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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창간기획] 어느 새부터 MMO는 안 멋져?

MMORPG 만드는 게임업계, 반기지 않는 게이머의 5가지 '불협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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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우티) 2024-03-14 10:52:46

지금으로부터 무려 3년 전, 힙합 씬에는 기록할 만한 사건이 나왔다. (물론 그 씬에는 언제나 기록할 만한 사건·사고가 나오는 듯하지만.)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 <쇼미더머니 10>에 나와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쇼미더머니>가 무엇인가? 대학교 새내기가 군대에 다녀와서 취직하고 가정을 꾸렸을 시간 동안 인기를 누렸던 "하나의 유행 혹은 티비 쇼" 아니었나. 이찬혁이 바로 그 프로그램에 나와, 그 프로그램을 '저격'한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기자 주변에는 음악 하는 벗들이 꽤 있는데 그들 반응은 세 가지로 갈렸다. '지가 뭔데 힙합을 조롱해?', '야, (욕설) 웃기지 않냐?', '와... 나도 저런 걸 해야 하는데." 아무튼 거의 매년 나오던 <쇼미더머니>는 2022년 시즌 11을 끝으로 휴식기에 들어갔다. 혹자는 이찬혁이 <쇼미더머니>라는 현상에 대해서 일종의 '선고'를 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는 <쇼미더머니>와 힙합 씬에 진정한 의미의 '긴장감'을 주었다. (출처: Mnet)


게임 이야기는 좀 뒤에 나오니까 기다리시라. 창간 기사라면 조금 긴 편이 멋있어 보이니까.


다른 한쪽에서는 웃긴 힙합이 나오고 있었다. 요리 제작 영상을 올리는 과나가 '릴딱밤' 영상을 만들어 올리더니, 피식대학의 '부캐' 임플란티드 키드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안 멋져"의 극단에 있을 것만 같던 개그 유튜버의 곡에 "멋져"의 정점에 선 빈지노가 '셧아웃'을 날렸다. 2주 전 공개된 맨스티어의 <AK47>.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는 현재 유튜브에서 500만 뷰를 넘겼다. 사람들은 그들 애티튜드가 래퍼들의 그것을 풍자하고 있음에 놀랐고, 생각보다 랩을 잘해서 두 번 놀랐다. ― '자, 이제 누가 리얼 힙합이지?'.


이처럼 트렌드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트렌드란 매년 <트렌드 코리아>를 탐독하는 것으로 따라갈 수 없이 좌충우돌이다. 뉴진스가 20년 전 본 듯한 크롭 티셔츠에 토끼 모자를 착용하고 나오더니, 이제는 '프루티거 에어로'가 뜬다고 한다. 대관절 그게 뭐냐고? 2000년대 초중반 인기했던 광고 이미지에서 본 듯한, 열대어와 맑은 하늘, 물방울 따위를 오브제로 배치하는 3차원적인 콘셉트를 일컫는다. 에스파의 <Better Things> 뮤직비디오가 그 트렌드를 캐치했다고 한다.


트렌드가 그렇게 바뀌는데, 오늘날 게임업계에서는 맥을 짚을 수 있는 하나의 장기적인 추세가 있다. 바로 '어느 새부터 MMORPG는 안 멋지다'는 것이다. MMORPG를 성장 동력으로 삼아왔던 한국 개발사들은 몇년 째 기로 위에 서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요청에도 한국 게임사들은 MMORPG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비교적 안전한, 가봤던 길이기 때문이다.


유저들은 MMORPG와 그 개발사에 날카로운 '디스'를 던지며 안전할 줄 알았던 길에는 포트홀이 생기고 있다. 한국인 게이머라면 MMORPG와 좋은 추억이 없을 리가 없는데 이들은 어째서 변한 걸까. 한 게임이 안 멋지다면 다른 게임을 찾아서 갈 수도 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녹록지 않은 모양새다. 그럼에도 한국 게임사는 그치지 않고 MMORPG를 계속 만들고 있으니 '불협화음'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부터 그 5가지 불협화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1. 긴 것을 삼킬 수 없는 시대

우리는 바야흐로 '도파민 중독 시대'를 살고 있다. 릴스나 쇼츠, 틱톡 밖에서도 사람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점점 짧은 것들을 소비하고 있다. 현재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비비의 <밤양갱>은 2분 31초의 노래다. 2014년 3월 음원 차트 1위를 했던 소유X정기고의 <썸>은 3분 31초, 2004년 3월 '뮤티즌송' 3주 연속 1위를 거머쥔 테이의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는 4분 22초다.


2004년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은 104부작, 2014년 방영된 <기황후>는 51부작이었다. 얼마 전 종영한 <고려거란전쟁>은 32부작 만에 막을 내렸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같은 100부작 이상 드라마는 이제 어느 방송사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음악과 영상이 이런데, 책은 어떻겠는가? 모두가 <다빈치 코드>를 이야기하던 게 2004년, 서가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유행하던 게 2014년이다.


2024년 우리는 어떤 책을 이야기하고 있나?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10년 전, 20년 전처럼 많지 없다. 그간 성인 독서율이 어떤 그래프를 그려왔는지 굳이 여기서 인용하지 않겠다.


우리의 집중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작년 화제였던 도서 <도둑맞은 집중력>은 오늘날 학생들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19초에 불과하다고 알린다. 성인 역시 집중력을 쏟는 시간이 길어야 3분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산만해졌고, 그로 인해서 효율성은 떨어졌다. 하루 8시간 앉아있는 직장인이 집중하는 시간은 3시간에 불과하다. 


우리의 뇌는 편안하고도 즉각적인 보상을 갈구하고 있다. 그렇다. 쇼츠에는 중간 광고가 없고, 다음에는 더 재밌고 귀여운 영상이 기다리고 있다. <메이플스토리>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십대 후반 무렵에 즐겼던 콘텐츠를 평생 다시 즐긴다고 한다. 2010~2020년대에 처음으로 게임을 접하는 이들이 수십 시간의 사냥과 여러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는 MMORPG를 즐기기 점차 어려워지는 듯하다.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대로 게임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다. 퇴근하면 발 닦고 (릴스 보고) 자야지 패드 잡을 짬이 어딨나? 2022년 출시된 <엘든 링>은 두루두루 좋은 평가를 받은 명작이다. 반다이남코의 발표에 의하면 게임은 전 세계에서 2,050만 장이 팔렸다. 게임의 분량은 100시간 안팎이다. 그런데 80%에 가까운 이들이 엔딩에 가지 못했다. 게임의 진 엔딩으로 분류되는 '미친 불의 왕' 트로피를 획득한 비율은 전체 14.8%, 노멀 엔딩인 '엘데의 왕'을 얻은 비율은 전체 21.5%에 불과하다. (2024-3-11, 스팀 페이지 기준)


엘데의 왕은 일반 엔딩, 미친 불의 왕은 히든 엔딩. 모두의 찬사를 받은 <엘든 링>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단원에 도달한 사람은 15% 미만이다. (출처: <엘든 링> 스팀 페이지)


<엘든 링>처럼 100시간 이상의 플레이타임을 자랑하는 게임이 오히려 드문 사례다. 지난해 GOTY 후보였던 게임의 평균 플레이타임을 살펴보자. <앨런 웨이크 2>는 20시간, <바이오하자드 RE:4>와 <마블 스파이더맨 2>도 비슷한 수준이다.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원더>는 15시간 안팎이다. 백 시간 이상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은 <발더스 게이트 3>와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 정도다.


싱글게임이 제공하는 시간도 짧아지는 추세인데, 온라인게임은 어떻겠는가?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공신력 있는 지표는 (그마저도 문을 닫고 있는) PC방 순위와 모바일 마켓 순위다. 전자는 라이엇게임즈의 두 게임(리그 오브 레전드[LOL], 발로란트)에게, 후자는 방치형게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MMORPG가 설 자리는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지난해 12월, 유튜버 슈카는 직원을 앉혀놓고 김용 작가의 <영웅문>을 예찬했다. 그 영상의 댓글에는 <사조삼부곡>의 진가를 예찬하는 40대 이상 남성의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댓글 중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그 맛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도 발견된다. 웹소설로 소설 탐독을 시작한 젊은 독자들이 고려원판 <영웅문>에 재미를 붙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이제 게이머에게 MMORPG는 대하소설처럼 피곤한 장르가 됐다. <LOL>과 <브롤스타즈>로 게임을 접한 사람이 하루 종일 초록버섯을 때려잡으며 냄비뚜껑 먹으려고 '노가다'하며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지금도 <메이플랜드>에서 바로 그 맛을 찾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와우 클래식>처럼 추억 속 재미를 찾는 게임플레이다. 그것이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만 소구력이 한정된다는 뜻이다.


2024년에도 KBS <가요무대>는 절찬 방영 중이다. 김동건 아나운서의 세련된 진행과 함께 한국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매주 나와 노래를 부른다. 그곳에 사연을 보내는 사람들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다. 지금 40대, 30대, 20대가 그 프로그램에 새로 재미를 붙일 수 있을까? 이렇듯 MMORPG가 <가요무대>처럼 되고 있다면 과장일까?


MMORPG가 제공하는 추억 속 재미란, 유튜브에 편집된 <무한도전>의 '오분순삭'처럼 과거의 유산 아닐까?


새로운 예능 대신 <무한도전>의 세계 안에 머무르는 이들이 많다. <무한도전> 종영은 언 6년 전 일이다. (출처: MBC 유튜브)



2. MMORPG "돈이 되고 있을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매출 순위가 그대로 공개되는 모바일마켓에서 MMORPG의 장기적인 하락세는 명확하게 감지된다. 엔씨소프트는 2018년 모바일게임을 서비스해 9,113억 원의 매출을 거두었다. 센서타워의 집계에 따르면 2018년 <리니지M>은 8,522억 원의 매출을 거둔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리니지M>, <리니지W>, <리니지2M> 매출 추정치를 모두 합쳐도 당시의 매출을 넘지 못한다.


모바일 MMORPG의 P2W 모델이 정액제 MMORPG보다 더 많은 매출을 가져다 주자 국내 게임사들은 서둘러 이 판에 뛰어들었다. <오딘: 발할라 라이징>, <아키에이지 워>, <나이트 크로우>, <프라시아 전기>, <R2M>, <롬> 같은 게임들이 출시되며 끝없는 경쟁이 벌어지는 양상이다. 할 게임이 많아지니 모바일 MMORPG 게이머들은 서버가 아니라 게임을 갈아타며 재미를 좇고 있다. 그 판에 끼지 않았던 게이머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인 양 부르고 있다. 


시장이 각박하게 돌아가는 탓인지, 엔씨소프트는 웹젠(R2M)과 카카오게임즈(아키에이지 워, 롬)를 고소하며 자사 IP 지키기에 들어갔다. 엔씨소프트와 웹젠의 1심에서 재판부는 "행위를 규제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굳이 힘들여 새로운 게임 규칙의 조합 등을 고안할 이유가 없어질 우려가 있다"며 엔씨소프트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판결했다. 


2018년, 2023년 국내 MMORPG 매출 Top 20 (센서타워 데이터 종합)


회사들의 실적만 보면 MMORPG는 아직 돈이 되는 판이다. <롬>이 출시 직후 1,000만 달러를 번 것으로 예상된다지 않나? 돈이 되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그 판에 끼려 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리니지'라이크'가 일종의 장르로 분류된 지금, 이 판은 "새로운 게임 규칙의 조합"보다는 검증된 재미의 조합이 더 중요한 듯하다. 강해지는 요소를 확률형 아이템을 통해 구매하고, 구성을 맞추어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목표로 (조직적) 활동을 펼친다는 일종의 장르 문법이 굳어졌다.


이 문법에 무시할 수 없는 매출이 따라오자 게임사들이 이런 게임을 만드는 데 주력했던 것이 지난 몇 년의 양상이었다. 그러나 훗날 다른 MMORPG 흥행작이 나오더라도 냉소적 반응은 반복될 것이다. <LOL>은 한 판에 몇십 분이면 끝나지만, MMORPG의 성장에는 끝이 없다. 만렙, 라인 길드, 최상위 레이드 클리어 뒤에 다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싸움이다. 후술하겠지만, 그 싸움에 끼어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계속 열과 성을 쏟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는 기층 구조에서 모바일 MMORPG의 시대가 도래하며 구매력이 없는 게이머들에게 다가오는 진입 장벽은 높아져만 갔다. 기자처럼 얄팍한 지갑 사정으로는 돈을 써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니 자연히 피로가 누적된다. 시간이 흐르고 뉴스가 나오니 게임사가 정직하게 장사하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다른 게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주기도 어려울뿐더러 '이런 게임을 거들떠도 안 본다'는 반응이 일종의 정서가 된 지도 오래다.


개중에 <로스트아크>가 ​나와 한국 PC MMORPG의 계보를 성공적으로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로스트아크> 오픈으로부터 수년 뒤 출시된 엔씨소프트의 <쓰론앤리버티>(TL)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TL>은 업계에서 기대했던 것과 같은 초기 흥행 바람이 불지 않은 채 론칭 100일을 맞이했다. <TL>의 예상실적을 높게 잡았다가, 거기에 못 미치자 기업의 각성을 촉구하는 리포트가 쏟아졌다. 돈은 되는 시장인데 돈이 되게 만들면 유저들이 싫어하고, 돈이 안 되게 만들면 증권가에서 그것대로 문제삼으니 외통수에 걸리는 형세다.


<TL> 나오기 이전에 서비스를 시작한 MMORPG들은 장수하며 시장의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 레드오션도 이런 레드오션이 없다.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PC 중심 MMORPG 기대작으로는 <아키에이지 2>와 <크로노 오디세이> 정도가 있다. 전자는 퍼블리셔 카카오게임즈에서 올해 게임스컴 출전을 예고했다. 후자는 개발사 엔픽셀에서 구조조정을 거친 이후 프로젝트의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로 알려졌다.


그리고 현재 두 게임에 대한 기대는 빅3빅5 시절만큼 뜨겁지 않은 인상이다.


올해 게임스컴 출전을 예고한 <아키에이지 2>



3. 예전만큼 즐겁지 않은 온라인에서의 '연결'


MMORPG에서의 성취는 대규모 사용자 사이에서의 성취이기 때문에 각별하다. 내가 서버에서 처음으로 보스 몬스터를 잡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유저들에게 세금을 매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유저들이 못 띄우는 옵션을 띄웠기 때문에 플레이는 빛을 발한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성취를 공동의 그룹이 나눠 가져가기 때문에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형님이 생기고, 아우가 생기며 현실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 기자도 고깃집하는 게임 형님이 있었다.


유저들의 게임 숙련도 자체가 올라갔다. 커뮤니티가 공략집을 대신하더니, 이제는 파훼법을 유튜브에 올리는 시대다. 보고 똑같이 따라하면 땡이다. 유저들은 과거보다 빨리 '토끼공주'에 도달하고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박탈감과 '현질' 부담을 느끼고 있다. MMORPG는 혼자서 조용히 게임하려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한 곳에 몰아넣으려 하고, 수없이 많은 퀘스트와 할 거리로 접속을 유지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MMORPG라는 장르 밖에서 대체되고 있다.


혼자서 하고 싶으면 싱글게임을 하면 되고, 친구와 하고 싶으면 서바이벌 크래프팅 게임을 하면 된다. 키우기 게임의 대인기도 MMORPG에서의 이탈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성장의 피로를 극소화한 키우기 모델로 키우고 있다는 인터페이스 자체로 재미를 채우는 것이다. 이런 게임은 그저 가만히 있어도 성장이 가능하다. 온라인 접속 조건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온라인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채팅하면서 교류하는 경험은 게임을 하지 않아도 겪을 수 있다.


MMORPG를 통한 온라인 라이프는 소수 게임에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온라인 라이프의 흐름은 샌드박스형 게임으로 넘어갔다.


MMORPG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성장의 쳇바퀴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 거래 사이트에서 자신의 재화를 KRW로 바꿀 기회를 노리는 사람도 있다. 성장에 별 도움 되지 않는 생활형 콘텐츠는 외면당한다. <마비노기>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게임 안에서 해찰 부리는 사람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해찰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우리말인데, 이러한 해찰 부리기는 MMORPG가 아닌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록스> 쪽으로 넘어갔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게임에서 만난 타인이 전부 호의와 동지애로 가득 찬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까지 학습했다. 게임에서 대안가족이나 동지를 찾기 싫은 사람도 많다. MMORPG로 강력한 관계를 형성했던 유저들과 그렇지 않은 유저들의 간격은 제법 크다. 그런 관계가 싫은 유저들은 '내가 왜 저 사람한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형님은 형님대로 서운할 테다. '인마,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로봇처럼 재화 벌이에 천착하는 작업장은 제외하고서라도, 같은 게임 하는 사람이 호의를 베풀 것이라는 기대 역시 전과 달리 줄어들었다. 그런 호의를 받고 싶다면 당장이라도 오래된 MMORPG에 들어가서 '이거 어떻게 해요?'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쓸만한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귀농한 사람들이 으레 겪곤 한다는 뒤틀린 텃세 또한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같은 게임 안에서도 그런데, 다른 MMORPG를 하는 사람을 인터넷 공간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틀딱', '공익', '환자'라고 지칭하며 경멸하기 일쑤 아니던가?


2023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6,292명의 게임 이용자 중 56.2% 이상이 언어폭력, 스토킹 등 사이버폭력을 경험했다.



4. "MMO가 가장 편하다"... 게임 제작의 경로의존성 

그러나 그간 한국 게임사들은 MMORPG를 만들며 성장해왔다. 큰 규모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MMORPG였다. (스포츠게임이 많이 만들어졌던 시절도 있긴 하다.) 싱글게임 개발이 시도된 적 있지만, 대체로 엎어졌다. <P의 거짓>과 <데이브 더 다이버>의 탄생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한 개발자는 "15년 동안 MMORPG만 만들었고, 주변 시니어 개발자들도 대부분 MMORPG로 경력을 쌓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개발자는 "배운 게 이 짓(MMORPG 개발)이기 때문에 그저 MMORPG를 만드는 게 가장 편하다"며 "다른 장르의 게임이 재미있다는 것과 MMORPG에 대한 트렌드는 알고 있지만, 임원진을 설득하고, 백여 명의 팀원들과 일하려면 MMORPG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경력 있는 개발자 중 MMORPG 이외의 장르를 고려하는 개발자가 많지 않는 의미로 해석된다.


오늘날 업계를 일으킨 거물에게도 MMORPG 이외의 게임은 '도전'해야 하는 장르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지난해 지스타에서 기자들과 만나 "MMORPG가 아닌 새로 도전하는 장르로 플레이어를 만나러 왔다"며 MMORPG 바깥의 게임에 대해 '도전'이라 칭했다.


권영식 넷마블 대표는 "2016년에서 2018년 200만에서 300만 정도의 플레이어들이 MMORPG를 즐겼던 시절"이었는데 "2023년 국내 MMORPG가 4~5종 출시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5종 다 합쳐도 100만 DAU(일 활성 사용자)를 하기 어려운 시장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MMORPG 시장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 <아스달 연대기>와 <레이븐 2>를 내놓는다.


한국 주요 게임개발사의 MMORPG 선호는 가장 잘해왔던 것에 대한 믿음, 즉 경로의존성의 발현으로 보인다. 대형 게임사들은 이러한 경로의존에서 벗어나 다른 장르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려 하고 있다. 소비자가 바라는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성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많은 회사가 자사 파이프라인의 핵심부에 MMORPG를 놓고 있다. 유저들이 더는 그러한 게임을 찾지 않을 때 무엇을 내놓을 것인지 뚜렷한 카드를 보지 못했거나, 보고도 믿을 수 없어서 '개고기론' 같은 험한 논조가 나온다.


대형 게임사들은 MMORPG의 끈을 쉽게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검증된 길이기 때문이다.


5. 유저들은 게임사에 맞서고 있다

MMORPG의 완결이 없다는 장르적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저와 신뢰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기적인 호흡을 가져가야 한다는 과제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저와 게임사는 날로 갈등하고 있다. 트럭시위를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을 넘어 시위 '총대'들이 유저의 대리인이 되어 개발자와 마주하는 공개 방송에 등장하기도 한다.


무수한 사례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MMORPG 속 확률에 대한 사건·사고, 규제기관의 제재와 유저들의 집단소송은 지상파 저녁 뉴스가 되었다. 지난해에만 게임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소비자 단체가 2개나 생겨났다. 현 정부도 유저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내 게임 이용자가 70%를 상회하는 등 게임이 국민 모두의 놀이 문화가 됐다. 그런 만큼 게이머의 권익 보호 역시 민생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제 게이머 권익은 무려 "민생"이 됐다. 윤 대통령은 "권익 보호"를 위해 "게임사의 확률 조작 등 기망행위로부터 다수의 소액 피해자들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집단적 피해 구제 입법이 꼭 필요하다"며 적극적인 조치를 주문했다. '게임 이용자 권익 보호'는 현 정부의 '국정 과제'에 포함됐다. 이미 국회에서는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고지 의무를 담은 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혈맹의 조직적 이권이 걸리지 않은 부류의 MMORPG에서도 유저의 집단행동이 전개되고 있다. 게임사들은 전에 없던 짐을 짊어지고 MMORPG를 서비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저들의 한국산 MMORPG에 대한 신뢰는 거의 붕괴 수준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게임을 만들고 있지 않다', '유저를 돈으로 본다'는 차가운 반응은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이런 소식이 오늘날 한국의 저녁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출처: SBS)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다.


새로 게임에 접근하는 이들에게 MMORPG는 소구점이 없다. 대하소설처럼 지루한 장르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성공하는 게임은 드물게 나타나며, 주요 타겟마저도 구매력을 가진 계층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레드오션이 심해지며 단일 MMORPG가 일궈내는 돈과 주목도 또한 떨어지고 있다. 


온라인 접속 환경이 보편화되며 MMO 자체가 피로스러운 상황까지 다가왔다. 한국 게임 개발사들이 MMORPG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게임 개발은 계속되고 있으나, 유저와 게임사의 신뢰관계는 소장이 날아가고 소비자운동이 시작될 정도로 무너졌다.


MMORPG라는 거대한 유행은 지고 있다. 이 이후에는 과연 어떤 게임이 싹틀 것인가? 다시 강조하지만, 트렌드는 좀체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받는 '개그 유튜버의 힙합 음악' 같은 것이 게임 생태계에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 지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날이 현실로 다가오면 당신은 함께 웃을 것인가? 대중의 수준을 비웃을 것인가? 아니면 그다음을 모색할 것인가?


기사를 작성하는 사이에 <AK47>의 조회수는 503만 뷰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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