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세션에 나선 네오플 콘텐츠기획2팀 김현석 팀장은 ‘레기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많은 호응을 얻었던 첫 레기온 ‘이스핀즈’에서부터 지난 11월 9일 적용된 ‘어둑섬’에 이르기까지의 개발 비화들을 전했다. 김 팀장은 “개발자 노트로는 다 전달해 드리기 힘든 개발 과정에서의 애매한 이야기들을 전달하기 위해 강연에 나섰다”고 말했다.
김현석 네오플 콘텐츠기획2팀 팀장
레기온은 이전에 없던 형태의 콘텐츠였기 때문에 이스핀즈 당시부터 고민이 많았다고 김 팀장은 설명한다. 최종 보스가 아닌 몬스터와 긴 전투를 벌일 때는 어떤 방향으로 전투가 펼쳐져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기존처럼 퍼즐과 그로기 메타를 메인으로 삼을지, 아니면 액션게임다운 ‘티키타카’에 주력할지 고민했다.
처음엔 네 마리 용인을 모두 액션 게임답게 연출하기로 하고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막상 플레이해 보니 용인들이 보기에만 다를 뿐 플레이 측면에서 반복적이란 느낌이 들어 개발된 내용을 전부 삭제했다. 그 후에 다시 화룡과 진룡은 피지컬 위주, 금룡은 퍼즐 위주, 그리고 흑룡은 맵 이동 기믹을 위주로 플레이할 수 있게끔 재설계했다.
기획과 실제 게임플레이가 이렇듯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사실 빈번하다. 이때는 차라리 ‘빨리 엎고 다시 만들자’는 것이 기획팀의 전략이다. 개발 프로세스상의 여유 시간을 빈틈없이 활용하기 때문에 이런 재작업 여력이 있다.
대강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시나리오팀과 새 콘텐츠에서 공개될 스토리 범위를 논의해 기획을 마친다. 그 뒤에 필요한 시스템과 아트 리소스를 결정한 뒤, 개발팀과 아트팀에 작업을 요청하게 된다.
두 팀이 작업을 마무리하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 기획팀은 이 시간동안 내부 툴을 사용해 기획 내용을 임시로 제작해서 실험해 보고, 필요할 경우 기획을 수정한다. 이렇듯 시간을 남김없이 활용하기 때문에 업데이트 주기를 맞추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김 팀장은 전했다.
첫 레기온의 주인공인 네 마리 용인은 각자 뚜렷한 개성으로 호평받은 바 있다. 용인들이 그저 몬스터로만 느껴지지 않게 하고 싶었던 김 팀장의 의도가 잘 반영된 사례다.
김 팀장은 “개인적으로 만화를 좋아한다. 용인들을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나루토> 같은 만화를 보면, 그룹을 지어 활동하는 캐릭터들은 서로 성격이 다 다른데, 용인들도 그렇게 느껴졌으면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따라 모험가들을 무시하다가 자신이 불리해지면 화를 내는 화룡, 다소 ‘중2병’ 같은 성격에 화를 못 참아서 무너지지만 곧 돌아오는 흑룡 등의 개성이 정해졌다.
설정뿐만 아니라 연출에서도 특색을 살리고자 했다. 특히 금룡의 경우 마법사 콘셉트인데, 마법사 캐릭터는 대부분 손을 앞으로 뻗어 마법을 사용한다던가, 특정 루프 동작을 반복하는 등의 기획적 ‘클리셰’가 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금룡은 춤을 추듯 아름답게 전투하는 무희 콘셉트로 구현됐다.
또 한 가지 신경 쓴 것은 유저들이 놀랄 수 있는 포인트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레기온 콘텐츠의 첫 등장이기 때문에 임팩트를 주려는 생각이었다. 금룡의 화려한 변신 장면 등이 대표적인데, 이 기획을 아트팀에 전달했다가 욕을 먹기도 했다고 김 팀장은 전했다.
전투 패턴에서도 차별화는 필요했다. 기존에 전혀 못 봤던 기믹을 등장시키면서도, 이것이 너무 새로워 모험가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도록 중심을 잡아나갔다.
김 팀장은 이스핀즈에서 호평받았던 NPC 대화 연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천계인과 용인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을 표현하는데 있어, 용인들과의 전투만 벌어진다면 어색할 것 같았다. 이를 방지하고 상황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첨단 기술을 지닌 천계의 콘셉트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천계인들이 무전으로 모험가와 작전 상황을 소통하는 연출이 탄생했다.
반응이 좋았지만 이를 차원 회랑에서 제외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무전은 천계의 기술이었기 때문에, 차원회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는 UI적 차원의 고려였다. <던파>는 이미 스크린에 보이는 정보가 많은 게임이다. NPC와의 대화가 추가로 화면을 차지할 경우, UI가 산만해지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었다.
대신 무전에 상응하는 요소를 넣으려 했다. 그래서 차원회랑에서는 몬스터 로테이션이 돌아갈 때마다 NPC에게 대화를 걸면 매번 다른 대사가 나오는 이스터에그를 넣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생각보다 확실한 반응은 없었다고 김 팀장은 설명했다.
새로운 유형의 콘텐츠인 만큼 모든 것이 기획대로 구현되기는 힘들다. 콘텐츠기획팀의 고민이 많이 투입됐지만 원하는대로 잘 구현되지 않은 사례가 있다면 차원회랑의 빛의 여인이다.
빛의 여인은 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물리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신다운 권능을 부리는 방향성을 잡고 수개월 동안 다양한 기획을 구상했다. 이에 따라 여러 개의 세계선을 넘나드는 패턴, 빛의 여인의 세계선 조작을 무력화하는 패턴 등을 만들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려운 패턴을 준비할 경우 해당 콘텐츠에서 신규 유저가 ‘폐사’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점을 고려해 패턴을 단순화하면서 앞서 언급된 여러 패턴이 모두 백지로 돌아갔다. 김 팀장은 “하지만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 같아서 후회가 많이 남는다”고 이야기했다.
세 번째 레기온을 준비할 때 기획팀은 콘텐츠 신선도가 떨어졌다는 사실에 고민을 느꼈다. 유저들이 이미 레기온 콘텐츠에 익숙하고 무뎌졌으리라는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신규 모험가 사이에서는 이스핀즈와 차원회랑을 넘기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왔다. 1년 가깝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두 콘텐츠 때문에 게임을 못 하겠다는 피드백을 받으니 고민이 많았다. 그렇다고 어둑섬의 난도를 너무 낮출 수도 없었다. 콘텐츠 클리어와 보상만으로 <던파>의 매력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절충안을 찾기 위해 기획팀은 장비선택 시스템을 넣었다. 유저가 원할 경우 1번을 중복 선택해 콘텐츠를 아주 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런 과감한 시스템을 자신 있게 도입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해방 난이도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던전들이 너무 쉽게 클리어하더라도 해방 콘텐츠가 남아있기 때문에 도전거리가 부족할 걱정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김 팀장은 해방 난이도를 ‘피지컬’ 중심 콘텐츠로 기획한 이유를 설명했다.
‘초월’ 난이도의 경우 캐릭터의 DPS로 클리어 가능 여부가 갈렸다. 이는 유의미한 도전을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상을 공정히 지급하기도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이미 성장 속도가 더딘 유저는 지속적 손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방난이도는 딜이 조금 부족하거나 성장이 더뎌도 ‘액션에 자신이 있다면’ 클리어할 수 있도록 피지컬에 초점을 맞췄다고 김 팀장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