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서 무기는 중요하다. MMORPG부터 액션, FPS, 대전격투까지 무기가 등장하는 게임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 무기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시대와 배경에 맞게 ‘제대로’ 쓰였을까?
그 전에 게임 개발에서 고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고증은 게임의 값어치를 높이는 데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게임의 재미를 갉아먹는 요소일까?
여기 두 명의 개발자가 모였다. <마비노기 2>를 개발 중인 W팀의 이원 수석연구원과 김한경 선임연구원이다. 두 개발자는 강연을 통해 실제 무기의 발전과정을 추적하고, 게임 개발자들이 시대에 맞는 무기를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될 ‘무기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리고 게임 개발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무기 표현방식의 변화와, 재미와 고증의 사이에서 선 개발자의 선택에 대해 되물었다. 20년차 시나리오 라이터와, ‘무기덕후’ 개발자가 말하는 강연. 24일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에서 진행된 ‘거의 모든 무기의 역사’를 정리했다. /디스이즈게임 안정빈 기자
■ 중세시대의 두 세계, 유럽과 아랍
이원 수석연구원은 강연에 앞서 질문을 던졌다. 서양 판타지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대는? 당연히 중세다. 그럼 그 시대의 ‘로망’인 무기가 있다면? 글라디우스, 쯔바이핸더 등 다양한 답변이 쏟아졌다. 그럼 거꾸로 그 무기가 정말 중세에 주로 사용됐을까? 대답은 쉽지 않다.
무기는 도구다. 그리고 도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는 어떤 무기가 생겨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배경과 필요성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양 판타지의 주축을 이루는 두 세계는 유럽과 아랍이다. 에게·미케네 문명과 이집트·메소포타니아 문명을 시작으로 두 세계에는 수많은 국가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청동기에 의존하던 문명은 그리스 이후 완전히 철기시대로 돌아섰고, 재정로마의 몰락 이후 노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며 문명의 발전이 끊기는 ‘암흑시대’를 맞기도 했다.
전쟁도 잦았다. 여성 한 명 때문에 벌어진 트로이 전쟁을 시작으로 아랍과 유럽의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 대규모 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 한니발의 코끼리 기병이 등장한 포에니 전쟁, 순례자들에 대한 방어와 대규모 유통망 확보를 목적으로 한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 등이 벌어졌으며 많은 영화와 게임 등이 이 시기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특히 중세 후기의 전쟁인 십자군과 백년전쟁은 무기의 종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 필요성에 의해 변화를 거듭해 온 무기들
무기는 역사와 함께 어떤 변화를 겪어 왔을까? 무기 역시 필요성에 따라 오랫동안 변화를 거듭했다.
먼저 장검은 십자군과 백년전쟁 이후 눈에 띌 만큼 많은 종류가 생겼다. 그중 대부분이 날이 휜 ‘곡도’다. 이는 십자군 원정에서 아랍의 곡도를 보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결과다. 여기서 나온 무기 중 하나가 ‘샤벨’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샤브르’다.
단검은 색슨족 고유의 무기였던 ‘색스’와 ‘스크래머색스’가 오랜 시간 인기를 끌었다. 이는 단검의 용도 때문인데, 전투가 아니더라도 가정에서 빵을 썰거나 물건을 자를 때 유용했다. 말 그대로 도구로서 지금의 나이프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고 보면 된다.
창은 중세의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끈 무기다. 만들기가 쉬웠고, 농기구를 응용할 수도 있었던 덕분이다. 이처럼 역사에서는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오래 인기를 끌게 된다. 재미난 점은 당시의 창은 투척무기로서도 활약했는데, 일단 적에게 던지고 나면 적이 이를 받아서 다시 던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창의 손잡이와 창날 사이에 무거운 추를 달아서 한 번 던지고 나면 자동으로 구부러지는 ‘필룸’이라는 창을 만들기도 한다. 로마의 중장보병은 이를 서너 개씩 들고 다니며 전투에 활용했다.
‘크로스보우’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이른 4세기부터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철의 품질이 좋지 못했고, 고장도 잦아서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위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십자군 전쟁 직전인 10세기부터다.
타격무기와 도끼는 중세의 암흑시기에 높은 인기를 누렸다. 손질이나 관리가 없더라도 잡히는 대로 곧바로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특히 ‘배틀액스’는 중세 이후 창에 비해 무겁고 효율이 낮다는 이유로 사라졌었는데, 이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암흑시대가 시작되고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부족해지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바이킹의 상징인 ‘양날도끼’는 실용성 문제로 굉장히 빠르게 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날이 양면에 있는 탓에 외날도끼와 달리 도끼의 날이 아닌 옆부분으로 적을 가격하기 십상이었던 탓이다. 그래서 양날도끼는 바이킹의 이미지를 위한 소품 혹은 제례용품으로 사용되고 실전에서는 다른 무기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갑옷과 방패는 기술의 발달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갑옷은 단순한 가죽갑옷으로 시작해서 점점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됐으며 목적에 따라 철제와 가죽이 따로 사용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플레이트 계열의 갑옷이 나온 것은 14세기의 백년전쟁 이후다.
방패는 가벼운 원형방패에서 시작해서 대중적인 무기인 창을 막기 위해 베기와 찌르기에 강한 거대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후 타격무기와 도끼 등이 유행하면서 크기를 줄였으며 라운드실드부터는 때리기에 강한 내구력을 지니게 됐다.
■ 문명의 발전이 가져온 무기와 전략의 변화
무기만큼이나 무기를 쓰는 사람도 변했다. 고대의 보병은 신발을 착용하지 않았고, 기병은 안장 대신 방석과 비슷한 역할의 도구만을 이용했다. 기병과 보병 모두 한 번에 들 수 있는 장비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창과 검, 활, 방패 등의 다양한 무기 중 ‘기병과 보병 중 누가 어떤 무기를 들고 싸우느냐’가 승패를 갈랐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시대로 오면서 말의 다리에 철로 만든 편자를 입혀서 말을 훨씬 더 잘 달리게 만드는 기술이 등장하자, 로마는 이를 사람에도 적용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죽과 철로 구성된 ‘샌들’이다. 신발을 신은 만큼 이동이 쉬워졌고, 한 번에 무기 하나를 챙기기도 어려웠던 보병의 무장은 더욱 든든해졌다. 그렇게 로마의 주력인 중장보병과 중장기병이 만들어졌고 무기에 따른 전략의 수는 줄어들었다.
이후에는 병과의 분화가 시작됐다. 농경문화가 기반인 유럽은 보병이 중심이었다. 반면 유목민족인 아랍은 기병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 위에서 쉽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등자’가 등장했다. 등자를 이용해 재능이 다소 부족한 사람도 말을 타고 능수능란하게 싸울 수 있었고, 말 위에서 창으로 상대를 강력하게 들이받을 수 있게 됐다.
이는 대규모의 기병 양산으로 이어지고 전쟁과 무기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유럽에서 기사의 위치가 오르기 시작한 것도 등자의 출현 이후다. ※ 등자: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물건.
■ 기술과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게임 속 무기의 표현과 가치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발전과정들은 게임에 어떻게 적용됐을까? 게임에서 무기 표현은 기술의 발전에 따른다. 김한경 선임연구원은 유명한 9개의 게임을 중심으로 게임에서 무기가 어떻게 표현돼 왔는지를 설명했다.
초기의 게임에서는 무기는 말 그대로 ‘이름과 능력치’의 가치만 지녔다. <로그>나 <넷핵> 등에는 도끼, 검, 창, 활, 채찍 등 다양한 무기가 나오지만 보이는 것은 이름뿐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아이템의 이미지는 없다. 그래서 하와이안 셔츠 같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방어구도 등장했다.
우리에게 <고인돌>로 잘 알려진 <프리히스토릭>은 ‘보이는 무기’를 구현한 게임이다. 주인공이 든 무기와 적의 몸에는 보이지 않는 히트박스가 그려져 있고, 두 히트박스가 충돌하는 순간 공격이 성공하게 된다. 게임에서 무기를 구현하는 기본 방식이다.
<프리히스토릭>보다 약간 먼저 등장한 <젤리아드>는 다양한 무기의 활용을 보여준다. 수련용 검으로 시작한 무기는 기사의 검을 거쳐 마법 검으로 거듭나고, 찰흙으로 만든 방패는 업그레이드를 반복하며 티타니움 방패로 바뀌게 된다. 다양한 무기에 맞춰 시각화된 소지품창을 마련했고, 무기에 따른 성능의 구분도 확실히 표현했다.
이후 <대항해시대>에서는 각 공격의 상성을 구현했다. ‘찌른다, 벤다, 친다’의 3종류 공격을 ‘걷어낸다, 맞받는다, 비킨다’의 3종류 방어를 이용해 막아내는 방식이다. 상성을 제대로 맞출 경우 피해를 받지 않고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찌른다를 빼고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성기사의 갑옷이나 베기공격을 강화해주는 성기사의 검 등 상성을 뒷받침해주는 아이템이 등장한 것도 이 때부터다.
<디아블로>와 <디아블로 2>에서는 무기에 랜덤 옵션을 붙여 콘텐츠의 양을 대폭 늘렸다. 무기의 역할을 게임 보조에서 게임의 주체로 바꾼 것이다. 여기에 강화, 뽑기, 조합 등을 통해 아이템을 얻는 경로도 다양화했다.
1997년 발매된 <부시도 블레이드>는 3D에서 무기를 구현한 대표적인 게임이다. 같은 캐릭터가 무기에 따라 다양한 자세를 취할 수 있고, 같은 무기를 들더라도 상단과 중단, 하단 자세에 따라 다른 성능을 보인다. 단순한 히트박스 체크에서 벗어나, ‘어깨를 공격당하면 어깨가 빠지고, 다리를 베이면 이동이 어려워지는 등’ 부위별 파손 개념을 도입한 게임이기도 하다.
2004년의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는 탈것과 방어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역사적인 기병의 필요성과 마찬가지로 말에 오르면 강력한 공격이 가능하고, 말에 질량이 있어서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말을 처치하기 전까지는 탑승자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어렵다. 탈것을 하나의 무기로 활용한 예다.
<던전앤파이터>가 서비스될 무렵에는 논란이 되는 강화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온라인게임에서 보여줄 수 있는 특징으로, 조작 실력과 함께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아이템을 가졌느냐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개발사 입장에서는 콘텐츠의 분량을 늘리기 좋다는 장점도 있다.
마지막으로 <디아블로 3>는 현금경매장을 통해 아이템의 과시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인정했다. 무기가 게임에서 자신의 자랑거리이자 도전과제가 된 것이다. 이미 기존에도 비슷한 풍조나 시스템이 있었지만 이를 개발사가 본격적으로 인정하고 게임 제작에 반영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 한층 늘어난 표현력, 고증과 ‘게임적인 허용’
다시 이원 수석연구원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게임에서 무기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 왔다. 표현의 범위는 더욱 넓어졌고 재미를 뒷받침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게임 속 무기는 ‘순수한 재미’를 위한 수단일 뿐, 고증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적은 없다. 그리고 재미만을 추구한 게임이 발전하고 많은 매출을 올리는 동안 게임에 대한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더욱 악화됐다.
그렇다면 고증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으로 게임을 더 나은 미디어로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이원 수석연구원은 이번 강연의 목적이 단순히 더 철저하게 고증하자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게임적인 허용’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문학에서 약간의 문법 오류도 시적인 허용으로 넘어갈 수 있듯, 게임도 현실을 100% 모사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가 캡슐을 먹고, 생명도 없는 기계보스를 처치하면서 ‘죽였다’는 표현을 쓰고, 죽어가는 플레이어에게 ‘피’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는 것 등은 전부 이해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미국 드라마 <24>에서 주인공이 화장실도 안 가고,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는 걸 보면서 굳이 고증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 감정 표현이 어려운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거대한 눈을 그리는 것을 보고 반발하는 경우는 없다. 어떤 미디어든 매체의 특성상 사실을 생략하거나 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잘 만든 게임에서 하와이안 셔츠가 방어구로 등장하고, 캐릭터가 벗으면 벗을수록 강해지는 등 고증을 전혀 무시하는 부분이 나타남으로써 게임의 완성도 자체가 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아쉬운 상황이다.
■ 사실성과 재미는 공존할 수 있다
무기는 개연성에 의해 발전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외날 도검이 유행했고, 생산 효율이 좋은 창은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등자가 보급되며 기사 계급이 생겨났고, 체인메일을 뚫기 위해 레이피어가, 중장보병을 격퇴하기 위해 기병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개연성을 게임에 적용할 수 있다면 한층 더 재미있고 오래 기억되는 게임이 될 수 있다는 게 이원 수석연구원의 주장이다. 그는 지나친 고증이 게임의 재미를 해칠 수 있다는 걱정도 있겠지만, 지뢰가 밟자마자 터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지뢰찾기를 하더라도 재미가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사실적인 고증이 재미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 수석연구원은 마지막으로 “무기라는 도구를 발전시킨 것은 필요와 상상력이었고, 도구의 결과로 환경을 극복하고 바꿔올 수 있었다”며 “개발자 역시 게임을 단순한 유희의 수단이 아닌 세상을 바꾸는 도구로서 이해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