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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칼럼

[이종원] 게임은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줬다

이종원의 횡설수설 2회

원리 2014-04-19 19:41:34
운이 좋았다. 90년대 초 미국 유학 시절, 컴퓨터그래픽을 일찍 접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이 결국 나를 게임 쪽으로 이끈 계기가 아닌가 싶다.
 
내 청춘의 꿈은 최고의 프로그래머였다. 직업은 컴퓨터공학 학자나 교수.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컴퓨터공학 쪽 전공이 여러 개 있었다. 당시에는 좀 마이너했지만, 컴퓨터그래픽이 괜찮아 보였다. 그 때만 해도 미국에서도 컴퓨터그래픽 연구실(랩)이 많지 않았는데, 내가 갔던 대학에는 그게 있었다.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한 교수도 있었고, 전망도 있어 보였고, 실험실에 있던 선배도 괜찮았다. 컴퓨터그래픽 전공을 택했다.
 

랩(Lab) 시절을 담은 사진. 맨 위에 까만 안경을 쓴 그룹에서 왼쪽 두 번째, 왼쪽 회식하는 장면에서가운데 노란옷을 입은 사람이 필자다.

당시 컴퓨터그래픽은 애니메이션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전공을 공부하면서 제법 자신감이 붙었다. 물리엔진을 활용한 3D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시그래프(세계 최대의 컴퓨터그래픽 회의로, 전 세계 컴퓨터그래픽 작품들의 경연장으로 유명하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자신감이 충만하던 때였다.

 
교수 대신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유익한 물건을 직접 만는 것에 더 끌렸다. 자연스럽게, 고 스티브 잡스가 만든 픽사에 취업할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졸업 무렵 생각의 방향이 조금 틀어졌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물건을 함께 만들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으로.
 
애니메이션 회사를 만드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픽사와 경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애니메이션은 대규모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대신 게임을 만들 생각을 했다. 솔직히 게임은 만만해 보였다. 몇 명만 힘을 합치면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당시 전공한 첨단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적용하면, 최고의 게임을 쉽게 만들 수 있겠다는 '순진한' 착각을 가지고 있었다.
 
겁이 없었다.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고, 미국에서 알게 된 선배가 교수로 있는 경북대 실험실의 제자들과 무작정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장조사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당시 한국 게임은 전부 2D 게임이었다. 전혀 관심사항이 없었다. 동시접속자가 얼마 나왔다느지, 돈을 얼마나 벌었다느니에는 관심이 전무했다. 한국 게임업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때였다.
 
오직 기술, 기술, 기술. 앞선 기술(물리엔진을 활용한 컴퓨터그래픽)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것을 자랑하고픈 마음이 컸다. 외국의 최고 수준의 게임보다 앞선 '기술'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 프로젝트로 고른 장르는 물리적 프로그래밍을 자랑하기 좋은 레이싱 게임이었다. 풀 3D 레이싱. 게임의 재미보다 렌더링과 물리엔진의 우위를 보여주는 것에 더 노력했다. 프로그래머의 자신감이자, 한계였다. 결과? 당연히 좋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다 만들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출시도 못했다.
 
사연은 이렇다. 원래 PC 버전으로 만들어서, E3에 B2C 부스로 나갔다. 액티비전 산하의 퍼블리셔와 계약될 듯하다가 안 되고, XS게임즈라는 중소 퍼블리셔와 계약했다. 이 곳에서 X박스용으로 게임을 만들자며, 마이크로소프트(MS)를 소개해줬다. X박스 라이선스와 제작키트를 받고, 서드파티 계약도 했다. MS 심사 버전까지 다 만들었는데, XS게임즈에서 X박스 시장도 죽었다며 발매를 계속 연기했다. 그러다가 그 곳과 연락이 끊겨버렸다.
 
그때 온라인이 보였다. 시장성도 있어 보였고, 함께 많은 사람들이 플레이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온라인 버전 만들기에 집중했다. <와일드랠리>(아래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왔다. 이 때도 역시 기술 중심적인 생각의 틀에 갇혀있었다. 온라인에서 구현되는 3D 레이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것 보여주자, 이런 마인드였다. 결국 대중적으로 실패했다.



이후 게임 내부에 집중됐던 나의 초점이 유저 쪽으로 많이 돌려졌다. 기술적인 요소는 새 프로젝트를 선정하는데 2차적인 기준이 됐다. 프로젝트 선정의 가장 중요한 잣대는 ‘유저에게 정말 있어야 하는 게임인가’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기술이 의미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그 기술이 유저에게 유효한 새로운 경험을 주느냐’였다. 
 
첫 게임의 실패 후 대전액션 게임에 도전했다. 당시까지 온라인에는 대전액션 게임이 거의 없었다. 액션 게임 역시 물리엔진을 활용한 기술력을 뽐내려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장르다. 하지만, 그보다는 유저에게 유효한 경험을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나온 게임이 <그랜드체이스>였다. 다행히 국내외로 꾸준히 성과를 보여 현재까지도 KOG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랜드체이스> 이후 KOG는 새로운 장르와 기술적 도전을 추구하되 경험으로써 새로움을 줄 주는 게임을 만드는 전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제한된 자원을 가진 지방 개발사일지라도 기술적/장르적 차별화를 가진, 유저들이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게임을 만드는 것은 꼭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전액션에 이어 대전격투 장르인 <히어로>를 제작한 것도 그런 이유다. 충분한 액션컨트롤을 MMORPG에 적용해 보자고 개발하고 있는 <아이마>도 같은 이유다. 레이싱에서 몇 번 실패했지만, 아직까지 레이싱게임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타인에게 유익한 경험을 주려고 시작한 게임이지만, 오히려 내가 더 많은 유익한 경험을 얻은 것 같다. 게임을 만들고 서비스하는 과정은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게임을 만들기 전에는 대부분 혼자 프로그램을 짰는데, 게임을 통해, 함께 일하는 것이 무엇이면,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됐다. 혼자 키보드를 두드릴 때는 전혀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던 것들을, 함께 일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게임을 만들기 전에는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경험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연구하고, 조사만 하면 됐다. 게임 만들면서 100% 내 의견만 주장할 수 없었다. 설득하는 것도 어려웠다. 더 중요하게, 설득당하는 어려움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 굉장히 힘들지만,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들, 사업을 떠나서, 일을 떠나서, 인생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경험을 하게 됐다.
 
게임 덕분에 국내외 많은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면서도 세월과 함께 정을 쌓아가며, 형제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게임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다. 게임이 아니었으면 오랫동안 잘 지낼 수 있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도 경험했다. 또, 가족, 친척, 친구에게 소홀했던 점도 미안하고 안타깝다.
 
게임은 내게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되겠다’는 오랫동안 간직한 꿈을 포기하게 했다. 대신 KOG 사람들이 세계적인 게임 제작자가 되는 것을 뒷바라지하는 새로운 꿈을 주었다. 게임은 나를 끊임없이 키우고, 변화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