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TIG 게임연구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게임연구소는 게임이나 개발, 산업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셀레스트>는 8월 30일부터 9월 5일까지 에픽게임즈 스토어에서 무료로 배포됩니다.
# 게이머를 위한 보편 서사: “넌 할 수 있어.”
플랫포머(발판과 발판 사이를 뛰어다니는 플레이가 핵심인 게임 장르. e.g. <슈퍼 마리오> 시리즈 등.)는 자주 마니악한 장르로 취급받습니다. 이들은 많은 경우 불친절하며, 높은 조작 난이도와 진입 장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플랫포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이 장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재미 덕분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셀레스트>(2018, Matt Makes Games)는 귀여운 도트 그래픽, 뛰어난 조작감, 정교하게 조율된 레벨 디자인으로 유저와 평단의 극찬을 받은 플랫포머입니다.
<셀레스트>는 주인공 매들린이 ‘셀레스트’라는 이름의 산을 오르는 여정을 다룹니다. 달리기와 점프가 핵심인 플랫포머 장르와 직설적으로 어울리는 설정이죠. 게임은 매들린이 산을 오르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매들린이 처한 상태 - 우울(자기혐오)과 공황 - 을 암시할 뿐입니다.
도입부에서, 매들린은 셀레스트 산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넙니다. 다리는 매들린이 건너는 도중 무너지기 시작하죠. 낭떠러지에 떨어지기 직전, 매들린은 ‘대쉬’ 능력을 각성해 건너편의 발판에 착지합니다. 숨을 돌리며, 매들린은 이렇게 독백(narrate)합니다.
“넌 할 수 있어.”(You can do this.)
밤 하늘 위로 수놓이는 매들린의 독백은 마치 개발자가 플레이어에게 전하는 응원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문구를 본 플레이어들은 마음을 다잡고, 비장한 마음으로 셀레스트 산을 오르는 매들린과 하나가 되어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죠. (그리고 수 백 번씩 죽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셀레스트>는 자아의 회복에 대한 게임입니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개인이 ‘등산’이라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스스로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죠. 무엇보다, 매들린의 이야기는 디자이너가 설계한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며 성장해나가는 플레이어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게임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역경의 극복과 성숙이라는 게이머들의 보편 서사를, <셀레스트>는 플랫포머의 도전적인 게임 플레이와 잘 버무려냅니다. 몇 가지 은근한 장치를 통해 플레이 동기를 부여하고, 몰입감을 높이기도 하죠. 대표적인 것이 ‘딸기’입니다.
<셀레스트>의 개별 스테이지는 하나의 작은 퍼즐입니다. 플레이어의 반응속도를 요구하는 함정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로로 스테이지를 지나갈 수 있는가 파악하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스테이지에는 하나 이상의 정답이 있습니다.
여기서 ‘딸기’는 완벽하게 보너스입니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딸기는 각 스테이지의 클리어와는 무관하게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위치에 떠다니면서 플레이어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딸기를 먹는다고 매들린이 더 강해지거나 스테이지가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딸기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죠.
이 딸기의 정체는 스토리 모드인 A-Side의 마지막에서 밝혀집니다. 산을 등반하고 무사히 산지기의 오두막으로 돌아온 주인공 일행은, 그동안 모아온 딸기를 가지고 파이를 만듭니다. 그동안 모은 딸기의 갯수에 따라 파이의 질과 인물들의 반응이 달라지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위치에 있는 딸기만 수집했거나, 혹은 거의 수집하지 않은 플레이어들도, 이 장면을 보면 자연스레 “딸기를 더 모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복 플레이의 동기가 생기는 것이죠.
1923년, 뉴욕 타임스는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말로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산을 오르십니까?” 조지 말로리는 이렇게 답하죠.
“거기 산이 있으니까요.”(Because it’s there)
<셀레스트> 이야기로 돌아와봅시다. 산을 타고 딸기를 모아 얻는 게 뭔가요? 그런 건 사실 없습니다. 조금 더 화려한 딸기 파이가 그려진 컷씬이 있긴 하지만, 그게 우리가 게임을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하죠.
그런데, 우리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은, 그런 것이 꼭 필요하긴 한 걸까요?
우리는 가끔 이유 없이, 그저 게임을 하기 위해서 게임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동어반복의 구조에서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은 “내가 이 게임을 클리어했어!”라는 자기만족감입니다. 그리고 이때, 게임의 플레이 경험은 그 무엇으로도 환산될 수 없는 미적 고유성을 지니게 됩니다.
# 부디 이 게임을 즐길 수 있기를
모든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에 나름의 의도를 담습니다. 그것이 완벽하게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거기에 담긴 어렴풋한 감정을 읽게 되죠.
그렇다면 <셀레스트>에 담긴 개발자의 의도와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 힌트를 우리는 ‘어시스트 모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시스트 모드’는 직역하면 도움 모드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게임이 너무 어려운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모드는 사실 일종의 ‘치트 모드’입니다. 어시스트 모드는 점프 횟수와 게임 내 속도 등을 플레이어 마음대로 조절하게 해줍니다. 플랫포머에서 점프를 무한으로 할 수 있다는 건 ‘치트’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쓰기가 어렵죠.
하지만 개발자는 여기에 ‘도움’ 모드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시스트 모드를 최초로 켤 때, 게임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송출합니다.
“<셀레스트>는 도전적이지만 접근하기 쉬운(accessible) 게임으로 설계됐습니다. 저희는 난이도가 게임의 경험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 게임이 처음이라면, 어시스트 모드를 끄고 플레이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모든 플레이어가 다르다는 사실도 이해합니다. <셀레스트>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 접근이 어렵다면, 부디 어시스트 모드를 통해서라도 게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의 게임을 만들 때, “딱 몇 명만 이 게임을 플레이해줬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는 개발자는 없습니다. 많은 개발자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접하고 또 재미를 느끼길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 조건은 이를 어렵게 합니다. 시장의 상황이나 가시성 등 외부적, 상업적 요인을 제외하고도, 게임의 장르, 난이도, 디바이스, 그리고 신체적 조건의 차이 등... 현실에는 게임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는 다양한 요인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많은 경우, 개인들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죠.
어떤 개발자들은 이러한 접근성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셀레스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진지한 태도입니다.
<셀레스트>의 어시스트 모드에서, 그리고 동기 부여 방식과 내러티브에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게임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아가, “돈을 주고 우리 게임을 사준 사람들이 이 게임의 끝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당연하지만 순수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모든 개발자가 가지는 감정일 것이지만, 여러 현실적 이유로 인해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 희망 뒤에 있는 것이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개발자의 선의임이 분명하기에, <셀레스트>는 어쩌면 ‘게임은 사람이 만든다’는 명제를 체험하기 가장 좋은 게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존중과 자율, 그리고 예술적인 게임
<셀레스트>는 풍부한 콘텐츠와 도전적인 난이도를 통해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으며 성취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합니다. 동시에, 실력이 부족한 플레이어들을 계속해서 응원하고 위로하며, 자신의 수준에 맞는 도전을 통해 성장하고 스스로를 보듬을 수 있게끔 지지해줍니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율성’과 ‘존중’입니다.
<셀레스트>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대신,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게임에는 스토리 모드에 해당하는 A-side와, 하드 모드에 해당하는 B-side, C-side가 있지만, 전자와 후자는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분리되어 있습니다. A-side만 끝내더라도 게임을 ‘클리어’했다는 감각을 주기 때문에 하드 모드의 플레이는 완전히 선택의 문제죠. 앞서 언급했던 ‘딸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플레이어를 존중하며 ‘선택권을 주는’ 행위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선택이 ‘내면의 동기’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는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자들을 탁자 앞에 앉힌 뒤, ‘퍼즐을 풀라’는 임무를 부여했죠. 여기에 더해, 실험자들에게는 일정한 자유 시간이 제공됐습니다. 데시는 이 자유 시간에 사람들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퍼즐을 풀고 있으면, 그것을 ‘내적 동기’가 작동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데시는 외적 동기를 개입시킵니다. 한쪽의 실험자들에게는 퍼즐을 풀 때마다 일정한 돈을 보상으로 제공하고, 한 쪽의 실험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죠. 상식에 비춰보았을 때는, 당연히 돈을 받은 쪽이 퍼즐을 더 열심히 풀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 놀랍게도, 퍼즐을 더 많이 푼 것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외적 동기가 내적 동기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죠.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공부하기가 싫어지듯 말입니다.)
이러한 내적 동기를 작동시키는 여러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자율성’(autonomy)입니다. 타인에 의해서, 혹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감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결정의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는, 종료 버튼을 누르는 대신 ‘한 턴만 더’를 외치게 만들죠.
어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그 무엇도 강요받지 않으며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해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존중 받습니다. 이처럼 플레이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게임에는 이해타산이 개입하기 어려우며(일일 퀘스트나 기간 한정 이벤트 따위의 손실 회피 전략으로 유저들의 플레이를 유도하는 장치도 없으며), ‘게임을 하는 것’ 외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칸트 미학에서는 ‘무관심성’,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라고 쓰기도 하는 이러한 현상/속성은 미적인(혹은 예술적인) 경험의 성립조건이기도 합니다.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뜨거운 화두였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덧 이 질문은 너무나도 당연시되거나(비슷하게, “게임은 문화다”라거나) 혹은, 질문 자체가 쓸모 없는 것으로(“게임이 예술일 필요가 있을까?”) 평가받게 됐죠. 분명한 것은, 어떤 게임은(즉, 모든 게임이 그렇지는 않지만) 예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셀레스트>는, 예술적인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