템이 갑자기 돈이 된다
아이템을 판매하는 매커니즘도 <패스 오브 엑자일 2> 소셜 시스템만의 독창적 재미를 배가하는 요소다. 유저가 직접 거래소에 개별 아이템을 등록하는 대신, 캐쉬로 구매하는 ‘프리미엄 창고’에 넣어 둔 채 가격만 설정하면, 공식 사이트에서 아이템이 검색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사냥 중 획득하는 아이템의 유형별 시장 가치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아이템 필터’를 적용해 ‘득템’과 돈벌이의 재미를 더욱 키울 수도 있다. ‘필터’는 유저들이 직접 작성하는 스크립트 파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간단히 다운받아 적용할 수 있다. 적용하고 나면 유저 커뮤니티에서 귀하게 거래되는 아이템 유형이 여러 색상과 효과음으로 강조된다.
전편에서 마니악한 게임으로 정평이 나 있던 <패스 오브 엑자일2>는 자유로운 빌드 구축의 재미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유의미한 도전'이라는 엣지를 더하면서 최신의 개발 트렌드에 부합하는 게임으로 등극했다. 이를 통해 전보다 한층 튼실해진 유저 베이스는, 1편에서부터 독특한 매력을 자랑한(그러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소셜 기능의 재미 또한 만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